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필요한 건 오직 '사랑하고 싶은 마음' - 영화 '비밀의 언덕'

글 입력 2023.07.14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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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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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마음은 숨길래야 숨길 수가 없다고들 말한다. 괜히 사랑을 재채기에 빗대는 게 아니다. 간질거리는 목소리를 감추려 입을 다물고, 다정한 몸짓을 억누르려 제아무리 뻣뻣하게 굴어도 사랑이 스며버린 눈빛만큼은 숨길 수 없다. 하지만 사랑의 형태가 오직 그뿐일까. 숨길 수 있는 마음이어도, 나아가서 깊은 한 구석에 감춰버리고 싶은 마음이라도 사랑일 수는 없는 걸까?

 

영화 ‘비밀의 언덕’의 주인공 명은은 1990년대를 살아가는 초등학교 5학년짜리 소녀다. 어린아이 취급을 받기에는 어중간한 11살의 나이다. 사춘기가 시작되면서 나름대로의 자의식과 자존심을 세우는 시기이기도 하다. 아이답게 행동하기엔 스스로가 다 컸다고 생각하고, 어른답게 행동하기에는 아직 모든 게 서툴 때다. 원하는 것을 가지기 위해 영악하게 굴다가도 미숙한 실수를 저지르고서 엉엉 울음을 터뜨린다. 11살은 정말이지 완고하면서도 연약한 시절이었다는 걸 그때를 거쳐온 우리들은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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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은의 삶은 학교와 집을 벗어나지 않는다. 선생님과 친구들, 가족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일생일대의 골칫거리가 된다. 어른들 눈에는 별 일 아닌 문제도 11살짜리 아이의 조그만 세계에서는 그야말로 ‘별 일’ 그 자체다. 내 초등학생 시절을 떠올려봐도 그렇다. 친했던 친구가 갑자기 서먹하게 굴거나 선생님한테 억울하게 혼이 나고, 깜빡하고 준비물을 빼먹은 날이면 그야말로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지금 명은을 가장 괴롭히는 것 또한 가족에 대한 고민이다. 명은의 가정 형편이 눈에 띄게 어려운 건 아니다. 하지만 시장에서 젓갈 가게를 운영하는 우악스러운 엄마와, 가게를 가끔 돕긴 하지만 한량이나 다름없는 아빠가 창피스러운 탓이다. 고작 이십여 년 전만 해도 당연스럽게 이루어졌던 ‘가정환경조사’만 없었다면 좀 달랐을까.

 

영화 초반부에서 명은은 문구점에서 물건들을 유심히 살펴보다가 선생님께 드릴 생일선물을 고른다. 포장지에 붙일 장식도 금색으로 골랐다가, 헉헉대며 돌아와서 핑크색으로 바꿔달라고 할 정도로 진심이다. 집에 와서는 스탠드를 켜고 책상에 앉아서 편지지에 정성껏 글자를 눌러쓴다. 그 위에는 선생님을 향한 애정도 담뿍 담겨 있지만, 편지의 진목적은 가정환경 조사를 교실이 아니라 연구실에서 따로 하고 싶다고 말하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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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담임 선생님이 지각하는 바람에 조례 시간에 교장 선생님이 대신 들어온다. 결국 선생님은 교탁 위의 선물상자와 편지봉투를 미처 열어보지 못한 채 상담을 시작한다. 결국 명은은 아버지는 제지 회사에 다니고 어머니는 가정주부라고 거짓말을 해 버린다. 바라던 대로 선생님한테만 따로 말할 수 있었다면 솔직해질 수 있었을까. 좀 2023년스러운 관점이긴 하지만, 그냥 친구들이 웅성대는 틈을 타 스쳐지나가듯 부모님이 자영업을 하신다고 말할 수는 없었을까.

 

그녀의 거짓말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명은은 ‘비밀 우체통’을 들고 반장선거에 나간다. 익명으로 아이들의 의견을 받아서 학급 운영에 반영하겠다는 공약이다. 선거에서 반장이 된 명은은 시장으로 달려가 부모님한테 자랑스럽게 얘기하지만, 엄마는 반장 엄마 노릇하기가 얼마나 피곤한지 아느냐며 빨리 무르라고 초를 칠 뿐이다. 명은은 반장직을 포기하는 대신, 선생님께 엄마가 할머니 병간호로 바쁘셔서 학교에 못 오신다고 거짓말을 한다. 

