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정말 중요한 건 생각하는 마음 - 영화 '비밀의 언덕'

투명하게 부끄러워하고 슬퍼하고 질투하던 시절
글 입력 2023.07.14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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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영화를 보고 싶었던 건 소개 글에서 어쩐지 영화 ‘벌새’가 떠올라서였다. 자전적이고 솔직하면서 지나간 감정을 생생히 담는 영화처럼 보였다. 벌새와 주인공의 나이도, 배경도 다르지만,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이입하게 했다. 생동감 넘치고 마음을 전혀 숨기지 못하는 명은의 이야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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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과 부끄러움



성인이 되고서도 여전히 내가 어리게 느껴지지만 그래도 예전보다는 감정을 잘 숨기게 되었다. 기쁨도 아쉬움도 적당히 드러낸다. 질투나 수치심 같은 나를 무너뜨리는 면들은 더더욱 아무렇지 않은 척 넘어가게 되었다. 가끔 누군가에게서 이런 표정이 보일 때면 고개를 돌린다. 서로 불편하니까 그냥 모르는 체하는 것이다.


그런데 초등학생 때의 우리는 조금 더 솔직해서 이런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명은이가, 5학년 7반 친구들이 그랬다. 그래서 더 투명했고 또 한편으로는 잔인했다. 미워하는 마음, 의심하는 표정도 그대로 드러났으니까. 어린 나이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한편으로는 그 시대가 더 잔인하여지도록 만들었을 수도 있다. 명은이의 초등학교 시절은, 가정조사를 명목으로 아이들 부모님의 직업을 공개적으로 묻고 또 거수해서 세곤 했던 시대니까.


명은은 아버지의 직업을 묻는 선생님께 젓갈 가게를 한다고 차마 말을 하지 못하고 ‘종이 만드는 회사의 회사원’이라고 말한다. 같이 젓갈 가게를 운영하시는 엄마의 직업은 ‘아주 평범한 가정주부’이다. 명은이가 보기에 부모님은 억척스럽고 교양도 없고 또 너무 가난하다.


반장보다 반장 엄마가 더 바쁘다며 절대 그런 거 하지 말고 무르라는 엄마의 말에, 명은이는 알았다고 화를 낸다. 돈 벌기 바빠서 학교에 충분히 신경 써주지 못하는 엄마가 원망스럽다. 반장이 되었지만, 햄버거를 턱턱 쏘는 다른 아이들에 비해 명은의 부모님이 반에 나눠 준 건 인당 바나나 두 개. 바나나는 먹기 싫다고 안 받는다는 아이들의 말과 교실 한편에서 갈변되어 가는 바나나의 모습에 괜히 마음이 쓰리다.


자신이 드린 선물보다 부잣집 남자애가 드린 선물을 더 애지중지하시는 것 같은 선생님으로부터 상처받는다. 명은이에게 가난과 부모님의 직업은 수치스러운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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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과 솔직함



젓갈 가게를 하는 부모님의 직업을 숨기고 종이 만드는 회사에 다닌다는 거짓말을 유지하기 위해서, 명은이는 근처 종이 회사에 무작정 찾아가 남자 직원분께 인터뷰를 요청한다. 무슨 일을 하는지, 가장 보람찰 때가 언제인지 질문을 하고서는 마지막에 인증사진을 찍는다. 친구 집에 놀러 가 친구 어머니와 다정하게 사진을 찍고는, 그 사진들로 앨범을 만들어 가상의 가족을 꾸며낸다. 거짓말은 또 다른 거짓말을 낳는다.


그러던 중 이란성 쌍둥이 자매가 전학을 온다. 다들 도시락을 싸 오는 점심시간, 둘은 운동장 스탠드에서 자기네끼리 컵라면을 신나게 먹는다. 어쩐지 평범하지 않다. 그리고 글을 참 잘 썼다. 물어보니 한 시간이면 금방 쓴다고 했다. 몇 날 며칠 동안 책을 뒤지고 자료 조사를 해서 글을 써내는 명은이와는 대비되는 적은 노력. 둘은 그냥 솔직하게 쓰면 좋아하더라고 쿨하게 이야기한다. 아빠가 안 계신 것도, 아가씨 골목에서 일하는 엄마의 직업도 어느 것 하나 숨기지 않는다.


