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사람이 떨어졌고, 나는 도망쳤다.
-
단순히 개인적인 글
'사람이 떨어졌고, 나는 도망쳤다.' 내가 예술에 빠진 계기는 이 한 문장으로 정리될 것 같다.
유년 시절, 집은 조금 가난했다. 조부의 사업이 어쩌고, 땅이 어쩌고 하는 어린아이가 이해하기 힘든 그런 이유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불행하다 느낀 적은 없다. 친구와 떡꼬치를 먹기 위해 자판기 아래를 뒤적거리기도, 그러다 보니 따돌림을 받기도 하였지만 '그러는 녀석들이 잘못된 거지' 하며 어찌저찌 넘기고 살았던 것 같다.
이후 어찌 보면 가장 단순한 형태의 삶으로, 현실에 만족하며 작은 행복을 탐하던 그저 그런 생활을 계속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 집에 가던 어느 날, '무언가 무거운 덩어리가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방금까진 사람이었던 무언가. 금방 주변을 메운 비명과 울음 속에 섞인 정보는 '저 '무언가'가 가난으로 가족과 싸웠다. 그리곤 저렇게 변했다.' 라는 것이었다.
강렬한 기억이지만 당시 별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바라봤던 기억 속에 잠깐 '용돈 모아 산 바지인데 묻은 자국 때문에 다시 못 입으려나.'하는 생각이 스친 정도였다.
다만 그때의 기억은 '가난한 사람은 저렇게 된다'이라는 느낌의 프레임으로 나에게 각인된 듯하다. 프레임이라는 모습의 끝없는 공포, 하지만 16세의 아이가 가난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질 나쁜 행동을 하며 현실에서 벗어나는 것, 혹은 가난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는 부모를 혐오하는 것에 그쳤다.
지금의 나는 그 프레임에 내가 담기지 않기 위해 그저 도망가는 삶을 살고 있다. 항상 쫓기는 느낌, 그 감각을 지울 수 없음에, 가득 찬 자기혐오와 불만족이 살아가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러면서 아마 대부분의 '발버둥 치지 않는 인간'에게 느끼는 맹목적인 불쾌함도 이쯤 시작한 것 같다.
보통 문제를 해결하기보단 벗어나는 것이 훨씬 간단하다. 나에게도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보단 가난하지 않은 사람의 삶을 따라 하는 것이 훨씬 편한 길이였다. 미디어의 그런 사람들은 보통 미술을 좋아했던 것 같다. 이게 내가 문화예술에 대한 첫 번째 태도였다.
그래서 무작정 미술관을 다녔다. 아이에게 미술관은 관대하다. 단순히 버스비만 있다면 많은 곳을 구경할 수 있었다. 아무것도 몰랐지만, 그저 뭐라도 된 것 같은 느낌에 매료되었다. 자연히 많은 시간을 미술관에서 보내다 보니, 남들에 비해 조금은 지식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
보통 미술관에 다니다 보면 자연히 갤러리나 화랑으로 발걸음을 옮기게 된다. 미디어가 보여주었던 가난하지 않은 사람, 그 집합이 존재하는 곳이기도 하니 나에겐 조금 더 특별한 느낌이었다.
사실 예술에 빠져들며 '내가 되길 바라던 사람'은 단순히 가난하지 않은 사람이 아니게 되었다. 예술을 사랑하고, 그 파도 속에 유영하며, 그것을 존중하는 사람. 그 여러 레이어가 겹친 어떤 이미지가 내가 생각하던 이상향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 눈에 보인 이상향의 모습은 '갤러리에서 타 주는 믹스 커피를 마시는 "대우받는 나"에 취해 있는 사람'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예술에 대한 무지함과 그것을 뿌리로 핀 무례함. 그들에게 미술은 교양 있는 자신을 꾸미기 위한 사진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정도였다. 하지만 누구도 그 태도에 발 걸을 수 없는 상황까지.
모든 것이 역겨웠다. 내가 바라온 이상향엔 발버둥 친 흔적, 예술을 사랑하는 모습 따윈 찾아볼 수도 없었다. 나름 목표하던 삶의 모습을 부정하기에 충분한 이미지였다. 이 시기 이후로 타인에 대한 혐오감이라던가 역겨움은 더욱 커져갔다. 물론 이 모든 것의 파생은 '가난에서 벗어난 척'하기 위한 나의 환상이기에 그 혐오감과 역겨움의 가장 큰 대상은 나였다.
여러모로 나에게 남아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그 빈 곳만큼 몇 안 되는 '남아있는 것'이었던 문화예술에 의존하게 되었다. 문화예술을 대하는 나의 두 번째 태도이다. 특히 감정적인 측면에서 그렇다. 맹목적인 타인을 향한 부정이 지속되며 타인의 감정을 파악하는 것은 여러모로 귀찮고 어렵다.
하지만 예술은 솔직하다. 수많은 예술을 맛보기도 하였고, 예술가가 퍼뜨려 놓은 여러 기호를 벗겨내고 다시 퍼즐을 맞추는 과정. 이런 확실한 장치가 있기에 예술의 감정을 파악하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다. 애초에 감정의 폭 자체가 많이 사그라졌지만, 남아있는 작은 감정을 의탁할 곳은 오직 예술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에디터가 된 이유이다. 글을 쓰며 예술에 대해 한 번 더 곱씹을 수 있다. 예술을 다시금 해석하고 느낄 수 있다. 어쩌면 몇 안 되는 감정을 느낄 시간. 이것은 글은 쓰면 쓸수록 더욱 소중해졌다. 물론 이 이기적인 과정이 에디터라는 존재 이유엔 전혀 부합하지 않기에, 여러모로 타협을 거치긴 하였지만.
아무튼 아이러니하게도 내 감정이 타인에게 공유되는 것은 익숙지 않기에, 여러모로 항상 아쉬운 글이 나오는 것 같다. 다음의 개인적인 글을 쓰는 나는 지금과는 무엇인가 달라져 있길 기대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신효창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