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욕망과 탐욕, 재즈와 댄스의 세계 - 뮤지컬 '시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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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즈는 그냥 듣는 음악이 아니에요. 얼마나 치열한 대결인지 직접 봐야 하죠. 저 친구들을 보세요. 방금 곡을 가로채서 멋대로 가지고 놀잖아요. 매번 새로워요. 매일 밤이 초연이에요."
영화 '라라랜드'의 유명한 명대사다. 주인공 세바스찬은 이 말을 통해 미아에게 재즈의 본질을 알려준다. 내가 재즈 음악에 관심이 생긴 것은 영화 '라라랜드'를 보고 나서부터였다. 환상적인 재즈로 서사를 그린 두 남녀의 사랑과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악기들의 치열한 대결을 보고 있으면, 재즈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뮤지컬 '시카고'를 보고 싶었던 이유도 바로 재즈였다. 브로드웨이에서는 25년간 1만 회 이상 공연을 올렸지만 나에게는 초연인 공연이 아닌가. 재즈에 미친 사람까지는 아니더라도, 재즈의 매력에 흠뻑 취할 수 있는 사람이라 자신하며 공연장에 들어섰다. 150분의 공연이 끝난 후 ‘당장이라도 킬힐을 신고 저들처럼 춤을 한번 춰보고 싶다’는 생각이 머리를 휘감았다.
비합리적인 모든 것을 정당화하는 세계, 시카고의 스토리
“Welcome! Ladies and gentleman. You are about to see a story of murder, greed, corruption, violence, exploitation, adultery and treachery─All those things we all hold near and dear to our hearts. Thank you."
살인과 탐욕, 부패와 폭력, 사기와 간통, 배신으로 가득한 이야기의 대명사. 바로 뮤지컬 ‘시카고’가 아닐까. 작품은 금주법이 시행되던 1920년대 미국 시카고를 배경으로 제작됐다. 욕망이 금기시된 시대에는 오히려 마음껏 폭주하는 사람들이 늘어났으니, 주인공 록시 하트와 벨마 켈리도 그들 중 한 사람이다.
사진 제공 : 신시컴퍼니
살인을 저지른 록시와 벨마, 이들의 죄를 덮어 석방시키는 변호사 빌리 플린. 이들은 진실은 교묘하게 잘라내고 거짓으로 만든 이야기로 온 세상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 록시 하트는 순식간에 스타가 되며 살인죄에도 불구하고 석방된다. 하지만 곧바로 세상의 관심은 록시가 아닌 더 자극적인 사건으로 향하고 만다. 록시는 벨마와 함께 2인극을 통해 스타가 되는데, 이들의 모습은 마냥 아름답지만은 않다. 이유를 불문하고 범죄를 저지른 대가를 톡톡히 치르지 않은 채 고집스럽게 욕망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시카고의 이야기가 마치 오늘날 다큐멘터리처럼 느껴졌다. 부정부패, 무너진 윤리, 진실과 거짓이 완전히 뒤엉킨 세계는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전혀 달라진 바가 없지 않은가. 죄질에 비해 지극히 낮은 솜방망이 처벌, 입법 사각지대를 생각한다면 언론플레이로 스타가 되어 쉽게 석방된 록시와 벨마의 사례가 전혀 놀랍지 않다. 고작 1세기만으로 인간과 사회가 발전했다고 말한다는 건 역시나 무리다.
특히 록시가 “왜 아무도 나의 사진을 찍지 않느냐”라며 울부짖을 때, 그녀의 허망함에서는 21세기의 ‘좋아요 갈망’을 엿볼 수 있었다. SNS에 사진을 찍어 올리기 위해 몇십 장이 넘는 사진을 찍고, 수많은 사진 중 딱 몇 장을 골라 업로드했을 때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충분한 하트와 댓글이 아닌가.
관심받고 있다는 그 순간에는 뜨거운 희열을 느낄 수 있으나, 그 쾌락은 짧다. 짧은 쾌락에 긴 고통이 따른다는 법구경의 말씀을 떠올려본다. 지나치게 남의 시선을 의식하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삶은 불행을 야기한다. 뮤지컬 '시카고'는 신나는 음악과 댄스가 없었다면 스토리 자체로만 보았을 때 범죄 추리극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긴 시간 동안 작품이 세계를 강타한 이유는 독보적인 '재즈 음악'과 '안무' 덕분이었으리라.