자매의 말에 용기를 얻어 명은은 거짓말로 글을 쓰지 않기로 한다. 가정의 달, 가족에 관한 글짓기 대회에서 명은이는 가족이 밉고 가끔 부끄러운 솔직한 마음을 쓴다. 아빠는 게으르고 엄마는 독재자에 항상 모자와 장화를 신는다. 일하느라 옷은 항상 더럽다. 집을 나와서 삼촌, 할아버지랑 산다는 이야기들. 그리고 그 상은 최우수상을 받지만 이 글이 오히려 가족들에게 상처가 될까 걱정되는 마음 반, 또 그간의 거짓말이 들킬까 하는 마음 반으로 상을 받지 않고 냈던 원고도 돌려받겠다고 우긴다. 결국 명은이는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무르고 되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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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과 진짜



명은이는 깨달은 것이 있다. 명은이가 자랑스럽게 여기도록 막노동하면서 학교에 데리러 올 때는 양복을 입고 와 회사원인 척해주는 삼촌도, 아기자기한 도시락을 싸줘서 으스대게 해주는 할아버지도 사실은 억척스러운 엄마의 경제적 지원으로 살아가고 있었음을. 왜 최우수상이 아니라 우수상밖에 받지 못했냐며 괜히 독촉하는 엄마·아빠가 사실은 명은이의 수상 소식을 스크랩할 정도로 자랑스러워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엄마한테는 속 깊은 척하던 오빠가 친구에게는 힘들다고 하소연하는 모순적인 면이 있음을 느낀다.


삶은 모순으로 가득했다. 한쪽 면만 일방적으로 가진 것은 없었다. 마냥 좋은 것도 마냥 나쁜 것도 아니었고, 내가 하찮게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아주 소중한 것이었음을 느낀다. 정말 중요한 건 상도, 예쁜 옷도 아니라 생각하는 마음이었음을 배운다. 명은이는 이렇게 한층 성장한다.


밥 먹는 장면이 유독 많이 나오고 또 수저 부딪히는 소리나 반찬 집는 소리, 씹고 삼키는 소리가 생생하게 녹음되었다. 가족끼리 꽃게찜을 먹을 때나 상 받은 명은 이를 축하하기 위해 고기를 구워 먹는 장면. 아빠가 싸주는 젓갈 반찬 대신 김밥을 사 가서 친구들과 나눠 먹거나, 쌍둥이 자매와 친해지면서 먹던 경양식 돈가스. 할아버지가 정성껏 싸주신 예쁜 도시락, 할아버지와 삼촌과 먹는 음식들까지.


어떤 음식은 명은에게 부끄러움을 느끼게 했고 또 어떤 것은 자부심이나 호기심이기도 했다. 매일 먹는 밥이지만, 그 메뉴와 함께 식사하는 사람들은 명은의 선택으로 결정되었다. 명은이는 자신이 바라는 바에 따라서 주체적으로 고른다. 태어나면서부터 자연스럽게 주어진 것과 명은이가 바라는 것 사이에서 괴리감을 느끼기도 하고 또 선택하면서 새로운 경험을 쌓아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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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하게 부끄러워했고 슬퍼하고 질투하고 걱정하고 즐거워하던 시절이 떠올랐다. 그 시절이라고 고민이 없었던 게 아닌데. 그리고 여전히 마음속에 의기소침하고 마음이 솟구쳤다가 떨어지고 기쁘고 슬퍼하는 5학년 명은이가 살고 있음이 느껴졌다. 내 안의 어린아이를 솔직하게 대면할 수 있었다.


열심히 하고 잘하고 싶은 것. 반장도 싸우는 아이들을 중재하는 것도, 글쓰기도, 아이디어를 내는 것도 모두 다 멋지게 해내고 싶은 마음. 그런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상처를 주지 않고 솔직해지는 것이었다. 역시 최고의 방법은 숨기지 않고 투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삶과 가족에 대해서 물음표라 여기던 명은이가 답을 찾았기를 바라면서, 나에게도 어떤 답이 찾아온 것만 같다.

 

 

[고승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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