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ASMR, 나만이 아는 세계로 [드라마/예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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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즐기는 자장가
사람이 가장 감성적으로 되는 시간은 언제일까. 아마도 침대에 누워 잠에 드는 시간일 것이다. 어떻게 되었든 하루를 끝마치고 누웠으니 마음껏 휴대폰을 해도 괜찮을 시간일 수 있겠지만 결국 잠을 자는 것이 목적이기에 수면의 유령이 찾아오지 않는다면 그만큼 고역인 시간도 없다. 특히나 잠을 자는 환경이란 게 얼마나 위험천만한가. 잠은 죽음을 연습하는 것이라는 누군가의 말처럼, 잠에 들기 전 깨어있는 시간은 고독하고 어두컴컴한 곳을 홀로 견뎌내야 하는 외로움의 시간이기도 하다. 평소 같을 땐 까마득히 잊고 지내는 과거의 흑역사나 미래에 대한 갑갑함이라도 머릿속에 들이닥치면 “여기 불면 1시간 추가요!”가 된다. 지금 당장 해결할 수도 없는 문제에 대해 끝도 없이 빠져들며 오히려 정신은 더욱 또렷해진다. 잠에 드는 시간은 어둠과의 위태로운 싸움이다.
이때 고요한 방을 채우는 소리가 소곤소곤 들려오니, 바로 ASMR이다. ASMR의 철자는 autonomous sensory meridian response로, 직역하면 자율감각 쾌락반응이다. 이를 쉽게 풀이하자면 특정 자극을 통해 심리적 안정감과 쾌락을 느끼는 현상을 가리키며 대개 영상이나 음성의 형태에 실려 전달된다. 아마 ASMR이란 용어를 모르던 대부분의 사람들도 이러한 쾌락을 자연스럽게 좇고 있었을 것이다. 누군가 귀를 파줄 때 느껴지던 야릇한 느낌, 머리를 빗질해줄 때의 간지러운 감각, 종이봉투를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듣고 묘한 쾌감과 안정감을 느껴본 적이 있다면, 이미 당신은 ASMR의 세계에 조기 입학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러한 자극은 시각적 혹은 청각적으로 우리의 간지럽던 부분을 긁어주어 몸의 끝에서부터 편안한 따뜻함이 차오르게 하고 긴장을 풀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러므로 잠이 들기 직전, 어둡고 불안하고 온갖 고민이 차오르는 때에 들려오는 ASMR은 어릴 적 보호자의 자장가만큼이나 편안하고 아늑하다. 촛불을 밝혀 어두운 허공을 빛으로 채우듯, 우리의 마음까지도 편안함에 이르게 된다.
우리에게 흥분을 주는 쾌락과 자극은 많지만 편안함을 선사하는 자극은 많지 않다. 심지어 사람에 따른 효과의 편차도 거의 없이 뇌에 직접적으로 전달되어 즉각적인 안락함을 야기하는 것은 ASMR이 유일할 것이다. 이러한 ASMR의 매력에 빠진 지도 어언 10년에 가까워지고, 가장 좋아하는 ASMR 채널 목록도 어느덧 필자의 마음속에 단단히 자리를 잡았다. 오늘은 그 가운데 가장 두 가지를 여러분에게 소개하고 싶다.
1. 트렌드와 재미, 통찰까지 한 번에 잡고 싶다면 - 강유미의 좋아서 하는 채널
아마 당신은 ‘도믿걸’이라는 캐릭터로 그녀를 이미 알고 있을지 모른다. 코미디언으로서 한 차례 큰 인기를 얻은 강유미는 유튜브에서 ASMR이란 콘텐츠를 통해 또 한 번의 성공을 거두었다. ‘좋아서 하는 채널’이라는 이름 그대로 그녀는 자신이 가장 잘하는 것을 융합한 독특한 영상을 만들어낸다. 제작자라면 우선 요구되는 역량인 사람 관찰을 통해 우리 주위에 존재하는 다양한 인간 군상의 미묘한 특징을 정확히 포착했을 뿐 아니라, 그녀만의 매력적인 위트로 그 사람을 연기해낸다. 그녀의 ASMR 콘텐츠 대부분이 ‘1인 Roleplay(역할극)’ 형식이라는 것은 이와 같은 그녀의 능력이 많은 사람들에게 큰 공감을 사며 사랑받는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녀를 많은 사람들에게 알린 대표적인 ASMR 콘텐츠는 앞서 언급된 ‘도믿걸’이다. ‘“도를 믿습니까”를 말하는 여자(girl)’의 줄임말인 도믿걸은 우리 모두가 한 번쯤은 마주했거나 주변 사람들의 일화에서 만나보았을 군상이다. 어디를 응시하는지 알 수 없는 멍한 눈, 그러나 한 번 잡은 고기는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집착, 그리고 호의를 가장하여 상대방의 시간과 돈, 마음마저 홀랑 착취하려는 이기적인 악랄함까지 더해져 사람들 사이에서는 독보적인 캐릭터성을 확보한 그들이다.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도믿걸에 대한 불편함에 금세 자리를 피하고 잊어버리려 애썼겠지만, 그들과의 불편한 조우에도 불구하고 강유미는 제작자로서의 본분에 충실히 임한다.
