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파괴와 이어 붙임의 미학 [사람]

파괴될 수 있기에 다시 이어 붙을 수 있다
글 입력 2023.09.24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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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진 것은 다시 이어 붙일 수 있는가? 다시 이어 붙인 것은 깨어지기 이전의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는가?


앞의 질문에는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며, 뒤의 질문에는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다.


물리적이지 않은 '깨어짐'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관계'다. 관계에는 실체가 없지만, 깨어지는 순간의 충격은 그 무엇보다 현실적이다.


깨어진 관계를 다시 붙이려 애쓴 적이 몇 번 있었으나,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여기에서 실패란 깨지기 이전의 관계로는 돌아갈 수 없었다는 뜻이며, 명백히 드러난 균열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깨졌다는 의미다.


깨진 부분을 이어 붙이면서 생겨난 균열은 평면적이기보단 입체적이었던 듯하여, 서로에게 다가갈 때마다 뾰족하게 날을 세워 서로를 찌르는 모양이었다. 다가가려고 노력할 때마다 생겨나는 생채기가 괴로워 결국 관계는 끝을 맺었다.


그래서 '다시 이어 붙인다'는 표현에 대한 나의 감상은 부정적이었다. 지극히 개인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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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의외로 흠 없는 것만큼이나 완전히 파괴되었다 다시 이어 붙인 것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니까요.

 

- 정세랑, [시선으로부터,]

 


하지만 얼마 전 읽은 정세랑 작가의 [시선으로부터,]에서 만난 위 문장이 머리를 울렸다. 간결한 문장을 몇 번을 거듭해서 읽으며, 왜 이 문장이 이토록 나의 마음을 빼앗았는지 고민했다.


이는 생각의 전환이었다. 깨어질 수 있는 것은 타인과의 관계뿐만이 아니다. 나, 개인으로서의 인간 역시 깨어질 수 있는 대상이다.


나라는 개체는 '복합체'에 가까워서, 겪어온 시간과 경험한 공간, 그리고 생각이 얼기설기 엉겨 붙어 있는 모양새다. 나도 나를 완벽하게 알 수 없는 까닭은 어떤 요소가 어디에 붙어서 어떤 모양을 만들었는지 하나하나 찾아내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어 있기에 '깨질' 수 있고, 완전히 '파괴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만큼 '다시 이어 붙일' 수 있다. 그 과정에서 무언가는 떨어져 나갈 것이고, 무언가는 새로 붙을 것이다. 그렇게 다시 이어 붙인 나는 그 이전의 나와 같을 수 없으나, 같지 않기에 새로운 가치를 지닌다.


흠이 없었던 과거를 계속해서 그리워하고, 드러난 균열에 지속해서 상처받는 타인과의 관계와는 다르다. 애초부터 균열투성이였던 나는 파괴되고 다시 붙는 과정을 반복하며 재구성된다. 굳이 '성장'이라는 거창한 말을 쓰지 않아도, 그렇게 비롯된 '변화'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타이틀전에서 떨어져 나간 사람은 말이지, 다들 한 번은 컨디션이 무너지는 법이야. 그건 그저, 당연한 일이지. "이대로는 안 된다"라는 것을 타이틀전을 벌이는 기간 동안 철저히 깨닫게 되기 때문이야. -그리고, 자신을 한 번 산산이 해체한 다음, 재건축을 시도하기 때문이지. 하나부터 다시.

 

- 우미노 치카, [3월의 라이온] 5권

 


소년 장기 기사의 이야기를 다룬 만화 [3월의 라이온]에서는 타이틀을 겨루는 경기에서 진 기사가 스스로를 재구성하는 과정을 위와 같이 표현한다. 이때 파괴의 주체는 외부가 아니라 나 자신이다.


그렇게 파괴하고, 파괴되고, 산산이 흩어졌다가 다시 이어 붙이며 살아가는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생명력'이다. 그에게서는 끊임없이 약동하는 생에 대한 의지가 보인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시 이어 붙인 것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이 아닐까. 살아있기에, 계속해서 살고자 발버둥을 치기에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유지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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