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사람이 가고 남는 건 무엇일까? - 뮤지컬 ‘라흐 헤스트’ [공연]

변동림은 향안이 되어
글 입력 2023.06.30 0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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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s gens partent, mais l’art reste

사람은 가고 예술은 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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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넘어가는 향안의 수첩을 매개로 과거의 동림과 현재의 향안이 맞닿으면서 동림은 향안이 된다.


뮤지컬 <라흐 헤스트>는 20살에는 ‘변동림‘ 이름으로 4개월 동안 이상과 함께, 28살에는 ’김향안‘ 이름으로 김환기의 뮤즈의 삶을 산 김향안 선생에 관한 이야기다.


그러나 사실 그를 ‘뮤즈’로 정의하는 것은 그의 삶을 일축하는 것과 다름 없다. 그는 김환기 화백이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갈 수 있도록 북돋았으며, 서울신문에 파리 기행을 연재하고 미술사 비평 공부를 하는 등 자신의 길을 개척하면서도 파리에서 아뜰리에를 마련하며 김환기 화백을 위한 기반을 닦아놓았기 때문이다. 김향안이라는 인물은 단순 뮤즈가 아니라 김환기 화백의 작품 창작에 큰 도움과 영감을 준 귀인으로 보아야 타당할 것이다.


실제로 김환기 그림 특유의 푸른색은 파리 유학시절에 등장했다. ‘빛깔들’ 넘버에서 별이 푸른빛으로 반짝이던 연출도 이를 보여준다. 또한 향안과 함께 뉴욕으로 넘어가 지평을 넓힌 김환기 화백은 순수한 점, 선, 면으로 이루어진 점묘 추상화의 경지에 이르렀는데, 이 때문에 그의 작품들은 면으로 선을 만들어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향안, 그 이름을 내게 줘요.”


 

극 중 향안과 환기의 시간은 거꾸로 가고, 동림과 이상의 시간은 순행한다. 수첩에 적힌 일기의 연도와 날짜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향안과 동림의 옷차림도 시간의 흐름을 드러낸다. 향안의 옷은 숄에서 원피스, 블라우스와 치마로 점차 연령대가 낮아져 동림과 비슷한 옷차림이 된다.

 

향안의 시간은 떠난 환기를 추억하며 자신이 그림 그림을 바라보는 장면, 환기가 떠난 후 처음으로 붓을 잡아본 장면들을 역행하여 두 사람이 함께 하기로 한 장면과 ‘에필로그’의 첫 만남까지 흘러간다. 이때 향안은 “변동림이라고 합니다”라고 소개하며 환기와 악수를 한다. 이 장면은 순행하는동림의 시간과 역행하는 향안의 시간이 맞닿는 묘미를 만들어낸다.


김환기와의 결혼에 앞서, 변동림은 이름을 김향안으로 바꿔 새 인생을 시작하기로 했다. 고향 향(鄕)에 언덕 안(岸) 자를 써 ‘작은 언덕’이라는 김환기의 아호를 필명으로 차용했다. 그리고 김환기는 ‘수화’라는 아호를 사용했다.

 

“향안, 그 이름을 내게 줘요.”

당신의 것이었던 이름으로

작은 언덕을 함께할게요

나무와 얘기하는 당신과 함께

꿈을 꾸며 살아갈게요


 

 

변동림으로 남아


 

동림은 “우리 같이 죽을까, 어디 먼 데 갈까”는 이상의 프러포즈를 받고 고민한다. 나중에 후회할까봐 완전히 느낌표는 아니라던 동림의 말에 향안은 예술가와 사는 것에 대해 이야기해주며 “너의 느낌표를 믿어”라는 확신을 준다.

 

예술가와 함께 산다는 건 아마 그럴 거야

찰나의 행복을 간직하고

그 기억으로 살아가는 일


그 사람이 남긴 흔적으로

오랫동안 삶에 향기를 품는 일

 

동림은 가방 하나 들고 그를 따라 나서지만 건강이 악화된 이상은 곧 글을 쓰기 위해 홀로 동경에 가겠다고 한다. 그리고 동경에서 불량 시민으로 체포되고, 동림이 동경으로 그를 찾아간지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난다. 동림은 이상의 죽음 이후 단단하게 자신을 다잡는다. 변동림으로 남아이상과 자신이 나눈 사랑을, 그리고 이상의 흔적을 품고 간직하기로 한다. 이상의 향기는 ‘변동림’이라는 인물과 남는다.


그렇게 그는 변동림으로 남으면서, 김향안이 된다. 과거의 자신을 단단하게 기억으로 남겨둔 채, 향안으로서 나아간다.


 

 

사람이 떠나면 남는 것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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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은 ‘사람이 떠나면 남는 것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첫 넘버인 ‘나라는 이야기’를 부르며 향안과 동림이 함께 무대에 등장한다. 여러 사람들과 함께하고 또 그들을 떠나보내면서  인생이라는 수첩을 한 장 한 장씩 써내려가며 ‘나’라는 이야기를 완성하게 되는 것이다.


동림은 이상을, 향안은 환기를 떠나보냈다. 그러나 이상은 동림에게 시와 글을 남겼고 그가 떠난 후 동림은 수필가가 되었으며, 환기는 향안에게그림과 빛깔들을 남겨 향안이 붓을 들게 했다.

 

Les gens partent, mais l’art reste

사람은 가고 예술은 남아

 

‘라흐 헤스트‘ 넘버에서 동림과 향안은 이상과 환기와 함께 “너로 인하여 내 문장이 완성되고“, ”문장과 문장 사이를 느끼고”, “빈 종이를 너로 채워가”라며 서로의 의미를 노래한다.

 

비단 예술가들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인연이든 악연이든 스쳐간 사람들의 흔적을 예술의 향기로 머금는일, 차곡차곡 페이지를 쌓아가는 것이 곧 우리의 인생이 아닐까.

 

 

[정은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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