[Opinion] 과거가 있기에 빛나는 소망 [영화]

글 입력 2023.11.07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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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편집을 통해 시간을 압축하기도 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시간을 보여주며 침묵과 관찰을 불러오기도 한다. <카일리 블루스>는 후자를 효과적으로 활용한 작품이다. ‘있는 그대로’의 시간을 담기. 하지만 치밀하게 보여주기. 이것이 내가 느낀 이 영화의 원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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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일리 블루스>는 <지구 최후의 밤>으로 알려진 비간 감독의 데뷔작이다. 이 영화는 한 번에 이해하기 어려운 면이 있고, 나 또한 영화 초반 내내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곱씹기 바빴다. 그럼에도 강렬하게 다가오는 연출과 아름다운 풍경에 홀려 엔딩 크레딧까지 다다랐을 땐 무언의 감탄사를 날릴 수밖에 없었다. 과거-현재-미래의 공존을 담은 영화 <카일리 블루스>. 나는 이 영화가 어떻게 삼시를 이어 붙이며 현실과 환상을 오가는지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오버랩을 통한 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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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일리 블루스>는 한 문장으로 축약하자면 카일리 마을에 사는 의사이자 시인인 천성이 버려진 조카를 찾으러 가는 이야기이다. 천성에게는 이복동생 라오와이와 조카 웨이웨이가 있다. 웨이웨이는 제대로 된 보살핌을 받고 있지 않은 상태였고, 그러한 소년을 자주 들여다보는 이가 천성이었다. 어느 날 라오와이는 아들 웨이웨이를 팔려고 하지만, 땡추가 그를 만류한 뒤 웨이웨이를 데리고 카일리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땡추는 천성이 거리 생활을 할 때 도움을 준 형님이자 시계 수리공이다. 그는 라오와이의 집으로 향한 뒤 시계를 좋아하는 웨이웨이-벽과 손목에 시계를 그리곤 한다-에게 시계를 보러 가자고 권한다. 이때 이 장면에서 특이한 점을 포착할 수 있다. 카메라는 라오와이와 웨이웨이, 땡추가 있는 탁자에서 침실까지 좌측 팬을 하는 도중 큰 소음과 함께 세 사람과 침실 사이를 녹색의 기차가 갈라 버린다. 마치 침실 앞에 스크린을 설치하고 그 위로 기차에 관한 영화를 틀어놓은 것처럼.

사실상 침실과 오버랩한 기차는 미래의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앞으로 웨이웨이가 땡추를 따라 저 기차를 타고 전위안으로 떠날 것이다. 만약 내가 같은 장면을 촬영한다면 어떻게 표현했을까? 아마 땡추가 웨이웨이를 데리고 기차역까지 간 뒤 기차에 탑승하는 모습을 보여줬을 것이다. 또한 이것이 우리에게 익숙한 정보 제공의 방식일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과감하게 그러한 과정을 생략하고 기차가 방 안을 통과하는 환상적인 순간으로 탈바꿈한다. 이렇듯 현실로 침투하는 환상과 미래에 대한 암시가 동시에 드러나는 연출은 내게 강력한 체험을 선사했다.

카메라는 계속해서 기차를 패닝하고 그와 함께 죽은 어머니에 대한 꿈을 꾸는 천성의 모습이 천천히 오버랩된다. 이때 영화는 디졸브를 통해 자연스러운 공간의 변화를 유도한다. 라오와이의 침실과 천성의 침실이라는 비슷한 공간으로의 이동. 그리고 둘을 매개하는 듯한 기차. 이는 우연이 아닌 치밀한 설계처럼 보인다. 과거 천성은 어머니에게 버림받은 적이 있다. 즉 웨이웨이처럼 천성 또한 비슷한 과거를 지녔다는 정보에 대한 암시인 것이다. 이처럼 천성이 웨이웨이를 찾기 위해 전위안으로 향하는 기차를 탈 것이란 미래의 암시와 더불어 과거 정보에 대한 암시의 역할을 오버랩으로 보여주고 있다.
 
