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키워드 인터뷰] 아름답고 답답한 유영 '유리 바다' - 이민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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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자신의 그림책에 어울리는 키워드를 선정하고, 해당 키워드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인터뷰입니다.
#동물권 #물성 #확장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동물권과 환경에 관한 사유를 주제로, 한국화 기반의 평면 회화 작업과 아티스트 북 작업을 하는 이민혜입니다.
자기소개에 키워드가 많네요. 우선 한국화는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여러 장르 중에서 한국화를 선택하신 이유가 있나요?
미술대학 진학을 목표로 하다가 학원 선생님의 추천으로 시작하게 되었는데, 결과적으로 개인 성향에 잘 맞는 분야를 선택한 것 같아요.
동양화는 자연을 대할 때 인간이 자연의 일부라는 태도를 가지고 있는 특징이 있어요. 일례로 전통 동양 산수화를 그릴 때는 산책을 하며 화첩에 드로잉을 하고, 집에 돌아와 그 드로잉들을 조합하여 자신만의 생각과 상상을 더해 새로운 풍경을 창조해요. 현대 동양화에서도 그 정신을 기반으로 작업합니다. 반면 서양화는 캔버스를 한 곳에 고정하고 보이는 대로 그린다는 점이 달라요.
재료 또한 자연물로 만들어져요. 조개로 만든 흰색 안료인 호분, 어류의 부레로 만들어진 아교, 닥으로 만든 종이가 있습니다. 그 재료들을 다루다보면 저도 자연의 일부가 된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재료를 다루는 방법은 매우 섬세하여 온도와 습도 변화에도 민감하고 손상되기 쉬운데요, 반면 깊이있는 표현이 가능합니다. 저는 성격이 무척 예민한 편이기 때문에 이런 재료들을 섬세하게 다루는 것에 만족감을 느껴요.
아티스트 북에는 어떻게 관심을 갖게 되셨나요?
시각디자인 전공도 같이 하면서 편집 디자인, 브랜딩, 패키지디자인 등 회화와는 또 다른 다양한 분야를 접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특히 편집 디자인이 잘 맞아서 책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양산형 책보다는 책의 형태를 가진 예술품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아티스트 북 ‘Aquarium’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회화 작업은 그림을 크게 보여줄 수 있지만, 아무래도 책은 사용자 입장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에 그림이 회화 작업보단 작고 원화를 인쇄로 구현해야 하는 어려움들이 있잖아요. 작가님의 경우 회화작업과 책 작업에서 어떤 장단점이 있다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가능한 장점만 바라보고 작업하려고 있어요. 같은 주제로 다양한 표현 방식을 통해 작업하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에요. 회화 분야의 관객층과 책을 보는 독자층은 달라서 회화 작업을 먼저 본 사람들이 책을 보러오기도 하고, 책을 먼저 본 사람들이 회화 작업을 보러오기도 하거든요.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도 하나만 하면 지겨울 때도 있어서, 여러 가지를 해야 능률이 오르더라고요. 회화와 책 말고도 다른 다양한 시도를 하고 싶어서 언젠가 조각이나 공예 분야도 도전하고 싶은 꿈을 갖고 있습니다.
KEYWORD 1. 동물권
동물권을 주제로 한 책이 그림책 분야에서도 많이 나오고 있어요.
저는 어릴 때부터 동물에 관심이 많았어요. 오랫동안 반려견을 키우기도 했고요. 그러다 보니 동물권에 대한 문제는 늘 인지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동물권에 대한 작가님만의 관점을 자세히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보통 동물권을 이야기할 때 친근한 강아지나 고양이, 멸종위기종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하잖아요. 언급되는 동물 종이 아주 제한돼있어요. 이렇게 사회에서 동물권이 이야기되는 방식이 판이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사람들이 잘 아는 동물은 더 잘 주목받을 수 있고 멸종위기종은 당연히 보호받아야 하기 때문에라도 자주 이야기되는 이유가 있긴 하더라고요. 하지만 저는 모든 생명이 동일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면, 더 소외되고 사소하게 여겨지는 대상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얼룩매가오리'라는, 아마 많은 사람에게 낯선 이름인 이 동물을 선택한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였군요. 작가님은 이 종을 어떻게 알게 되셨나요?