 

‘좋은 반장’이 되려는 명은의 열정은 지칠 줄 모른다. 방과후에 남아서 늦은 시간까지 친구들의 쪽지를 펼쳐보고, 혼자 노는 친구를 반장답게 놀이에 끼워주고, 싸움이 일어나면 중간에서 아이들을 말린다. 단체 펜팔이나 생일 파티, 학급문고 등 여러 ‘사업’을 벌이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명은은 욕심이 있는 아이다. 똑 부러지는 성격을 타고나서일까. 늘 성실하고 싶고, 뭐든 잘하고 싶고 또 잘 보이고 싶다. 쪽지가 잘 들어오지 않자 밤늦게까지 왼손으로 글씨를 써서 몰래 비밀 우체통을 가득 채울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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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은은 선생님의 제안으로 환경 글짓기 대회에도 나가게 된다. 도서관에서 환경 보호에 대한 책을 찾아 읽고, 음식물 쓰레기를 제대로 버리지 않는 엄마한테 타박을 하면서 글을 완성한 명은은 ‘우수상’을 받는다. 그녀는 글짓기에 소질이 있다는 걸 깨닫고 그 뒤부터 글짓기 대회마다 참가하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아빠가 그렇게 바라는 ‘최우수상’을 받기 위해 통일 글짓기 대회에 참여하게 되는데 이때 변수가 생긴다.

 

새로 전학 온 ‘혜진’이 옆반의 쌍둥이 자매인 ‘하얀’과 팀을 이뤄 명은을 밀어내고 최우수상을 탄 것이다. 모범생처럼 얌전하고 곧바른 명은의 글과는 정반대로 도발적이기 그지없는 작품으로 말이다. 혜진은 사회 과목 수업시간에도 엄마의 직업을 ‘아가씨 골목 사장님’이라고 발표해 버리는 아이다. 아이들이 수군대도 아랑곳하지 않고 당당하게 점심을 먹고 도서관에 간다. 따가운 눈초리에 익숙해져 버린 이들 자매는, 통일 글짓기 대회에서도 지금껏 교실에서 소외당했던 경험을 풀어놓으며 진정한 평화란 무엇인지 논한다. 명은이 혜진에게 수상 비결을 묻자 혜진은 시크하게 답한다. “그냥 솔직하게 쓰면 돼. 그럼 선생님들이 알아서 감동 먹고 상 줘.”

 

명은은 부모님이 시장에서 일한다는 걸 숨기기 위해 가짜 가족 사진까지 준비할 정도로 치밀하게 거짓말을 하는 아이다. 건물을 나서는 회사원에게 부탁해 함께 찍은 사진은 가짜 아빠로, 친구 엄마와 찍은 사진은 가짜 엄마로 변신한다. 그런 명은이 원고지 앞에서만큼은 솔직해지기로 마음 먹는다. 그저 우수상이 아니라 최우수상을 타고 싶다는 마음으로 말이다. 그리고 가정의 달을 맞이해서 시청에서 연 글짓기 대회에서 명은은 글 두 편을 제출한다. 하나는 돌아가신 할머니께 보내는 편지고, 선생님 몰래 제출한 나머지 하나는 가족들에 대한 비밀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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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은 대체 뭘까? 명은은 이렇게 말한다. “가족은 내게 물음표예요.” 교양 없는 엄마와 게으른 아빠, 부모님을 싫어하는 오빠. 하지만 명은은 글을 쓰며 가족들의 다른 면면을 돌아보기 시작한다. 엄마는 억척스럽지만 강한 생활력으로 외할아버지와 외삼촌까지 먹여살렸으며, 아빠는 훌륭한 가장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다정한 아버지다. 오빠는 부모님을 싫어하는 것처럼 보여도, 엄마와 둘이 있을 땐 엄마의 하소연에 맞장구를 쳐주며 맏아들 노릇을 톡톡히 한다. 

 

그런데도 왜 가족은 내가 원하는 대로 행동해주지 않을까? 부모님이 친구들 앞에서만큼은 말쑥하게 차려입어 주었으면 좋겠고, 불우이웃 모금후원 전화를 걸어도 돈 아깝다는 소리를 안 했으면 좋겠고, 또 도시락으로 젓갈 말고 다른 반찬을 싸줬으면 좋겠는데 말이다. 명쾌한 결론은 없다. 하지만 명은은 난생 처음으로 자신의 솔직한 내면을 들여다본다. 부끄럽지 않은 척, 당당한 척, 서운하지 않은 척만 해왔던 그녀가 야속함, 애증, 미움, 아픔과 정면으로 마주서는 순간이다.

