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작은 균열과 큰 물음 [도서/문학]

글 입력 2023.08.11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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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느리가 남자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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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각본》, 김지혜, 창비, 2023.

 

 

말에는 힘이 있다. 익숙한 격언이다. 무언가를 발화하는 것만으로 모종의 실행이 이루어진다는 것, 평소엔 쉽게 의식하지 않지만 곱씹으면 꽤 섬짓할 정도의 강력함이다.

 

정확히 짚자면, 말에는 '이중적인' 힘이 실려있다. 어떻게 이중적인가? 첫 번째로는 의미 공유를 비롯한 말의 복합적인 기능을 성립할 수 있게 하는 사회적 배경이 있고, 그 다음으로는 구체화되지 않았다면 어렴풋한 관념으로 남았을 사회적 맥락들을 뚜렷하게 인지하게 하는 언어의 존재감이 있다. 다시 말해 언어는 그 자체로 사회의 반영물임과 동시에, 자기실현적으로 사고의 흐름을 유도하며 사람들의 사고를 형성해 나간다.

 

그래서일까? '가족 각본'의 모든 논의는 차별금지법 반대 시위에서 줄곧 제창되어 왔던 "며느리가 남자라니!"라는 짧은 구호 하나에서 출발한다. 어떻게 며느리가 남자일 수 있느냐는 말. 언뜻 보면 아주 간단하게 핵심 쟁점이 도출되는 것 같기도 하다. 바로 성소수자 이슈다. 남자의 짝이 남자일 수 있느냐는 개탄. 이 구호를 필두로 차별 금지법 제정을 반대하는 입장의 주된 의견 역시 이 법안이 '동성애 허용 법안'이기 때문이라는 식이다.

 

하지만 전통적 가족관이나 (눈치 채지 못하도록 교묘하고)공고한 현대의 성역할을 파헤칠 것이라는 예상과 함께 책장을 폈는데, 성소수자 이슈로 논의를 시작하는 것이 조금 의아스럽기도 하다. 왜 저자는 이 짧은 문장 하나를 '가족'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았을까. 이 이슈가 곧 가족 논의의 토대가 될 수 있던 이유는 무엇일까.

 

 

 

'가족'을 돌아보다



저 문구가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건 2000년대 후반에서 2010년대 초반 즈음이다. 십수 년이 지난 지금, 터부시 되던 성소수자 논의는 비교적 활발해졌고 공적인 자리에서 차별적 발언을 자신있게 내놓는 것은 자신에게 도덕적 잣대를 마음껏 들이밀어달라는 것이나 다름없다. 누군가의 존재 자체를 반대의 대상으로 삼아도 되는 것인가라는 물음에 사람들은 쉽게 그렇다는 답변을 내놓지 못한다. 하지만 여전히 저 구호가 유효하게 사용되는 것을 보면, 막상 그 존재를 공인하고 법의 테두리 안으로 끌어들이는 일에는 여전히 선명한 거부감을 드러내는 모순이 남아있다.

 

생각해보자. 사실 누군가를 만나고 그와 결합하는 일은 매우 개인적인 일이다. 누가 누구를 만난들, 엄밀히 따져보자면 일단 '나'의 삶에는 큰 영향이 없다. 그런데 왜 저런 모순적인 거부감과 두려움이 나타날까. 일단 그 두려움은, 누군가의 존재가 갖는 위험성(그들이 생각하기에)이 정확히 '나'를 겨냥한다기보다는, 나를 둘러싼 크고 작은 '세계'를 무너뜨릴 것이라는 생각에서 비롯하는 듯하다.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고, 국가가 무너지고..., 사람들의 논리는 결국 건전하고 탄탄했던 '체제'가 무너질 것이라는 예상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왜 '개인'의 사랑과 결합이, 이 부드럽고 개별적인 사실이 '사회'를 혼란시킬 잠재적 위험 인자로 여겨지는 것일까? 이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선 서두의 구호를 좀 더 뜯어볼 필요가 있다. 상술했듯, 말에는 힘이 있다. 짧은 구호 속에는 그를 오랜 시간 반복해서 외칠 만큼 강한 의도가 담겨 있고, 또 이 반복이 충분히 호소력을 가질 것이라 예상할 만큼 숱한 사회적 합의들이 함축되어 있다. 단순히 표면적인 논쟁에 대한 극적인 표현 정도로 훑고 지나가기엔 꽤 심오한 구석이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남자가 며느리일 수 있냐는 말에는 사실 다음과 같은 여러 전제들이 숨어있다.