 

41분의 롱테이크로 보여주는 꿈의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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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성은 웨이웨이가 땡추를 따라 전위안으로 향한 것을 듣고 떠나기 위해 채비한다. 광롄-천성과 함께 일하는 늙은 의사-은 전위안에 있는 옛사랑의 우환에 대해 전해 들은 참이었고, 천성에게 그의 물건인 테이프와 셔츠를 돌려주길 부탁한다. 그렇게 짐을 챙기고 기차에 탄 천성은 잠든다.

이 영화는 55분 45초를 기점으로 분위기와 촬영 기법이 급격하게 변화한다. 고정하거나 패닝하던 촬영기법은 핸드헬드로 바뀌고, 선명한 화질은 저화질로 바뀐다. 그리고 한 번의 컷 편집 없이 장장 41분 3초의 롱테이크로 당마이에서의 여정을 길게 담아낸다.

천성은 손목에 시계를 그린 소년의 오토바이를 타고 당마이 강변으로 향한다. 감독은 핸드헬드로 천성을 따라가다가 갑작스럽게 골목으로 빠져 다른 곳으로 향하기도 하고, 양양-카일리의 가이드가 되고 싶은 바느질하는 소녀-을 따라가기도, 당마이의 미용사를 따라가기도 한다. 이렇듯 다양한 인물이 롱테이크의 주연이 되어 펼치는 이야기는 조금 미스터리하다.

당마이에 도착한 천성은 양양에게 셔츠 단추를 꿰매주길 부탁한다. 천성이 셔츠를 벗고 양양이 작업을 마치길 기다리는 동안 한 미용사가 양양에게 부탁한 것을 받고 떠난다. 천성은 홀린 듯 광롄의 옛사랑의 셔츠를 입고 그녀를 따라 미용실까지 향한다. 이후 카메라는 양양을 따라가며 양양을 마음에 두고 있는 오토바이 소년과 새침한 양양의 모습을 보여준다. 다시 미용실로 돌아와 천성과 미용사를 프레임 안에 담는다. 천성은 그녀에게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하며 울다가 함께 공연을 보자며 데이트 신청을 한다. 그리고 그녀는 이를 수락하며 곧바로 공연장으로 향한다.

천성은 공연을 구경하는 미용사에게 노래 한 곡을 불러주겠다며 무대로 걸어 나간다. 그의 노래가 끝나자마자 소년은 전위안으로 가는 배를 놓치기 전에 가야 한다며 천성을 재촉한다. 떠나기 직전 천성은 미용사에게 광롄이 부탁한 테이프 <고별>을 건넨다. 롱테이크의 끝자락에서 소년의 오토바이를 타고 당마이를 떠나는 천성은 소년에게 묻는다.

“너 이름이 뭐야?”
“웨이웨이요.”
“웨이웨이? … 꿈꾸는 것 같네.”
 
그렇게 롱테이크는 끝이 난다. 이후 천성은 죽은 아내와의 첫 만남을 떠올리는데, 이때의 아내는 미용사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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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롱테이크는 마치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POV 샷으로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카메라를 들고 인물을 따라가는 이가 감독임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나는 이 롱테이크의 시점이 꿈을 꾸는 천성의 시점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천성이 무대에서 노래를 부를 때 카메라는 하늘을 한 번 쳐다보다 천성을 바라본다. 이는 누군가가 주변을 둘러보고 있는 것 같은 장면이다. 생각해 보면 꿈속에서 우리는 어떨 땐 당사자가 되기도 하고, 어떨 땐 관찰자가 되기도 하며. 어떨 땐 심지어 내 모습을 관찰하는 관찰자가 되기도 한다. 그렇기에 천성은 꿈을 꾸며 전지적으로 당마이에서 일어나는 일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위와 같이 툭툭 튀는 혼란스러운 전개와 저화질의 POV 샷은 몽환적이지만 불명확한 꿈의 여정을 잘 표현하고 있다. 또한 관객을 속이고 예상 밖의 동선으로 향하는 이 롱테이크는 무언가 ‘내가 당하고 있다!’라는 느낌을 받게 한다. 이조차도 통제할 수 없는 꿈의 특성을 표현한다.
 
“모든 우여곡절은 밀집한 새 떼 속에 숨겨져 있다.
하늘과 바다도 알아채지 못하지만 좋은 꿈을 그리워하면 볼 수 있게 된다.
뒤바뀐 순간을 더듬어 찾으면 모든 그리움은 비슷한 나날에 숨겨져 있다.”
 
