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문제에 대해서 말할 용기에 관하여 - 여전히 미쳐 있는 [도서]

글 입력 2023.08.08 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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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꺼운 책 속에 아는 이름들이 여럿 등장한다는 사실은 꽤나 큰 위안이 된다. '여전히 미쳐 있는'을 받아들고 별 어려움 없이 독서를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친숙한 이름들이 목차에서 이미 많이 보였기 때문이다. 이 책은 60년대부터 시작된 여성주의 운동이 어떻게 발전 및 확산되어 왔고, 현재는 어떠한 형태를 취하고 있는지를 탐구한다.

 

페미니스트라는 표현이 우리나라에서는 혐오 및 분열의 씨앗으로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많다. 불필요한 충돌을 최대한 피하기 위해 나도 여간해서는 페미니즘과 관련된 대화는 시작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원래 페미니즘이란 차별에 대항하는 움직임이지 남성을 배척하려는 운동이 아님을 감안해 보면, -이즘으로 인해 촉발되는 부딪힘과 긴장감이 얼마나 소모적인 것인지 깨닫게 된다. 성 갈등에서 피로감을 느끼기가 쉬운 만큼, 이런 류의 책을 읽을 때는 최대한 가볍고 긍정적으로 접근을 하려고 마음의 준비를 한다. 그런데 어쩐지 이 책은 생각보다 읽기가 편했다.

 

특히나 재밌게 읽은 부분은 60년대의 이야기, '뉴욕에서의 섹스: 글로리아 스타이넘 대 헬렌 걸리 브라운'이었다.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자신의 출중한 외모 덕에 여성의 성 상품화 산업 한가운데로 직접 들어가 자신이 겪은 일들을 토대로 플레이보이 클럽의 민낯을 취재하고 비판했다. 그녀는 자율적인 여성상을 지향하며, 시몬 드 보부아르의 말처럼 "여성의 역할은 육체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학습되는 것이 더 많다"고 주장했다. 이 말은 달리 해석하면 여성이 가지는 성 역할은 불가항력적인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선택의 영역에도 있다는 것으로 들린다. 물론 그 선택에 사회적 문화적 압박도 있음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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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파격적이고 급진적인 것은 걸리 브라운이었는데, 그녀에 대한 묘사들을 읽으며 '섹스 앤 더 시티'라는 오래된 미국 드라마가 떠올랐다. 대학생 시절 여러 번 정주행한 나에게도 적지 않은 임팩트를 남긴 이 드라마는 분명 걸리 브라운의 영향을 받았음에 틀림없다. 그녀의 저서 'Sex and the Single Girl(1962)'에서 작가는 성적인 욕구에 솔직할 것과, 결혼 전 쾌락과 커리어 두 가지 모두 충분히 성취하라고 여자들에게 조언한다.

 

한편, 그녀는 여자들이 자신이 가진 여성성을 십분 활용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도록 다이어트 프로그램을 판매하기도 했다고 한다. 즉, 스타이넘과는 상반되게 여자의 성 상품화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무기로 쓰는 방법을 알려주려고 시도한 것이다. 이 방법은 미국 사회에서 더 많은 환영을 받은 것 같다. 그러니 섹스 앤 더 시티와 같은 드라마가 폭발적인 사랑을 받은 것 아닐까? 드라마 속 네 명의 주인공들은 조금씩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모두 사랑과 일에 있어 열정적이라는 점을 공유한다. 

 

책에서 걸리 브라운에 대해 설명한 대목처럼, '그녀의 싱글 걸들은 새침데기도, 품행이 단정치 못한 여자도, 헤픈 여자도, 독신 여성도 아니다. (중략) 이들은 일과 연애를 동시에 즐기면서 가난한 위치에서 부유한 위치로 올라가 성공하겠다는 야심에 차 있는 여성들이다.' 이렇게 살고 있는 남성들은 당연하게 받아들이면서 여성들에 대해서는 구구절절한 설명이 필요하다는 것 자체가 우리가 얼마나 성차별적인 사회에 살고 있는지를 똑똑하게 보여준다.

 

이렇듯 폭발하는 60년대를 지나, 미술사에서 70년대는 캘리포니아 여성주의 운동 작가들이 활발하게 본인들을 드러내기 시작한 중요한 시기이다. 주디 시카고, 미리암 샤피로가 함께 시작한 우먼하우스를 비롯해, 조지아 오키프, 루이스 부르주아 등의 작품 활동이 꽃을 피웠다. 여기에 최근 한국에서 대규모 개인전이 열린 하이디 부허와 같은 작가의 예술 세계도 빼놓을 수 없다. 이들은 모두 각자만의 방식으로 -공격적이고, 우아하고, 때론 저속하고, 또 조용하게- 여성으로서의 목소리를 냈다.

 

70-80년대에 들어오면서 토니 모리슨의 작품에 대한 언급이 여러 번 등장한다. 그녀의 작품에서는 성 갈등과 함께 인종적인 요소도 섞이게 되는데,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그녀는 흑인 사회에 공공연했던, 그리고 특히 여성에게 치명적이었던 근친상간을 이야기 속에 자연스럽게 녹여낸다. '가장 푸른 눈' 뿐만 아니라 소설 '솔로몬의 노래'에서도 이것은 스토리의 핵심적인 요소 중 하나이다. 남성에 속박되어 살 수밖에 없는 여성들의 이야기라는 것, 그리고 가부장 제도에서 벗어나 우악스럽지만 씩씩하게 살아가는 여자들의 삶을 다룬다는 점에서 이 작품들이 페미니즘 소설이라는 게 이제는 나에게도 분명하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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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로 넘어와서 이 책은 더 친근한 이름들을 내놓는다. 비욘세, 마야 안젤루, 미셸 오바마에 이르기까지 페미니즘을 주창하는 강력한 여성들의 목소리는 조용히 있던 많은 여성들에게 힘을 불어넣는다. 그러나 이미 유명하고 엄청난 영향력을 가진 이러한 여성들의 목소리는 남녀를 불문하고 모두에게 감동을 주는 것이 당연하다. 따라서 그 메세지 자체의 영향력이나 임팩트보다는 그들의 유명세에 의해 이슈화되었다가 금방 식어버릴 가능성도 농후하다는 것이 맹점이다.

 

동시대의 의미 있는 페미니즘 운동들은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2015년에 있었던 매트리스 퍼포먼스나, Yes means yes와 같은 캠페인(책 제목이기도 하다)에서 그 진가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와 비슷한 일반인들의 이야기, 지금까지 문제가 생겨도 문제 삼지 않고 어물쩍 넘어갔던 여성의 언어들과 남녀 간의 소통 방식의 차이 등이 큰 상처로 이어질 수 있음을 똑똑히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기존의 신념 체계에 제동을 걸며 변화가 필요함을 모두에게 촉구한다.

 

페미니즘은 여전히 진행 중인 싸움이다. 싸움은 불가피하게 소음과 상처를 내고, 많은 이들을 불편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많은 경우 우리는 싸우면서 배우고, 다치면서 성장한다. 지난 50여 년간 여성들의 지위 변화를 생각해 보면 이는 분명 가치 있는 투쟁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계속해서 귀를 열고, 필요할 때 분노하고, 문제 삼고, 말을 할 용기를 발휘하면서 이 여정을 이어나가야 할 것이다.

 

 

[강수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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