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이 장소'가 아니면 의미 없는 작품 [미술]

<기울어진 호>와 공공미술
글 입력 2023.11.04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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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장벽이 매일 같이 다니던 길목에 생겼다고 상상해 보자. 아마 많은 이들이 ‘웬 날벼락? 이라고 생각하며 비켜 지나갈지도 모른다. 실제로 리처드 세라의 작품, <기울어진 호> 설치 이후에 위와 같은 이의가 제기되었다. 이 작품은 적갈색 녹슨 강철판이며, 크기는 가로 120피트, 세로 12피트, 두께 2.5인치로, 높이만 3m 65cm이다. 세라는 이를 광장 한가운데에 세웠다. 대체 <기울어진 호>는 어떻게 그리고 왜 이 곳에 설치가 된 것일까?


우선 제작자인 리처드 세라(Richard Serra)의 이야기부터 해보자. 그는 1939년 미국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에서 조선소 배관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1961년부터 1964년까지 예일대학교에서 공부하면서 철제공장의 아르바이트를 통해 생활비와 학비를 벌었는데, 이때의 경험이 그의 일생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고 한다. 1960년대 말부터 세라는 납을 용해하여 재료 자체를 드러나게 하는 '과정의 예술'을 선보이게 되는데, <1톤의 기둥(카드의 집) One Ton Prop(House of Cards)>이 하나의 예시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작품을 해온 세라에게, 당시 미국 연방 조달청은 공공작품을 의뢰하게 된다. 건축 비용의 0.5%를 미술작품을 설치하는 데 사용해야 한다는 규정에 따른 요청이 있었고, 그 결과 1981년 7월, 뉴욕 맨해튼의 페더럴 플라자에 위치한 연방 청사 광장에 <기울어진 호>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통행을 반대한다는 이유로 오랜 법적 공방을 걸쳐 결국 철거되었다.

 

 

1311.jpg

Richard Serra  b.1939, 1981, Steel, 365.7 x 3657.6 x 30.45 cm, Destroyed

Photo: Anne Chauvet

Courtesy Richard Serra

(Image source : Tate)

 

 

그러나 이 작품의 의미는 압도적인 크기만큼이나 분명히 존재한다. 바로 작품을 통해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공간을 경험하게 할 수 있도록 한 점이다. 광장을 가로질러 설치된 작품 때문에 시민은 같은 공간에서도 두 개의 다른 지역으로 구분하게 되고, 자신의 행동 또한 그 전과 달라졌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즉 전혀 다른 시야와 감각을 일깨워 주었다는 것이 색다른 의미로 다가왔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위 작품은 ‘장소 특정적’ 미술이라고 불리는 대표적 예에 해당한다. ‘장소 특정적 미술’이란 작품과 장소가 불가분의 관계를 띠고 있는 것을 말한다. 다음은 리처드 세라가 공청회에서 변호한 말로, 작품과 장소, 인간의 정체성과 장소의 관계에 대해 알 수 있다.


 

“인간의 정체성은 공간과 장소에 대한 경험과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장소- 특정적 조각’이 끼어들어 알고 있던 공간이 변화하면, 사람들은 그 공간과 다른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조각을 통해서만 불러일으킬 수 있는 상황입니다.”

 

- 1985년 리처드 세라의 공청회 변호, 게이트웨이 미술사(이봄) pp.466-467 발췌

 


즉 이 장소 특정적 미술은 특정 장소에 따라 작품이 만들어지는 특성이므로, 작품이 작가가 의도한 위치에서 벗어나면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그렇다면 <기울어진 호>와 이것이 위치한 장소와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앞서 언급했듯이 작품이 설치되었던 장소는 연방 청사 광장이다. 


이 장소는 미국 정부의 한 정치적 건물이 있는 곳이다. 이러한 건물 앞에 위압적인 철제를 놓은 것은 시민들이 정부의 권력 또는 이데올로기를 느끼게 하기 위함인데, 이것이 두 번째 리처드 세라의 기획 의도였다. 실제로 연방 광장은 맨해튼 남부 최악의 건축 프로젝트 중 하나였다고 한다. (김동규, 2017) 당시 광장과 주변의 건물들은 파괴적 도시재개발을 상징하였고 재개발이 비판에 부딪히자, 재개발 자금도 감축되었으며, 그 결과로 만들어진 장소가 연방 광장이었다고 한다. (김동규, 2017) 그러므로 시민은 이 작품이 왜 이곳에 놓였고, 이러한 형태를 띠는지 생각해 보면서 비판적인 시각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점에서도 미학적 의미가 발생하며, 그의 작품은 향후의 공공미술의 형식과 기준에 큰 영향을 주게 된다.

 

*

 

이렇게 작품 <기울어진 호>는 미술이 건축의 부수적인 장식 역할에 그치지 않고 일상에 융합되었다는 점, 시민들의 비판 의식을 형성하게 했다는 점, 과거 특권 의식에 젖은 고급 모더니즘의 한계를 극복하려 했다는 점에서 미술사적 가치가 있다. 나아가 그의 작품 속 ‘장소-특정적’ 개념을 통해, 우리는 여전히 대중과 소통하는 오늘날의 공공미술이 어때야 하는지도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심은혜.jpg

 

 

 

* 참고 자료

- 1985년 리처드 세라의 공청회 변호, 게이트웨이 미술사(이봄) pp.466-7 발췌

- 김동규. (2017). "[B-art의 시선] 사고에서 사건으로 : 기울어진 호를 재소환하며", 오늘의 문예비평, p.248

- 배문규, "무엇이 공공미술인가... 범정까지 간 리처드 세라의 '기울어진 호'와 '슈즈트리'", 올댓아트, 2017.05.26.

"리처드 세라",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심은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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