그녀는 만난 누구든지 충실히 관찰하여 그들의 외형과 차림새, 특유의 말투, 자주 사용하는 문구를 파악한다. 그리고 그러한 것을 자신의 방식대로 재치 있게, 또 시청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거부감없이 전달한다. 그러한 것은 다른 캐릭터를 연기할 때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동네미용실의 다정다감한 사장님이 되기도 하고 가끔은 10대 일진의 건방진 모습을 연기한다. 때로는 찜질방의 세신사처럼 생활력 강한 아주머니가 되고, 직장 동료들과의 어색한 점심을 먹는 직장인이 되기도 한다. 이와 같이 그녀가 표현하는 인간 군상은 다양한 연령과 직업, 성격을 갖는다. 뛰어난 관찰력을 지닌 코미디언(이자 배우)은 인간을 설명하는 온갖 제약까지도 초월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대단한 점은 그녀의 통찰력에 있다. 그녀는 누군가의 단점만 부각하며 우스꽝스럽게 묘사하거나, 상대의 일부분만을 보고서 되지도 않는 풍자를 감행하지도 않는다. 콘텐츠의 인기를 위해 누군가를 콘텐츠의 소재로써 함부로 해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만 그 사람을 마주하며 느낀 모호한 이미지를 세심히 구체화함으로써 우리 사회가 특정 집단에 대해 지닌 편견을 날카롭게 꼬집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가 연기하는 캐릭터들에게서 못나고 불편한 모습이 보이더라도 그것을 비난하려 들기보다는 해당 군상이 지닌 인간적인 결점, 귀여운 매력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그녀가 만들어낸 인물 중에는 너무도 큰 단점을 지녔으나 그럼에도 많은 사랑을 받는 캐릭터가 다수 있다는 점에서 그녀만의 스토리텔링 능력이 한층 빛을 발한다.
2. 시대를 초월하는 고퀄 연기를 보고 싶다면 – ATMOSPHERE
이번에는 해외로 나가보자. ‘ATMOSPHERE’ 또한 1인 제작자 Anastasia의 채널이지만, 보통의 1인 제작 콘텐츠와는 차별화된 영상을 선보인다. 바로 다양한 시간대와 독특한 설정의 여러 세계가 등장하는 시리즈물 ASMR을 제작한다는 것이다. 그녀의 채널을 방문해보면 여러 시간대를 사는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빅토리아 시대를 사는 Anna, SF적 세계관의 Aries, 1980년대의 인물 Angelica 등이 그 주인공이다. Anastasia는 그 모든 인물을 홀로 구상하여 재현해 연기하고, 이때 철저한 분장과 소품, 배경을 활용하여 현실감을 더한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한 영상에 두 명 이상의 인물이 등장하더라도 모두 그녀가 연기하여 합성한 영상이라는 점이다. 예를 들어, 1980년대의 헤어 살롱을 재현한 영상에는 미용사와 손님 두 명, 총 세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Anastasia가 연기한 것으로, 그녀가 각각의 인물로 분장하여 세 번 찍은 영상을 합친 것이 그 결과물이다. 또한 각 인물 별로 스타일링과 성격에 차이를 두고, 그것은 미묘한 말투의 차이로 구체화된다. 그럼에도 실제 영상을 볼 때는 같은 사람이 연기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할 만큼 자연스러운 것을 보면, 세계관과 인물을 만들고 그것을 연기력과 배경, 소품 등으로 구현해내는 Anastasia의 능력이 뛰어남을 다시금 느낄 수 있다.
한편으로 이 채널의 ASMR 영상은 기술적으로도 탁월하다. RPG 세계관에 기반을 두고 모션 그래픽을 포함한 여러 기술적 효과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이를 통해, 시청자가 이입하는 POV 인물의 움직임에 따라 시선의 고저가 변화하고 배경이 움직임으로써 보다 실감 나는 시청이 가능하다. 말 그대로 시청자가 움직이고 대화하며 눈으로 본 시점을 그대로 찍은 듯한 영상을 만들어내는 점이 ATMOSPHERE 채널의 장점이다.
지금까지 다양한 세계관과 시대의 인물을 연기하는 ASMR 채널은 많았으나, 이 채널은 그 이상의 영상미를 뽐낸다. 시선이 이동하고 장면의 움직임을 자연스럽게 구사하는 채널은 이 채널이 거의 유일하다. 또한 인물의 외형과 성격, 말투까지 하나하나 신경을 쓰니 영상의 업로드 간격은 상당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한번 유입된 시청자는 영상을 거듭 되돌려보며 숨겨진 이스터에그를 발견하고 스토리의 방대함에 감격하며 끝내 충성스러운 구독자가 되고 말 것이다.
꿈을 꾸면, 또 다른 세계로 간다
이러한 콘텐츠 속 인물에 비하면 삶은 너무도 평이하고 단조롭다. 특별히 유쾌한 것도, 그렇다고 아주 창의적이고 사차원적이지도 않은 보통의 삶이다. 누군가는 20대답지 않은 재미없는 삶이라 할 수도 있겠다.
나름의 자극으로 가슴 뛰는 햇빛의 시간이 저물고 나면, 조용한 밤이 찾아오면 모두 잠들고 의식을 잃는 때에 완전히 새로운 세계로 떠나는 누군가가 있다. 아무도 방해할 수 없는 오롯한 나만의 시간, 이때 오히려 날개를 펼치는 사람들이 있다. ASMR 제작자와 시청자는 밤 동안에 감추었던 날개를 마침내 드러낸다. 현실에서는 이야기할 수 없는 우스운 이야기, 공상과 환상을 숨기지 않고 가득 누린다. 그러니 밤이야말로 우리에겐 낮과도 같다.
그리고 ASMR이 데려다주는 또 다른 세계에 여러분을 초대하고 싶다. 아주 고요한 밤이야말로 우리 안의 어린아이를 깨우기 최적인 타이밍이 아닌가. 머릿속으로 미처 뻗지 못했던 세계관, 미처 깨닫지 못했던 우리 주변의 사람들, 미처 알지 못했던 나만의 유머코드를 향해서 오늘 밤은 새벽을 향해 질주한다. 동이 트기 전까지, 우리만의 비밀스러운 세계에서. 잠이 들면 모든 것이 시작된다.
[서지원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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