위 문장은 천성이 낭독한 자작시 중 한 구절로, 결말에 삽입된 시이다. 감독은 뒤바뀌고 혼합된 작품 속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더듬어 찾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 구절로 천성의 여정을 마무리한 것이 아닐까. 그렇게 영화 전반의 과거-현재-미래를 구분하고 다시 이어 붙이다 보면 이 기나긴 롱테이크는 과거, 현재, 미래의 여정을 일시에 담아낸 것처럼 보인다. 과거의 천성과 미래의 웨이웨이, 그리고 꿈을 꾸는 현재의 천성을 말이다.
 
 

시계, 마법 같은 소망


<카일리 블루스>는 시계를 집요하게 노출하고 있다. 생매장당한 땡추의 아들은 땡추의 꿈에 나와 시계를 갖고 싶다 하였고, 그는 아들을 위해 시계를 태워주었다. 그러한 땡추는 현재 시계 수리공을 하고 있다. 또한, 웨이웨이는 벽과 손목에 시계를 그리는 것을 좋아한다. 이처럼 영화 전반적으로 시계에 관한 내용이 다소 자주 등장하는 점을 미루어 보아 시계에는 어떠한 의미가 담겨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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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초반 웨이웨이가 벽면에 그린 시계 그림은 못의 그림자에 의해 정상적인 방향으로 흐른다. 하지만 영화 후반부에서는 어째서인지 시계가 되돌아가는 연출이 등장한다. 천성은 전위안에 도착해 땡추를 찾아간다. 시계 수리공답게 땡추의 차량에는 시계가 많이 배치되어 있는데, 이때 시계는 차창에 비추어 반대 방향으로 돌아간다.

당마이에서 만난 소년이 천성과 헤어지기 전 한 이야기가 있다.

“내가 시간을 되돌려야 양양이 돌아온대요.
(…) 기차에 탔을 때 보게 하려고요.
카일리발 석탄차가 당마이에서 서거든요.
기차 칸마다 시계를 그려서 연결되게 할 거예요.”

허혈성 심장 질환을 앓고 있는 땡추는 천성에게 며칠만 웨이웨이와 함께 지내겠다며 개학한 뒤 아이를 데려가라고 한다. 이에 천성은 다시 카일리행 기차에 탑승한다. 기차 안에서 잠이 든 천성의 옆으로 석탄차가 빠른 속도로 지나는데, 이때 기차 칸마다 그려진 시계 그림이 연결되어 마법같이 반대 방향으로 돌아간다. 어떠한 바람이 담긴 채로.

다시 말해 시계는 누군가의 소망이다. 원수에 의해 죽은 아들이 돌아왔으면 하는 땡추의 소망과 양양이 당마이로 돌아왔으면 하는 소년의 소망, 그리고 죽은 아내가 돌아왔으면 하는 천성의 소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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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성과 비슷한 아픔을 가진 외로운 소년 웨이웨이. 이 작은 아이가 손목에 시계를 그린 것도 돌아가고자 하는 순간이 있기에, 그러한 소망을 담아 계속해서 시계를 그렸으리라. 하지만 야속하게도 과거는 변하지 않는다. 비간 감독은 환상을 통해 과거를 적극적으로 바꾼다거나 미래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려 하지 않는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과거와 미래를 마주할 뿐이다. 그럼에도 소망을 담아보는 것. 그것이 <카일리 블루스>가 전하고자 하는 말 아니었을까. 과거의 그리움을 지닌 채 작은 소망을 그리는 인물들의 현재가 애달프다 못해 아름답게 느껴진다.
 
나는 이 글을 이나경 작가의 소설 <포스트 잇!>의 일부를 인용하며 마무리하고 싶다.
 
 
동생이 선심 쓰듯 건넨 메모지를 받아들고 소년은 이번에는 현관으로 향했다. 동생과 시선을 교환하고, 가녀린 한숨을 내쉰 후에, 소년은 두꺼운 현관문에 포스트잇을 조심스레 붙였다.
 
'아빠 오세요.'
 
그러자 초인종이 울렸다.
 
  
[조유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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