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아 피천득 《인연》 - 맑은 바닷속에서 발견한 진주 [도서]

글 입력 2023.06.17 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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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월간 <샘터>를 창간한 우암 김재순 선생과의 대담에서 금아 피천득 선생은 “사람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으므로 거기에 도달한 다음에는 전만 못한 글을 자꾸 써내지 말고 바로 붓을 꺾어야 한다"라고 했다. 그렇게 필자는 단 한 권의 수필집 <인연>을 세상에 낳았다. (<대화> p.28) 샘터에서 발행한 이 책 외에 범우 문고에서 나온 <수필> 또한 동명의 수필들로 순서만 다르게 채워져 있다.

 

저자는 1910년 유명한 부호 아버지 밑에서 태어났으나, 7살과 10살에 아버지, 어머니를 차례로 여의고, 삼촌 집에서 자라다가 상해에서 유학하며 도산 안창호 선생과 같은 독립운동가들과 친분을 쌓았다. 1930년 <신동아>에 시 ‘서정소곡’을 발표하며 등단하게 된 시인, 수필가이자 영문학자다. 서울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고, 하버드 대학교에서 연구 교수로 초청받기도 했다.


이 책에는 저자의 인생 속 소중한 인연들과 나날들, 각각의 소재에 대한 의견과 경험들이 간결한 문체로 쓰여 있다. 생전에 수필보다 많은 시를 내놓은 필자의 성향에서도 유추할 수 있듯 한 모금 한 모금씩 찬찬히 음미할 수밖에 없는 시와 같이 함축적인 문장들, 깨끗한 바다 깊은 곳의 산호와 진주 같은 문장들은 표지의 진주 그림에서부터 이 책의 이미지를 청아하게 뿜어낸다.

 

책을 보는 동안 읽고 싶은 또 다른 책들 때문에, 속도를 내고 싶은 마음과는 반대로 나의 독서 속도는 느려져 갔다. 수십 개의 문장을 필사하게 되는 가운데 책 속에 담긴 미묘한 정서와 저자의 철학은 내 발뒤꿈치를 잡고 쉽게 놓아주질 않았다.

 

많은 독자들이 교과서에도 실린 대표작 ‘인연’에 나오는 아사코와의 에피소드를 가장 인상 깊게 볼 것이라고 추측된다. 하지만 저자는 엄마, 서영이, 유순이, 도산 선생, 춘원 이광수, 셰익스피어 등과 같이 직, 간접적으로 만난 그 밖의 크고 작은 인연에 관하여서도 책을 수놓고 있다.


 

"인생은 작은 인연들로 아름답다." p.21 '신춘'

 

"우리가 제한된 생리적 수명을 가지고 오래 살고 부유하게 사는 방법은 아름다운 인연을 많이 맺으며 나날이 적고 착한 일을 하고, 때로 살아온 자기 과거를 다시 사는 데 있는가 한다." p.80 '장수'

 

"그는 과거의 인연을 소홀히 하지 아니합니다. 자기 생애의 일부분인 까닭입니다. 그는 예전 애인을 웃는 낯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그는 몇몇 사람을 끔찍이 아낍니다. 그러나 아무도 섬기지는 아니합니다." p.216 '구원의 여상'

 

 

특히 그에게 주어진 가장 귀중한 선물인 딸 ‘서영이’에 관하여서는 끔찍이 대하여서 어린 시절의 서영이부터 대학 가는 서영이까지, 5개의 글이 그녀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글이거나, 1인칭 시점으로 묘사한 수필이다.

 

 

"내 일생에는 두 여성이 있다. 하나는 나의 엄마고 하나는 서영이다. 서영이는 나의 엄마가 하느님께 부탁하여 내게 보내 주신 귀한 선물이다." p.167 '서영이'

 

 

이렇듯 아끼고 애정 하는 마음을 보이는 반면, 저자는 아내에 관하여서는 혹평에 가까운 문장을 쓰기도 했다.

 

 

"내가 서영이 아빠로서 미안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첫째 내 생김생김이 늘씬하고 멋지지 못한 것이 미안하다. 따라서 아름다운 아내를 맞이하지 못하였던 것이 미안하다." p.117 '서영이'

 

 

‘여자가 나이를 먹으면 값어치가 떨어지니 빨리 결혼을 해야 한다.’는 등의 피셜이 보편적인 진리인 것 마냥 떠들어대는 이 사회에서 아내의 외모에 대한 평가는 잔인하게 들리는 말이었다. 어쩌면 딸을 신여성으로 키웠으나, 필자 본인은 사랑으로 결혼하지 않으신 건가 생각이 드는 대목이었다. 허나 금아의 아내 ‘임진호’ 씨는 그를 “나에게 참 잘해주시는 분”이라고 말한 적이 있단다. (2007 중앙일보 기사 “세상과 인연 접은 피천득 선생” 중)

 

저자는 “아름다움에서 오는 기쁨을 위하여” 글을 써 왔다고 하는데, 맑고 소년 같은 감수성 속에서도 강한 의견을 피력하는 중에, 여성에 관한 내용들은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도 많았다.

 

앞서 언급한 범우 문고의 <수필> 책 뒷부분에는 해설이 적혀 있다. 해설가 차주환 씨는 “피천득 씨는 여성 예찬자이면서도 여성을 보는 눈이 말하자면 까다로운 것이다.” (p.200)고 말하고 있는데, 나는 궁금하다. 피 선생께서 유난히 민감한 감수성으로 여성에 대해 그리 느끼는 것인지, 대다수의 남자가 느끼는 것을 고유의 재능으로 특출하게 표현해 주고 있는 건지.

 

내가 느낀 부분을 당신도 마주하게 된다면 어떤 생각을 하게 될지 모르겠지만, 책을 펼치면 말로 다 할 수 없는 청빈하고, 아름다운 저자의 세계 속으로 빠져들게 되리라고 장담한다.

 

 

[윤선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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