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상페의 그림 같은 기분 [도서/문학]

일상 속의 유머와 따스함을 느끼고 싶다면
글 입력 2023.10.15 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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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날씨에 영향을 꽤 많이 받는다. 그런 내가 이십 대 초반부터 중반까지는 햇빛 쨍한 맑은 날보다 조금 흐린 날을 훨씬 좋아했다. 구름이 잔뜩 끼어있어서 모든 게 가라앉아있는 것 같은 그런 날에, 나만 가라앉아있는 게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렇게 흐린 분위기가 좋았다. 그러다가 재작년의 언젠가부터 나의 어딘가가 변했다. 흐린 날이 그렇지 않은 날보다 뭔가 견디기 힘들었고, 머리가 아픈 것 같았고, 너무 서늘했다.


대신 아주 맑은 날이 훨씬 좋아졌다. 햇빛이 거의 모든 곳을 비추고 예쁜 하얀 구름이 띄엄띄엄 떠 있는 맑은 날이 오면 깔끔한 기분이었고, 몸이 가벼워졌고, 아주 따뜻했다. 그리고 그런 기분이 들었다. 이 동네에서 각자 어디론가 걸어가는 사람들, 버스 안에 있는 사람들, 도서관에 앉아있거나 돌아다니며 책을 고르는 사람들, 동네 카페 앞 테라스에 앉아서 이야기하는 사람들, 프랜차이즈 카페 안에서 노트북으로 뭔가를 하는 사람들, 공원 안의 벤치에 여기저기 앉아있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을 볼 수 있는 이 동네의 소소한 분위기를 느끼고 싶은 기분.


나는 이런 기분을, ‘상페의 그림 같은 기분’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

 

장 자크 상페는 프랑스의 삽화가로, 1962년 첫 번째 작품집 <쉬운 일은 아무것도 없다>를 시작으로 <돌풍과 소강>, <사치와 평온과 쾌락>, <얼굴 빨개지는 아이> 등 다수의 작품집을 발표하며 여러 나라에서 사랑을 받았다. 또, 《파리 마치》와 《렉스프레스》 등 프랑스의 주요 잡지와 미국 《뉴요커》의 표지 삽화가와 기고자로서 활동하며 많은 작품을 남겼다.

 

국내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으며 작품집이 출간되어왔고, 가장 최근인 올해 8월에는 출판사 미메시스에서 상페의 별세 1주기를 추모하는 작품집 <미국의 상페>와 <뉴욕의 상페>가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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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페의 그림은 하나하나 자세히 살펴보는 재미가 있다. 그림 속 사람들의 자세와 스타일, 표정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는 재미. 또, 어떤 사람이 이쪽 페이지에서 누군가에게 인사하듯 어딘가를 보며 손을 흔들고 있으면, 저쪽 페이지에서 분명 그 사람과 눈을 마주치며 똑같이 손을 흔들며 인사하는 사람이 있고, 셋 넷이 모여 활기차게 수다 떠는 모임이 있는가 하면 저 구석에는 두 사람이 악수를 하고 있고,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는 한 사람이 혼자 멍하니 있는 다던가 하는, 이런 걸 구경하고 상상하는 재미가 있다. 이렇게 상페의 작품을 보다 보면 어느새 입꼬리는 올라가 있고, 그의 연필에, 그의 손에, 그의 머릿속과 마음에 특별한 무언가가 있었다는 게 분명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상페는 이렇게 일상 속 사람들의 모습을 그렸다. 우선 그는, 인간의 여러 감정을 그렸지만 그중에서도 우정을 가장 고귀하게 여겼고, 다양한 예술활동 중 삽화를 직업으로 선택했지만 사실 음악을 가장 꿈꿨다. 그래서 그의 여러 작품집에는 사람이든 동물이든 어떤 관계에서의 우정이라는 따스한 감정을 담은 작품이 많고,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이나 공연장에서의 사람들이 자주 등장한다. 이렇게 우정과 음악을 사랑해서인지, 그의 작품들에는 유머러스함과 함께 따뜻함이, 솔직함과 함께 낭만이 스며들어있다.