 

그렇게 쓴 글은 예상조차 못했던 대상을 받게 된다. 무려 시에서 1등을 차지한 것이다. 뛸 듯이 기쁘지만 한 가지 발목을 잡는 문제가 있다. 바로 대상을 탄 작품은 지역신문에 실린다는 것이다. 상을 탄 것까진 좋았는데, ‘이명은’ 이름 석자와 함께 가족을 흉보는 글이 대문짝만하게 실릴 수는 없다. 가족들이 글을 읽게 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상상도 하기 싫다. 결국 명은은 담임선생님의 만류에도 수상을 포기하기로 결정한다. 대신 쌍둥이 자매가 트로피를 받게 된다. 명은은 다른 작품으로 탄 ‘장려상’ 상장을 품에 안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가족들에게 달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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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아빠가 딸이 자신들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여기게 될까봐, 명은은 숨을 몰아쉬며 언덕 위로 오른다. 그리고 시청까지 가서 되찾아온 원고지를 흙 속에 파묻는다. 이 장면은 쌍둥이 자매가 글을 낭송하며 읽은 “사랑은 숨기지 않는 것”이라는 구절과 겹쳐 보인다. 명은도 이제 가족들의 진짜 모습을 부정하지 않는다. 더 이상 가족들의 진짜 모습을 ‘숨기지 않고’, 온전히 받아들인다. 쌍둥이 자매가 자신들을 포기하지 않은 엄마를 향한 사랑과 존경의 표현으로, 엄마의 직업을 숨기지 않았듯이 말이다.

 

명은을 스스로 가족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가족을 부끄러워하는 마음은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한 탓이다. 평범하고 화목한 가족과 거리가 멀다는 이유로 거짓말을 지어낸 것도, 가족과 외식할 때 친구네 가족과 마주치면 못 본 체했던 것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런 행동마저도 가족을 사랑하고 싶다는 생각이 앞섰기 때문이리라. 사랑을 ‘자랑스러움’으로만 여겨버린 탓에, 진짜 가족을 ‘사랑할 수 있는', 즉 '자랑스러워할 수 있는’ 가족으로 꾸며냈을 뿐이다.

 

우리는 종종 불순물이 전혀 섞이지 않은 순도 100%의 사랑만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사랑 그 자체의 감정이라면 변명이나 핑계가 따라붙으면 안 될 것 같아서일까. 명은의 방황도 마찬가지의 이유에서다. 내가 원하는 사랑의 형태가 영 손에 쥐어지지 않아서, 나의 마음가짐보다는 사랑하고 싶은 대상을 바꾸려 했던 것이다. 이런 명은의 실수는 가족간의 사랑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보여준다. 연인간의 사랑이야 불꽃이 튀는 시작부터 새삼스럽고 우연하지만, 핏줄은 필연적으로 이어져 있다. 가족이라는 이유로 사랑하는 것도 쉽지만,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랑해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순간도 분명히 찾아온다. 

 

하지만 명은의 결말은 반짝반짝 빛난다. 가족이 아니라 나 자신을 바꾸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6학년 개학날, 새로운 담임선생님은 어김없이 가정환경 조사서를 돌린다. 명은은 부모님의 직업란에 '젓갈가게'라고 적는다. 그리고 선생님이 종이 뒷면에 '나'에 대해 마음껏 써 보라고 말하자 명은은 밝은 표정으로 망설임 없이 연필을 긋는다. 분명 그곳에는 명은의 진짜 마음이 빼곡히 담겨 있었을 것이다. 앞으로 되고 싶은 모습이라던지 보여주고 싶은 모습 말고, 지금의 '진짜' 내 모습 말이다.

 

중요한 건 결국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다. 나를 사랑하고 싶은 마음, 가족을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언젠가는 그 마음이 진짜 사랑임을 확인하게 되는 순간이 온다. 가족의 존재를 숨기고 싶었던 명은의 한 해가 결국에는 가족들을 향한 사랑을 확인하는 시간이 된 것처럼 말이다. 그 과정에서 앓는 사춘기는 11살 아이에게만 오는 것이 아니다. 그 감정이 사랑이든 뭐든, 내 마음이 내 마음 같지가 않아서 조바심을 내고 있다면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명은의 이야기가 훌쩍 자라버린 내 마음 깊은 구석까지도 사려 깊게 다가오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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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수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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