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상처의 대물림 - 독친 [영화]

사랑이라는 명목하에 반복되는 분노의 역사
글 입력 2023.10.28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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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독한 사랑


 

‘유독하다’는 형용사와 사랑이라는 명사가 함께 있는 모습은 어쩐지 낯설게 느껴진다. 사랑은 좋은 것을 주고 받는 행위라는 게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각보다 유독한 사랑은 많다. 예를 들면, 상대를 너무나도 사랑해서 자기 자신을 저버리는 행위나 사랑하기 때문에 아껴주고 지켜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옭아매는 것이 그렇다.


어떤 것이든 극단에 치우치면 좋지 않다. 사랑 또한 마찬가지다. 사랑을 방패막으로 앞세워, 되려 관계에 악영향을 줄 행동을 한다면 그 사랑은 사랑이 아니게 된다. 좋은 마음에서 비롯된 것일지라도, 상대가 원치 않는 행동이라면 그것은 틀림없이 잘못된 방식이다.

 

사랑에 대한 정의가 각자 다르듯이, 유독한 사랑의 모양 또한 여러가지로 발현될 수 있다.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 또한 마찬가지다. 그 사랑 또 다시 여러가지 모양으로 쪼개진다. 누구는 대가없이 기다려주는 모습일 것이고, 또 다른 이에게는 아낌없이 주는 것일 수 있다. 때로는 엇나간 모양 또한 부모 자식 간 사랑의 모습이 될 수도 있다. 지금부터는 부모의 엇나간 사랑에 대해 이야기 하고자 한다.


 

 

독친 : 자식에게 독이 되는 부모


 

 

“지나치면 좋은 것도 독이 돼...”


“부모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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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독친>은 겉으로 보기엔 다정하고 우아하며, 늘 딸아이를 걱정하지만 어딘가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엄마 "혜영"과 딸 "유리"의 이야기다. 영화는 유리의 죽음 이후, 형사가 해당 사건을 조사하며 이야기를 하나하나 되짚어 가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앞서 이야기한 ‘엇나간 사랑’ 중, 영화에서 선택한 사랑의 모양은 바로 ‘집착’이다. 표준 국어 대사전에서는 집착을 “어떤 것에 늘 마음이 쏠려 잊지 못하고 매달림.”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늘 마음이 쏠린다는 지점에서, 집착은 아끼는 마음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사랑의 정의가 “어떤 사람이나 존재를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 또는 그런 일.”이라는 점에서 사랑하기 때문에, 집착하게 되는 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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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언제나 과하면 독이 되는 법이다. 혜영은 딸에게 과한 집착 증세를 보인다. 핸드폰에 위치 추적 어플을 설치하여 유리의 동선을 시시각각 확인하거나, 도청 장치를 심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다. 이런 상황을 누가 견딜 수 있겠는가?

 

그렇다. 이건 사랑이 아니라, 감시다. 감시의 비슷한 말로는 독시가 있다. “단속하기 위하여 주의 깊게 살핌”이라는 뜻의 독시는 이번 영화의 제목인 <독친>을 잘 설명한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딸을 위하는 마음에서, 혜영은 유리가 엇나가지 않도록 단속하고 주의 깊게 살피기 때문이다. 그러나 혜영의 방식과 정도에는 문제가 있다. 영화를 보는 내내 관객의 목을 조여올 정도다. 현실이라고 생각한다면, 감히 유리가 받는 고통의 크기는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진정으로 자식을 위한다면, 자식이 다방면에서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부모의 역할일 것이다. 영화 속에서 엄마가 딸에게 하는 행동을 살펴보면, 혜영은 자식을 물건으로 생각하는 듯 보인다. 자식을 귀속시키려는 마음이 기저에 깔려있는 부모라면 자식을 물건처럼 대하는 법이니까. 그 과정이 반복되면서, 유리는 무기력을 학습한다.

 

물론 딸은 상황을 변화시키려는 노력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습된 무기력이 무서운 이유는 그 상황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는 생각을 안겨주기 때문에 자신의 상황이 결코 나아질 수 없다는 잘못된 믿음이 생기기 때문이다. 유리는 결국 그 믿음에 잠식되고 말았다. 이윽고 그녀가 선택할 수 있었던 가장 확실한 선택인 죽음을 택하게 된다.

