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차가운 차에서 나는 따뜻한 온도를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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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실 것 좀 드릴까요?”
취업을 위해 이 회사 저 회사를 방문할 때, 공통으로 듣는 말이다.
나는 최대한 건실한 사람의 웃음을 지으며 낯선 인사 담당자와 인사말을 나눈 후, 나만이 낯선 존재인 공간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간다.
긴장감으로 바싹 마른 입과 마음을 안고, 텅 빈 회의실에 앉았을 때 담당자는 말을 건다.
이때 건네주는 말은 조금씩 다른데, 크게 두 종류였다.
(1)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2) “커피나 차가 있는데 어떤 걸로 드시겠어요?”
(1)의 경우 별다른 물음 없이 뭔가를 가져다주신다. 냉수, 비타 500, 팩 주스 같은 것들. 몸과 마음이 최고의 컨디션이라면 무엇을 씹어 먹는 소화가 잘 되겠지만, 나는 내어 주신 것의 대부분을 잘 마시지 못했다.
한 번은 에어컨 바람이 가득한 공간에서 20분이라는 대기 시간 동안 몸이 오싹해진 적이 있다. 담당자분이 돌아오시면 따뜻한 물을 부탁드려야겠다고 생각하던 찰나에, 차가운 냉수가 한가득 담긴 종이컵이 내 앞에 도착했다.
면접이 시작된 후, 물이 스며든 종이컵은 흐물흐물해졌고, 그 흐물거리는 종이컵을 두 손으로 부여잡은 내 혀와 근육과 정신은 딱딱해졌다.
얼음만치 차가웠던 물이 미적지근하게 식어가는 것이 마치 나에 대한 이곳의 관심도 같았다. 지원자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상황인지,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이 지원자가 일을 바로 잘할 수 있을지, 자신의 회사는 이러한데 지원자가 여기에 맞출 수 있는지. 그것을 가장 궁금해했다.
처음엔 나의 피해망상일까, 싶었는데 반은 맞고 반은 틀린 것 같았다. 맞는 이유는 꼭 ‘나’에게 관심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이 조직의 기본적인 분위기와 매너가 그러한 경우 때문이고. 틀린 이유는 (1)과같이 대답해 준 회사의 대다수는 정말 커뮤니케이션하는 과정이 모두 미적지근했기 때문이다.
반면 (2)처럼 나의 선호를 묻는 조직은 공통적인 특징이 있었는데, 의례적인 인사말 외에 다른 말을 주고받았다는 것이다.
회사까지 오는 데 얼마나 걸렸는지, 오는 길에 날씨가 추웠는지 더웠는지 물어보고 답한다. 잠시 후 보게 될 면접은 몇 명이 보고, 어떤 사람들인지, 편안한 분위기이니 긴장하지 않아도 된다는 조언을 말해준다.
나의 선호, 상황을 알고 내어주신 차가운 물은 저번의 차가운 물과 달랐다. 뜨거운 열기를 가라앉혀 주고, 혀의 근육이 적당히 긴장감 있게 모여졌다.
얼음이 동동 띄워진 유리컵에 담긴 차 한 잔을 마주한 순간, 이 조직에 대한 기대감이 올라갔다.
실제로 (2)의 질문을 들은 회사에서는, 면접관들과의 대화도 비교적 긴 시간, 심도 있게 흘러간 경우가 많았다. 그들도 당연히 내가 일을 잘할 수 있는지 궁금해하지만, 그 답을 ‘나’라는 사람과의 대화를 통해 캐내고 이해하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이런 면접은 합격 불합격의 결과와 관계없이 나에게도 남는 게 있다. 나를 어떻게 더 잘 표현해야 할지, 지금의 회사가 사원에게 바라는 역량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를 알아보고자 했던 조직은 면접장을 벗어나 엘리베이터를 타기 전까지 배웅해 주었다. 이것이 서로 마지막 만남일지도 모르는데, 끝까지 웃음을 주고받으며 관계를 마무리한다.
나는 조직에도 ‘성숙함’의 차이가 있다는 걸 느끼게 되었다. 눈앞에 보이는 것에만 집중하고, 실리를 따지며 효율을 우선시하는 곳과 안 보이는 것을 보려고 노력하고, 숲을 바라보며 앞으로 나아가는 곳.
한 명의 개인도 성숙해진다는 건 참 어려운 일이니, 조직이 성숙하다는 건 더더욱 힘든 일일 것이다.
각기 다른 개개인이 모여있고, 커뮤니케이션의 방식도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하지만 그렇기에 성숙한 조직을 만났을 때 기대감이 솟구쳐 오른다. 어떤 조직 문화를 갖고 있기에 그것이 가능한 것인지. 그렇다면 내가 그런 조직에 속할 수 있을지.
그러면 나부터 누군가를 이해하고 깊이 들여다볼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이채원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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