예전에 아쿠아리움에 방문하는 걸 좋아해서, 일본 여행 갔을 때도 어느 아쿠아리움에 방문했었어요. 거기에 엄청 큰 대형 수조가 있더라고요. 수조에는 메인 전시 동물인 고래상어가 있었고 그 주변을 장식품처럼 돌고 있는 생물이 바로 얼룩매가오리였어요. 얼룩매가오리는 상어에 비해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었어요. 그런데 저에겐 얼룩매가오리가 유영하는 모습이 아름다워 보였고, 집에 와서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유튜브에서 보는 얼룩매가오리는 제가 직접 본 얼룩매가오리와 아주 다르더라고요. 수조 속의 얼룩매가오리는 빙글빙글 돌거나 위아래로 돌기만 했거든요. 그런데 바닷속에 있는 얼룩매가오리는 전투기처럼 빠르게 수영하기도 하고 삼삼오오 모여서 직선 유영을 하기도 하는 등 아주 활동적이고 다양한 움직임을 보여주더라고요.
짐작하기에 아무래도 좁은 수조 속에 있으니 뻗어나갈 수 없고 그런 현상이 오래 지속되니까 같은 행동만 반복하게 되었을 것 같은데 맞나요?
네, 그걸 정형행동이라고 해요. 인공적인 환경이 만들어 낸 이상 현상이죠.
책 마지막 장면, ‘참 아름답지 않습니까?’라는 부분에서 무언가 마음에 ‘쿵' 와닿는 걸 느꼈어요. 동물에게 잔인한 현실을 만들어놓고 끝내 아름다움을 포기하지 못하는 인간이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이해가 되었거든요. 작가님께서 처음엔 그 움직임이 아름다워 보였다고 하셨는데, 정형행동을 보이는 이유를 알게 된 뒤에도 아름다워 보이셨나요?
얼룩매가오리의 정형 행동은 인공적인 공간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역설적으로 아쿠아리움 속에서 보는 그 움직임은 분명 아름다워요. 시각적인 측면에서요. 그래서 이 감정은 자연스러운 것인가 아니면 잘못된 것인지에 관해서도 질문을 던지고 싶었어요. 아름다움을 느끼는 감정이 커서 애써 안타까움의 감정을 덮어두려는 것은 아닐까, 과연 이 감정들을 그대로 두어도 괜찮은지, 혹은 반대로 그 아름다움만을 보려는 사람들도 있을 테고요.
동물권에 관해 얘기하곤 있지만, 예술가와 사회운동가의 차이는 이런 부분이 아닐까 해요. 작가의 관점은 있지만 그걸 주장하기보다 질문의 형식으로 남기고 책을 통해 소통하는 방식이요.
KEYWORD 2. 물성
책의 물성은 작가님의 작업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나요?
독자가 글과 그림으로 스토리를 파악하는 게 일반적인 독서 방식이에요. 그 이유는 양산형으로 만들어진 책은 내용 중심으로 보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이거든요. 그런데 작가가 직접 내용에 따른 책 구조를 기획하고 제작하는 이런 아티스트 북은 책의 물질적인 구조와 형태, 즉 물성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요. 그렇기 때문에 독자의 읽기 방식에 변화가 생겨요. 여러 요소를 총체적으로 고려해서 책을 보는 단계에 이르는 거죠. 독자가 그런 ‘경험’을 할 수 있는 책을 만들고 싶었어요.
‘유리 바다'도 그런 면을 고려하여 만드신 거군요.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이 있는지 설명 부탁드려요.
이 책은 크게 케이스와 내지로 구성돼 있어요. 케이스는 유광 유리 같은 수조 느낌이 나도록 아크릴로 만들었고요. 이 비율은 일본 추라우미 아쿠아리움과 제주도에 있는 아쿠아플라넷에 있는 수조의 비율인 1:2.7을 따른 거예요. 내지는 수조 안에 있는 물 느낌을 은유할 수 있도록 만들었어요. 아주 얇은 종이로 만들어서 내지만 만지면 잘 말리거나 구부러지고, 부드럽죠.