또 그의 작품에는 특히 외로워하는 사람들, 일상에 치여 피곤해하는 사람들, 자신감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 냉소적인 사람들이 많이 등장한다. 하지만 이를 절대적인 어두운 면으로 치부하지는 않는다. 대신, 우리 모든 인간은 살면서 이런 순간들이 있지, 하는 듯한 위로와 공감의 온기를 살며시 집어 넣는다. 그래서 우리는 상페의 그림 속 사람들을 보며 짠한 마음으로 미소짓기도 하고, 피식 웃으면서 가만히 바라보기도 한다. 당연히 생기 넘치는 사람들, 활짝 웃는 사람들도 등장한다. 열심히 조깅을 하고, 서로 사랑을 하고, 웃는 얼굴로 인사를 하고, 여유있는 표정과 함께 악기를 손에 든 사람들. 이들을 보며 우리 일상 속에서의 행복한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중요한 건, 이런 모든 사람들, 이렇게 어색함을 주고받는 사람들과 편안한 친밀함 속에 있는 사람들, 서로를 건조한 시선으로 보는 사람들과 반짝이는 시선으로 보는 사람들, 애처롭기도 하고 귀엽기도 한 이 사람들의 모습을 그린 상페의 시선에 따뜻한 애정이 담겨있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모두 외로운 존재이지만, 우리가 사랑할만한 무언가를 찾고, 발견하고, 그렇게 함께 살아가기에 사랑스러운 존재라는 걸 생각하게 되니 말이다. 그의 글과 그림을 피식 웃으며, 또는 감탄하며 하나하나 들여다보던 내가 느꼈던, 그의 연필과 손과 머릿속과 마음에 뭔가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을 때의 그 ‘뭔가’는 이 세상과 사람과 예술을 향한 그의 커다란 애정이 아니었을까.

 

*

 

아까 했던 날씨 이야기로 글을 마무리해보자면, 흐린 날을 힘들어하고 맑은 날만을 기다리는 사람이 되었던 나는, 몇 주 전 경주로 여행을 갔다가 흐린 날의 멋을 오랜만에 느꼈다. 아, 흐린 날은 이런 멋이 있었지, 하는 생각을 하며, 예전의 내가 흐리고 비 오고 서늘한 날씨에서 즐겼던 그 분위기를 조금은 다시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언제고 다시 변하고 변할 수 있겠지만, 일단은 그렇다. 적어도 며칠 동안은 흐린 날이면 너무나 멋있었던 첨성대 주위에 비를 맞는 사람들과 간간이 보였던 우산 쓴 사람들, 그리고 그 도시의 운치 있던 나무들의 모습이 떠오를 것이다. 그리고 맑은 날이면 가끔, 상페의 그림 속 사람들과 이 동네의 따뜻한 분위기가 떠오를 것이다.

 

그러다가 어쩌면, 맑은 날이 아니라 엄청나게 흐린 어느 날 갑자기, 문득 상페의 어떤 그림과 글이 생각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나는 아마도, 걸어서 십 분 거리의 동네 도서관으로 가서 상페의 책들을 또 빌려와 볼 수도 있을 것이고, 그렇게 내 머릿속에 흐린 날 상페를 읽는 기억도 생길 수 있는 일이다. 그건 분명 아주 좋은 일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어느 구름 가득한 날, 도서관에서 상페의 책을 빌려 금방이라도 비가 떨어질 것 같은 하늘을 쳐다보면서 집으로 걸어오고 있는, 상페의 그림 속에서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은 내 모습을 상상하며, 그의 책들을 보며 함께 듣던 앨범 중 몇 개를 소개한다.

 

 

1. Pink Moon _ Nick Drake

 

 

 

닉 드레이크의 음악은 외롭고 서글프다. 상페의 그림 속 사람들이 고독함을 느낄 때, 자신감이 바닥을 치는 듯한 기분이 들 때, 그래서 입꼬리가 한없이 내려갈 때 왠지 닉 드레이크의 음악을 찾아 들을 것만 같다.

 

 

2. The Awakening _ Ahmad Jamal 

 

 

 

재즈는 따스하다. 그래서인지 상페의 작품과 잘 어울린다. 나는 기분 좋은 여름날 특히 자주 듣는 앨범 중 하나인 이 앨범을 지난여름에 상페의 책을 읽으면서도 들었다. 진지하지만 장난스럽기도 하고 자유롭기도 한 아마드 자말의 음악은 상페의 그림 속 사람들이 북적북적한 틈에서 각자 뭔가를 하고 있는 귀여운 장면들을 떠오르게 한다. 

 

 

3. Empathy _ Shelly Manne & Bill Evans

 

 

 

셸리 맨과 함께한 이 앨범은 물론이고, 빌 에반스의 음악은 특히 가을과 겨울에 찾게 된다. 그의 연주를 들으면서 그리움과 외로움, 어떨 땐 희열, 그리고 사랑 같은 감정이 담겨있는 상페의 작품들을 하나하나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자면, 상페의 글과 그림이 빌 에반스의 음악과 닮아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어떤 계절의 어떤 날씨든, 상페의 글과 그림으로 몽글몽글한 위로를 받길 바라며.

 

 

[강가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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