무대를 가득 채우는 화려한 안무와 퍼포먼스
뮤지컬 ‘시카고’는 댄스와 음악으로 승부를 건 작품이다. 무대 연출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할 정도로 공연장의 무대는 심플하다.
하지만 배우들이 펼치는 퍼포먼스는 무대의 여백을 생각할 틈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쭉 뻗은 팔과 다리를 뽐내는 단체 안무부터 정신을 붙잡고 봐야 하는 다이내믹한 텀블링, 높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무대에서 사라지는 마법까지. ‘시카고’의 관능적인 매력은 눈을 뗄 수 없는 다채로운 안무로부터 오는 에너지였다.
무엇보다 공연 내내 댄스와 음악이 연결되는 특징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반복되는 가사와 점점 빨라지는 리듬과 함께 댄스의 템포도 덩달아 빨라질 때면 엔돌핀이 돌았다. 도덕과 윤리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세계를 그렸지만, 이들의 춤을 보고 있자면 마치 이 세상의 옳고 그름을 잠시 잊고 그저 “All That Jazz’에 동참하는 기분이 들었다.
가장 놀라웠던 부분은 높은 구두를 신고 격렬한 댄스를 소화하는 배우들이었다. 무대를 뛰어다니다시피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안무들이 대부분이었다. 오로지 원캐스트로 매일 공연을 오르는 걸 고려하면 과연 어느 정도로 연습해야 저 경지까지 오를 수 있는지 존경심이 생긴다. 물론 이들이 말하길 ‘쇼비즈니스’이기에 무엇이든 감당할 수 있을 테지만, 체력의 한계까지 거뜬히 뛰어넘어야 하는 배우들의 열정에 찬사를 보낸다.
시카고만의 독보적인 재즈, 14인조 빅밴드
시카고의 정체성은 무엇보다도 재즈다.
공연을 시작하자마자 처음 만나는 곡이 ‘All That Jazz’다. 재즈 음악의 힘은 라이브 연주를 하는 14인조 빅밴드가 만든다. 무대 중앙에 있어 공연 전부터 시선을 사로잡는다.
공연을 관람할 때 주연과 앙상블 배우뿐만 아니라 라이브 밴드의 모습도 관찰했다. 리듬을 타는 피아니스트의 머리칼은 흥겹게 흔들리고, 트럼펫을 부는 연주자의 어깨는 공연 내내 들썩였다. 녹음한 노래를 듣는 것이 아니라, 관객과 함께하는 그 자리에서 라이브 연주를 하는 것은 큰 감동과 여운을 주었다. 음악의 순간성은 매번 매 순간의 공연을 초연으로 만든다. 지금 이 순간 공연장에서 울려 퍼지는 재즈 음악에 온 정신과 몸을 맡기는 기분이 들었다.
대표적으로 'Cell Block Tango'는 작품을 보기 훨씬 전부터 알고 있던 곡이었다. 6명의 죄수들이 각자의 사연을 터놓으며 '범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던 이유'를 정당화하는 넘버다. "pop, six, squish, uh-uh, cicero, lipschitz"라는 가사가 반복되며 죄수들이 겪는 이야기의 핵심 키워드들이 울려 퍼진다. 도도한 목소리로 노래하는 이 신나는 넘버를 듣고 있으면 과연 죄수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이 맞는지 헷갈릴 정도로 흥겹다.
이번 공연에서는 'We Both Reached for the Gun'에 푹 빠지게 됐다. 록시의 기자회견이 펼쳐지는 넘버로, 그녀의 죄를 정당화하는 가사들과 이야기가 펼쳐진다. 특히 이 넘버는 "oh yes oh yes oh yes", "The gun, the gun, the gun"와 같이 반복과 열거, 점층을 통해 극의 몰입도를 더욱 높이는 역할을 한다. 점점 고조되는 감정으로 폭발적인 댄스를 선보이는 재미가 상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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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 오리지널 내한 공연을 볼 수 있는 기회는 단 두 달뿐이다. 블루스퀘어 신한카드홀에서 8월 6일까지 관객을 만날 예정이다. 날 것의 욕망과 멈출 줄 모르는 흥의 세계를 경험하고 싶다면, 시카고를 보는 것을 추천한다.
사진 제공 : 신시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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