책을 보면 다음 페이지가 비쳐서 겹친 면을 보면 가오리가 움직이는 것 같아 보여요.
그래서 가오리의 움직임이 자연스럽게 이어져 보이도록 기획한 부분도 있어요. 독자가 책장을 넘길 때 더 깊은 물에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주고 싶었어요.
‘유리 바다'를 만들기 전에 ‘Aquarium’ 한정 에디션 아티스트 북을 먼저 제작하셨잖아요, 그때는 아코디언 구조로 만드셨는데 이번에는 코덱스 구조로 바꾸신 이유가 있나요?
처음 ‘Aquarium’을 만들 때 가오리의 유연한 움직임이 펼쳐지는 모양이 아코디언 형식에 잘 맞겠다는 의견들이 있어서 그렇게 만들었어요. 하지만 이번에는 수조의 물질적인 형태와 소재를 책에도 그대로 반영하고 싶다는 생각이 컸고, 글도 새로 넣게 되어서 형식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아코디언 책 구조에서는 얼룩매가오리가 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느낌이었다면, ‘유리 바다' 책에서는 좁은 공간, 제자리에서 도는 움직임을 표현할 수 있었어요.
‘유리 바다' 책에 글을 넣게 되신 이유도 궁금해요.
전작 ‘Aquarium’을 보고 저의 친한 지인이 어느 날 글을 써서 보여주었어요. 새벽에 자다가 깨서 카톡으로 온 글을 보았는데, 머릿속에서 몽롱하게 얼룩매가오리들이 헤엄치는 장면이 그려졌습니다. 제 작업을 통해 타인이 새롭게 해석하고 또 그로부터 새로운 장면을 떠올릴 수 있다는 것은 저에게 창조적인 경험이었어요. 독자들도 다양한 표현 방식을 통해 다채롭게 느낄 수 있기를 기대하며 협업하게 되었습니다.
글 배치도 흥미로워요.
글이 글처럼 보이지 않고 이미지처럼 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가오리가 꿈을 꾸는 장면에서는 유연한 느낌이 들도록 글도 둥글게 놓고, 일반적인 해설이나 스토리가 전개되는 부분에서는 사각형 모양으로 놓았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페이지에는 글이 거꾸로 놓여 있어서 독자가 읽기 불편한 상황이 돼요. 가오리가 원하지 않는 상황에 억지로 놓인 것처럼 사람들도 간접적으로나마 불편한 경험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이런 배치를 하게 되었습니다.
글이 얼룩매가오리의 시점인 것도 새로웠거든요. 이러한 시점으로 글을 쓰게 되신 이유가 궁금해요.
글 작가님께서 제 그림을 처음 보고 떠오른 단편적 이야기를 좀 더 길게 풀어냈다고 하셨어요. 얼룩매가오리 그림을 보며 아쿠아리움의 관객의 입장이 아닌 마치 글 작가님 자신이 그들의 무리와 동떨어저 물속에서 지켜보는 기분이 들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그림에 담긴 의미가 슬펐기 때문에 인간보다 얼룩매가오리에 조금 더 이입하게 되었던 게 아닌가 싶어요.
KEYWORD 3. 확장
세 번쨰 키워드는 장르의 확장을 뜻하는 건가요?
저는 기본적으로는 회화 작업을 하는 사람이지만, 갤러리에만 존재하는 작품을 만들고 싶진 않았어요. 갤러리는 보수적인 공간이고 그곳을 찾는 사람들은 한정적이거든요. 저는 좀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싶었고 제 작업을 보여주고 소통하고 싶었어요. 그 방법이 바로 아티스트 북 제작이었어요.
두 개 다 경험해 본 지금은 어떤 어려움이나 만족감이 있으셨는지 궁금합니다.
우선 회화와 책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물질적인 형태라고 생각해요. 회화는 한눈에 시원하게 볼 수 있는 평면 작업이지만, 책은 여러 페이지를 넘겨서 보는 작업이잖아요. 평면 작업은 의미가 단순해도 괜찮았어요. 그런데 책은 회화보다는 더 구체적으로 보여줘야 할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어요.