 

영화에서 혜영이 딸에게 왜 그렇게 집착할 수밖에 없었는 지에 대한 암시가 나온다. 바로 딸의 방에서 나온 그림 일기의 한 페이지가 복선이다. 관객은 앞선 상황을 토대로 유리가 그린 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사건을 깊게 추적하면서, 일기의 내막이 밝혀진다. 사실 화자가 혜영이었던 것. 무릎을 꿇고 엄마에게 빌고 있는 그림과 함께 적혀져 있는 가슴 아픈 이야기의 주인공이었던 것이다. 이것을 미루어 보아, 그녀 역시 잘못된 사랑 속에서 자랐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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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친>은 가정폭력의 대물림에 관한 영화다. 혜영이 원가정에서 자라면서 받았던 아픈 기억들. 그것은 잊혀지거나 지워지지 않는 생채기가 되어 가슴 속 깊이 남아 염증을 유발하였고, 결국 그녀의 몸 곳곳에 퍼진 그 염증의 화살이 다시금 자신의 딸 아이에게로 향한 것이다. 유리의 자살로 화살을 쏠 대상이 없어지자, 그 화살의 촉은 하나 남은 아들에게로 향하며 영화는 끝난다.

 

혜영의 어린 시절이 불행했다고 한들, 그녀가 유리에게 행동은 결코 정당화될 수도 없고 그럴 자격 또한 없다. 자신이 받았던 벌을 자식에게 주지 않으려 노력했어야 하는 것이 어른으로서 취해야 할 올바른 행동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했어야 할 행동은 현재 자신이 저지르고 있는 게 누굴 위한 분노와 집착인가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러지 못했고, 결국 죽음으로써 그 대가를 치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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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의 죽음을 추적하는 동안, 혜영 다음으로 많이 등장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형사다. 영화에서 형사는 전달자 혹은 깨달음을 주는 일종의 신과 같은 존재로 보인다. 유리의 사건을 조사하며, 끊임없어 혜영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 지적하고 조언한다. 딸을 진정으로 생각했다면, 부모 자식 간에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을 지켰어야 한다고. “부모가 자식의 모든 걸 알 수는 없는 법”이라고. 딸에게 주는 사랑 자체에 매몰되어 집착하는 것이 아닌, 딸이 좋아하는 것과 먹지 말아야 할 음식이 무엇이었는지를 알아차리고 유리라는 한 사람에 집중하는 것이 옳은 사랑을 주는 것이었음을 말이다. 하지만 혜영은 “걱정이 되어 그랬다, 자식인데 사생활이 어딨냐” 등의 말로 다시 한 번 관객을 경악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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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의 대사들은 많은 부모 혹은 부모가 될 준비를 하는 이들에게 스스로를 되돌아보게끔 만든다. 혜영은 딸은 너무 사랑하다 못해 꽉 안고 놓아주지를 않았다. 그러나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숨이 막힐 때까지 안아서는 안 됐다. 힘들 땐 손을 잡아주고, 멀리 뛰어가야 할 땐 물을 건네며 잘 다녀오라고 이야기를 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영화에서 말하는 주제는 한국 사회에 만연한 문제 중 하나다. 건강하지 못한 가정에서 자란 아이는 사회에서도 건강하게 적응하는 데 훨씬 어려움을 겪는다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가 보다 건강하고 성숙해지기 위해서는 독립적이고 건강한 미래 세대를 기르는 게 중요하다. 다음 세대가 가꾸어 갈 대한민국이 아름답기를 바란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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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등장인물들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하나 같이 병든 사람들이다. 담임교사, 주예나, 함께 동반자살을 하려 했다가 살아남은 생존자 등 수많은 인물들은 각자만의 취약점을 가지고 있다. 추측하건데, 영화에서 이야기하고자 다른 하나는 사회적으로 약자의 위치에 놓인 사람만이 약자가 아니라는 점이지 않았을까. 겉보기에는 멀쩡해 보여도 속은 문드러져서, 위기상황에 놓였을 때 정상적인 기능 수행이 어려운 사람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말이다. 

