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어디에서든 최선의 하루를 살아내기 [영화]

글 입력 2023.06.13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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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는 ‘크라코지아’가 전부인 한 남자가 미국의 공항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빅터 나보르스키는 크라코지아라는 작은 국가에서 아버지의 꿈을 대신 이루기 위해 뉴욕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가 뉴욕으로 오는 동안 크라코지아에서 내란이 발생해 하루아침에 빅터 나보르스키는 국적을 잃게 된다. 무국적 신분인 그는 다시 조국으로 돌아갈 수도, 뉴욕에 발을 디딜 수도 없다. 그렇게 9개월 동안의 빅터의 공항 터미널살이가 시작된다.


공항이라는 공간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잠시 지나쳐가는 곳이다. 목적지를 가기 위한 혹은 돌아오기 위한 여정의 징검다리일 뿐이지만 하지만 빅터에게 공항은 머물러야 하는 곳이 되었다. 언제 올지 모르는 호출을 기다리며 어떻게든 시간을 보내야 한다.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돈도 없고, 의사소통도 되지 않는 낯선 공항에서의 생활에 좌절했을 것이다. 조국이 내란의 상황으로부터 벗어나기만을 기도한다거나,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펼쳐진 일들로 인해 신세 한탄만 계속한다거나. 이것이 빅터와 같은 상황에 처해졌을 때, 일반적인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공항에서의 거주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다짐은 그렇게 빨리 우리의 마음속에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나 빅터는 마치 자신이 공항에 오래 머무른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는 사람처럼 행동한다. 영어 공부를 시작하고 사용하지 않는 공항 게이트에 가서 자신의 생활공간을 마련한다. 공항 안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내 돈을 벌기도 하고 그의 무료한 일상을 채워줄 친구들과 사랑도 찾게 된다.

 

빅터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9개월 동안 공항에 머무를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저 오늘 하루를 더 행복하게 살기 위해 했던 행동들이 긴 시간 동안 빅터를 행복하게 해주는 요소들이 되었다. 좌절과 절망에 빠져서 하루를 보내기보다는 자신이 있는 공간에서 최선의 하루를 살아내는 것에 더 큰 의미를 부여했던 빅터는 결국 많은 이들이 축하와 박수를 받으며 뉴욕으로 발걸음 옮긴다.

 

 

 

메르한 카리미 나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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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터미널>의 모티브가 되는 메르한 카리미 나세리는 이란인 아버지와 영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이란에서 왕정 반대 운동을 하닥 여권 없이 추방당했고, 몇 년 후 UN으로부터 난민 지위를 게 되었다. 벨기에에서 머물던 나세리는 1988년 경유지인 프랑스 파리 드골 공항을 거쳐 영국으로 가게 된다. 하지만 중간에 난민 관련 서류들을 분실한 나세리는 영국에 입국하지 못한 채 다시 프랑스 드골 공항으로 이송되었고 그렇게 그는 18년 동안 공항에서 생활하게 된다.

 

그는 공항의 의자에서 잠을 자고 잡지를 읽고 관광객들을 관찰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공항 직원들이 붙여준 새로운 이름인 ‘알프레드 경’으로 나세리는 공항에서 거주하게 되고 난민 지위를 취득한 이후에도 공항에서 알프레드 경으로 살기를 택했다. 그는 결국 2006년 공항을 떠났지만, 사망 몇 주 전 다시 공항으로 돌아와 터미널에서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드골 공항에서의 삶은 나쁘지 않습니다. 하루를 기분 좋게 보내려고 노력하고 매일 저의 미래와 과거에 대해 생각합니다.”

 

- 알프레드 경

 

 

누군가에게는 최악의 시간으로 기억될 수 있는 시간들이 나세리에게는 그가 살아가는 많은 하루들을 구성하는 시간이었을 뿐이다. 그가 난민 지위를 취득해서 프랑스나 벨기에에서 머무르기를 택했어도 그가 살아간 날들은 공항에서의 날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에게는 어디에서 살아가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중요했다.

 

 

 

우리가 터미널에 남겨진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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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터미널에 남겨진다면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우리가 뱉는 불평들 속에는 우리를 둘러싼 환경에 대한 것들이 많다. 계속해서 부족한 점을 찾아내고 무언가를 더 충족시키기 위한 조건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내가 살아가는 환경을 인식한다면, 모든 것이 충족된 곳에 놓여져도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영화 <터미널>은 나에게 주어진 것들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내가 살아가는 하루가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빅터는 그렇게 최선의 하루를 살아가며 자신이 기다리는 것을 향한 간절함을 표현했다. 그가 행복과 따뜻함으로 가득 찬 하루들을 살아갈 때마다, 아버지의 소원을 이루고 싶은 간절한 마음과 크라코지아의 내란이 끝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들이 더 진실되게 다가온다. 그가 막연하게 이 모든 것들을 기다리기만 했다면, 그리고 그 기다림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면 간절히 원하던 순간을 마주하기 전까지의 그의 모든 시간들은 공중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기다리는 방법을 아는 사람이었기에, 언제 어디서든 최선의 하루를 살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이었기에 공항 터미널에서의 9개월을 따뜻하고 의미 있게 보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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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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