가령 그림책에 기본적으로 기승전결 구조가 있잖아요. 책의 형태를 띠려면 스토리를 넣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한편으론 ‘스토리를 넣는 게 그렇게까지 중요한가? 내 개인적인 생각만 담아도 되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거든요. 그래서 이 작업을 하면서 작가가 만족하는 지점과 사람들이 보고자 하는 바를 표현해주는 그 중간 지점을 어떻게 찾아가야 하는지 배울 수 있었어요.
스토리 흐름이나 결론이 명쾌하지 않은 그림책도 많이 있죠. 그런데, 그런 책은 작가가 다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혹은 감추었기 때문에 더 채우려는 독자들도 있어요. ‘생각보다’ 그림책은 자유롭다는 점이 중요한 것 같아요. 사람들 사이에서 알게 모르게 그림책 장르에 대한 편견이 무의식적으로 있다는 건 기존 매체가 갖는 형태 때문에 자연스러운거라고 생각하는데, 편견에 작가가 얽매이지 않고 작가 자신 있게 보여줘도 된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다음을 알 수 있을 테니까요.
그다음이 진정한 확장일지도 모르겠네요. 작업해보니 아티스트 북은 기성 그림책과는 문법이 조금 다르게 흘러가는 부분도 있다는 걸 알아가고 있어요. 양산형 그림책의 물질적인 구조는 쉽게 바꿀 수 없잖아요? 그러니 작가가 건드릴 수 있는 부분이 글과 그림뿐인 반면 아티스트 북은 훨씬 많은 부분이 열려있죠. 책의 크기, 구조, 종이 재질, 바인딩 방식 등등에서 작가가 목소리를 내고 싶은 부분을 기획할 수 있는 자유도가 굉장히 높아요. 역설적으로 그런 부분이 힘들고 어렵기도 하지만, 제가 이 방법을 택한 이유이기도 할 테니, 앞으로도 즐거운 마음으로 작업에 임하려고 합니다.
이 책에서 가장 좋아하는 한 장면과 이유는 무엇인가요?
딱 한 장면을 고르기보다는, ‘플립 북을 넘겨보듯이 넘기는 경험’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책을 좌르륵 넘기면 얼룩매가오리가 빙글빙글 돌며 움직입니다. 그 것은 책의 핵심 내용이기도 하고, 앞서 이야기했듯 아티스트 북이라는 매체를 통해 느낄 수 있는 새로운 경험이기도해서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민혜 작가
그림책 재료로 어떤 걸 사용하시나요?
장지, 아교, 연필(4H, HB, 2B, 6B)을 사용합니다.
주로 작업 아이디어는 어디서 얻나요?
저는 작업 아이디어를 외부가 아닌 과거에 그려온 드로잉에서 많이 찾습니다. 20대의 저는 지금보다 훨씬 예민한 감수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지금도 미래의 저를 위해 드로잉들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작업을 하며 좋은 점과 나쁜 점은 무엇인가요?
의미 있는 창조를 한다는 행위는 제 인생에서 정말 중요하기 때문에 작업을 지속 하고 있어요. 이것 자체는 장점이지만, 동시에 경제적으로 어려워질 수 있다는 건 나쁜 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앞으로 어떤 작업을 하는 작가가 되고 싶은가요?
저는 기본적으로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습니다. 앞으로도 여러 가지 사회 문제를 예민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사회에 작게나마 긍정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작가 되고 싶습니다.
좋아하는 그림책 한 권 추천해 주세요.
'せんはうたう(詩 : 谷川俊太郎, 絵 : 望月 通陽)'를 추천드려요. 도쿄 여행을 갔다가 중고 서점에서 우연히 발견한 책입니다. 노래에 관련된 시와 드로잉들이 배치되어 있고, 책 표지, 제본 방법 등이 모두 아름다운 형태로 되어 있는 책이라서 추천합니다.
작가님의 다음 작업은 어떤 그림책이 될까요?
참새의 동물권에 관한 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올해 열리는 아트북페어 ‘언리미티드 에디션15’에서 선보일 예정이라 열심히 준비 중입니다.
나에게 그림책이란?
나만의 방식으로 하는 사회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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