 

어려운 상황을 겪고 나서, 원래대로 회복하기란 쉽지않은 법이다. 저마다 회복에 걸리는 시간이 다르며, 같은 상황을 마주했더라도 그 상처의 크기를 각자 다르게 판단하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빠르게 돌아가는 사회는 회복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러한 상황에서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스스로의 회복에 집중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면서 탈출구를 찾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점이다. 피해자를 탓하는 게 아니다. 스스로가 극복할 힘이 있음을 명확히 인지하고, 해결에 초점을 두면서 자신을 돌보아야 한다는 소리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건, 최대한 외부적 요인이 자신의 상처에 들어올 틈을 주지 않아야 한다. 가해자는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사회 전체가 될 수도 있다. 가해자를 벌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보다 잊지 말야아 할 것은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보란듯이 잘 살아내는 것. 그뿐이다.

 

*

 

주제 선정과는 별개로, 영화 자체는 아쉬움이 남는다. 현란한 카메라 무빙에 익숙해져서 심심하게 다가왔던 걸까. 보다 다각도에서 촬영을 했더라면, 인물 심리 묘사나 상황 자체에 대한 몰입감이 높아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상황에 대해 지나치게 기술하는 것 또한 아쉬웠다. 마치 옆에서 누군가 소설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글자를 하나씩 읊어주는 듯했다. 관객에게 생각할 틈을 주지 않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분노는 더 큰 분노를 낳는다



 분노가 지혜롭지 못한 방법이라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어떤 부정적인 순간이 찾아왔을 때, 분노하지 않을 자신이 있냐고 묻는다면 솔직하게 아니라고 대답하기 어렵다. 감정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제어되는 거였다면, 우리 삶에서 적어도 관계에서 일어나는 일들로 힘들어 하는 일은 적지 않았을까?

 

마침 가장 최근 읽은 책인『어떻게 분노를 다스릴 것인가?』(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 제임스 롬 엮음, 안규남 번역, 아날로그 출판사, 2021)에서 건설적인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분노는 감정 중에서도 가장 추악하기 때문에, 그런 감정이 들었음을 인지 했을 때는 곧바로 한 발 짝 물러서야 한다고 이야기 한다. 또한 벌을 정하는 판단이 객관적이고 타당할수록 징벌은 교정에 효과적이라고 한다.( p.35, 『어떻게 분노를 다스릴 것인가?』, 세네카, 아날로그 출판사, 2021) 앞의 문장으로 보아, 결과적으로 혜영의 행동은 효과적이지 못한 교정 방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왜냐면 딸은 그녀가 원하는 대로 바뀌지 않았고 죽음을 택했기 때문이다.

 

 

“믿음은 오만과 편견을 부르거든요. 사랑받는 사람은 행복할 거라는 착각.”

 

 

위 대사는 딸 유리가 잠시나마 위로 받았던 유일한 친구, 주예나의 말이다. 혜영이 사랑이라고 말했던 그 행동들. 어쩌면 그것은 분노를 사랑이라는 포장지에 싸서 이야기한 것은 아니었을까? 사랑은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 잠시 보거나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곱씹어도 사랑이라고 느껴져야 한다. 한 톨의 불순물이라도 들어간다면, 그것은 사랑이라고 이야기하기 어렵다. 왜냐면 본질이 흐려졌기 때문이다. 사랑을 이유로 자식을 옥죄고, 입맛에 맞게 바꾸려 드는 것은 자식을 위하는 일이 아닌 자신을 위해 내린 선택이니까. 혜영은 그릇된 믿음으로, 자신이 만든 커다란 착각의 세상에서 유리를 끊임없이 괴롭혔던 것이다.

 

나와 타인은 기본적으로 다르다. 그 다름이 가족 간에도 적용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다름을 존중하고, 어른으로써 더 나은 선택지를 제시해주며 그릇된 방향으로 갈 때는 따끔한 충고를 하는 것이 부모가 자식에게 혹은 인생을 먼저 산 선배가 후배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지 않을까?

 

지금까지 유독한 사랑이 초래한 최악의 결과를 이야기하는 영화, <독친>이었다.

 

 

 

윤화 전문필진.PNG

 

 

[강윤화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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