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느리지만 값지게 흐르는 시간들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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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세기를 소급해 보면 우리의 삶터는 줄곧 경작지였고, 우리의 살림은 경작이 책임져왔다.
농경이 없었다면 지금 인류는 부재할지 모른다. 그러나 씨앗과 그 씨앗을 돌봐온 농부들의 노동과 시간의 가치는 점차 절하되고 있다. 성과와 효율이 곧 덕목이 된 사회 풍조로 인해 번거로운 수작업 대신 컨베이어 벨트의 기술력이 자리를 꿰차면서.
다큐멘터리 영화 <씨앗의 시간>은 그러한 사회의 속도에 역행하는 세 번의 수고스러움이 지닌 쓸모에 대해 웅변한다.
자연의 순환을 섬세하게 바라보는 영화의 시선은 곧 토양과 가장 근거리에 있다고도 할 수 있는 농부들의 일상으로 시작한다.
땅을 향해 굽은 그들의 등허리는 지나간 세월과 노화를 짐작시키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들 역시 자연의 한 구성원임을 입증하는 듯하다.
스크린에 먼저 등장하는 윤균상, 장귀덕 농부는 정성의 가치를 신뢰하는 이들이다. 종자회사에서 씨앗을 대량생산하고 토종보다는 신종과 유전자 조작에 주목하는 추이지만, 이들은 정직한 땀과 살뜰한 노력을 들여 손수 작물을 심고 다듬고 그로부터 다시 씨앗을 거두는 수고를 지속해오고 있다. 그 목록에는 멸종 위기에 놓인 것들도 수두룩하다.
여기서 주지할 만한 건, 그 모든 작업이 단순 육체적 노고로만 국한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윤균상, 장귀덕을 필두로 한 다양한 농민들은 말과 행동으로 농사의 의미를 소명한다.
그들에게 농사는 톱니바퀴에서 벗어난 자유노동이며, 부모 세대로부터 그리고 그 이전의 조상들로부터 전승되어 온 당연한 삶의 일부이자 양식이다.
그 행적은 그들이 품을 들여 관리해온 씨앗에 담긴 시간과 닮아 있다.
한편, 또 다른 축으로서 두 농부가 보유한 재래종을 수집해 그 가치를 길어올리는 연구원들도 있다.
텃밭과 집 앞 마당에서 채집한 씨앗들을 재배하고 관찰하며 그들은 실상 미련한 고집일 수도 있을 농부들이 쏟은 땀과 노력의 가치를 객관적 수치와 분석을 토대로 젊은 농부들과 관객들에게 전달한다. 다큐멘터리의 종반에 이르러 거둔 씨앗들을 사회에 환원하는 그들의 행보는 극 중 또 다른 순환을 도맡는다.
이외에도 부러 수고를 자처하는 이들이 있다. 바로 작품의 감독과 연출진들. 그들은 1년을 4계절로, 그리고 이를 또 24절기로 쪼개 챕터를 구성한다. 그 덕에 러닝타임은 대폭 늘어났지만 년 단위, 계절 단위로 구획한 것보다 '순환'의 감각은 더 선명해졌다.
자연의 순환에 이바지하는 농부들 그리고 이를 시민사회에 순환시키는 연구진들을 담는 렌즈 뒤에는 그 모든 망실된 시간과 존재들을 찬찬히 조망해 스크린 밖으로까지 순환시키고자 하는 감독의 의지가 있다.
그들의 시간은 느리지만 값지게 흐른다.
[김민서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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