 

결혼은 출산으로 이어져야 하고, 그렇게 만들어진 가족은 나아가 국가를 이루는 단위가 되어 우리 모두의 발전에 이바지해야 하고, 아이에게는 돌봄을 제공하는 여성인 엄마와 경제적 지원을 제공하는 남성인 아빠가 필요하고, 현재의 가족 제도는 당연히 유지되어야 하는 것이고..., 우리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촘촘한 논리가 모두 동성 혼인에 대한 반대 이유가 되고 있다. 그리고 저자는 이 모든 이유를 아우르는 거대한 키워드로서의 '가족'을 발견해낸다.

 

  
우리는 왜 '당연히' 결혼과 출산을 하나로 여기며 결혼 밖에서 태어난 사람을 '어쩔 수 없이' 차별하는가. 우리의 인생은 왜 '당연히' 어떤 부모를 만나느냐에 따라 결정되며, 양육자가 부와 모가 아닌 가족은 왜 '어쩔 수 없이' 불행한가. 왜 성별이 같은 사람은 가족을 이룰 수 없으며, 도대체 왜 며느리는 여자여야 하는가. (...) 그리하여 지키고자 하는 가족은 무엇인지 질문해보면 어떨까.
 

본문 12p. 중에서
 

 

그렇게 저자는 총 7장의 구성을 통해 각각의 물음을 꼼꼼히 검토하고 그에 대한 나름의 답변을 내놓는다. 결혼과 출산을 동일시하는 논리는 무엇을, 누구를 위한 것인가. 바람직하지 않은 출생을 결정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아이에게 엄마와 아빠가 필요하다는 말에 숨은 고정관념은 무엇이며, 그런 관념을 통해서라도 달성하고자 했던 아이의 안녕에 궁극적으로 필요한 것은 과연 무엇인가. 현재의 가족 질서 유지는 누구를 위한 것이며 그런 유지를 위해 우리 사회가 이용해온 방식은 무엇인가.

 

책과 함께 저자의 추적을 따라가다보면, 사례로, 판례로, 오랜 믿음들을 하나하나 반박해 나가다 보면, 성소수자 이슈가 만든 균열에서 시작된 질문들이 사실은 우리 사회 전체의 오랜 지반을 뒤흔드는 물음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그리곤 결국 이러한 결론에 도달한다. 모든 식구를 먹여살릴 수 있는 수입의 아빠와, 살뜰하게 모든 구성원을 돌보는 엄마, 그 밑에서 자라나며 사회의 자원이 될 아이와 같은 이상적인 가족의 모습은 이루기 힘든 환상일지도 모른다고. 자연의 이치처럼 여겨졌던 가족 제도는 어쩌면 하나의 '각본'처럼 인위적으로 구성된 것이었으며, 지금의 문제는 결국 우리의 존재를 그 억지스런 각본 안에 욱여넣느라 생겨난 것일지도 모른다고.

 

저조한 혼인률과 출생률, 경제적 불평등과 계층의 세습, 여러 사회 집단간의 갈등, 고립과 단절..., 온통 삐걱거리며 한계를 맞은 듯한 지금의 사회. 무언가 뚜렷한 방책은 보이지 않고 앞으로의 나날은 막막하기만 하다. 무언가 돌파구가 필요한 시점에, 저자는 공기처럼 당연해서 되돌아볼 수 없던 우리의 세계를 이제는 뜯어볼 때가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우리가 되돌아봐야 할 것은 과연 무엇일까. 어쩌면 문제가 되는 건 '정상적이지 못한' 우리 개개인이 아니라, 수많은 우리를 문제적 존재로 만들어 버리는 무언가였던 것은 아닐까?

  

이제, 논쟁의 불씨가 어느 곳을 향해야 할지는 분명해 보이는 듯하다.

 

 

[황수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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