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고도와 굴뚝, 비극적이고 아름다운 완전한 변형 - 연극 '굴뚝을 기다리며' [공연]

글 입력 2023.06.08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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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도와 굴뚝, 비극적이고 아름다운 완전한 변형


 

부조리극은 인간의 실존이나 어떤 존재 가치를 높은 곳에서 찾지 않는다. 한때 인간의 지성과 이성은 ‘신적인’ 자리에 놓였지만, 인류의 오랜 역사와 지식의 발전은 그것들이 얼마나 순진한 집단망상이었는지를 알게 하였다. 베게트는 남프랑스에서 전쟁으로부터 피신해있을 때 이 작품을 썼다.

 

무의미한 말장난이나 시답지 않은 행동은 공허를 채우지만, 그것들이 스쳐 지나고 남은 자리는 공백을 더 끔찍하게 느끼게 할 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목숨을 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끔찍한 인내 끝에 어떤 보답이 있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우리는 교수대에 스스로 목을 맬 수도 없다.

 

그리고 어쩌면, 혹시나도 모른다. 고도씨가 온다고 하지 않던가. 최소한 기다릴 대상이 있다는 점에서 무의미한 행동은 아닌 셈이다. 물론 고도씨라는 이름만 알고, 고도씨가 온다는 소년은 믿을 수 없고, 함께 기다리는 동료도 영 시답지 않지만, 그래도 고도씨가 오면 기다림만큼은 완결되지 않겠는가.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는 인간의 아름답고 미련한 갈망을 담은 작품이다. 작가의 의도와 다르게 '고도'는 어떤 시대적 정신이나 연출가의 사상에 따라 정의되기도 했다. 그는 신이나 자유가 되기도, 사랑하는 사람이 되기도 했다. 고고와 디디가 기다리는 나무는 시들어가는 나무나 교수대의 역할을 넘어서 십자가 모양으로 연출되기도 했다. 그것을 해석하는 것은 시대와 집단, 개인의 몫일 것이다.

 

오늘 리뷰할 연극 <굴뚝을 기다리며>는 개인적으로 아주 흥미로운 변형이었다. 이름부터 고도를 기다리며를 떠올리게 하는 이 작품은 '오늘날'로서도, '작가의 표현'으로서도, '개인적'으로서도 여러 감상을 느끼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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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현대사회에서 읽는 '굴뚝'


 

<굴뚝을 기다리며>의 '고도'의 '굴뚝'으로의 변형은 현대사회의 핵심을 날카롭게 겨냥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도 고도를 기다리며와 마찬가지로, 약간은 이성적인 '누누'와 신발 때문에 불편한 '나나'가 등장한다. 이들은 굴뚝에서 굴뚝을 기다리면서 인간 청소부, 청소 로봇, 굴뚝이 도착한다는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한 유튜버를 차례대로 만난다. 하지만 다른 것이 있다면, 결국 이 곳에 '누누'만이 남는다.

 

두 작품의 주된 변형은 굴뚝으로의 변형, 비교적 뚜렷한 사회적 메시지들이 담겨있는 인물들과의 조우, 나나와의 이별이라 할 수 있다. 나나와의 이별(사실, 누누의 전반적인 반응들에서 라이터의 관점이 묻어나온다)은 개인적으로 작가적인 메시지가 뚜렷하게 드러난 부분이라서 따로 미뤄서 설명하고, 좀 더 비인간적이고 차가워진 무경계해진 '굴뚝으로의 변형'과 이러한 변형을 강요한 사회 속에서 좀 더 비극적으로 연출된 '다른 인물들' 을 먼저 기술해보려 한다.

 

우선, 굴뚝으로의 변형이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좋든 나쁘든, 의도했든 아니든, 누군가의 해석과 의도로 인한 것이든 <고도를 기다리며>의 고도는 우리의 아버지 신이 떠오를 정도로 인격적으로 느껴지는 때가 있다. 하지만 굴뚝은 아니다. 그것은 움직이지도 않으며, 움직일 것이라 기대되지도 않고 애당초 처음부터 끝까지 배경으로 존재한다. 장소이자 물건인 그것은, 인간인 고도와 다른 질감을 갖는다.

 

개인적으로 이러한 변형이 현대사회의 중요한 맥락을 짚는다고 본다. 베게트가 글을 쓰던 시대와 비교해, 오늘날 우리 사회의 모든 경계는 (말 그대로) 자비 없이 흔들리고 있다. 실증주의가 신앙의 자리를 대체하던 시절이 차라리 더 안정적으로 느껴졌을 정도로, 과학과 기술이 불확실성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이 시대에 고정된 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 ai는 인간의 노동도, 창의성도 강탈해가지 않았는가. 데이터와 확률은 불확실하고, 불확실성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인간이 오랜 역사 동안 지켜왔던 자리를 대체할 수 있게 되었다. 시공간이 기술로 압축되고, 노동이 대체되면서, 인류는 전례 없는 정신적 변화를 마주하고 있다. 하지만 종교도, 시공간의 제약도, 어떤 고정된 실존조차도 잃어버린 인간은 이제 어디에 서 있게 된 걸까?

 

우리의 정신은 이제 과학으로도, 기술로도 묶이지 않는다. 그래서 현대인은 자유와 절망이 몰아치는 파도처럼 자신을 찾아 헤맨다.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물건으로 표상되는 자본이, 배경이자 갈구의 대상이 된다. 우리 사회를 들끓고 공유하는 판타지는 많은 부분에 자본이 기여하고 있다. 인간적인 느낌이 남아있던 고도가, 굴뚝이 된 것은 이러한 맥락 덕분일 것이다.

 

그러한 굴뚝을 기다리는 일이니, 이 곳에 모이는 사람들도 좀 더시대적 현실보다는 추상적인 느낌이 강했던 '고도를 기다리며'보다 더 뚜렷한 메시지를 내포하고 있다. 첫 번째 방문자인 청소부는 굴뚝에 매달린 자다. 그는 누누와 나나가 '밥줄'이라 농담하는 밧줄을 온몸에 휘감고 많은 굴뚝을 청소하면서 푼돈을 받는다. '굴뚝'이상의 '굴뚝'을 보기 위해 생활을 포기하고 시답지 않은 기다림을 계속하는 누누와 나나와 달리, 그는 이 거대한 굴뚝을 생계로서, 자신의 삶으로서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 역시 인간이기에 더러운 손으로 도시락을 까먹고, 누누와 나나에게 나눠주려고 하는 소박한 인간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청소부는 사랑스럽다.

 

이와 대조되는 것이 청소 로봇이다. 그는 인간 청소부를 대체한다. 더러운 옷을 입고 밧줄을 동여맨 인간과 다르게 깔끔한 옷에 과장된 치장을 하고, 밧줄도 동여매지 않았다. 밧줄을 감지 않은 그에게 굴뚝은 그냥 처리해야 할 대상일 뿐이다. 굴뚝에서 기다리는 누누와 나나를 적대시하지 않지만, 누누와 나나가 키우는 식물과 꽃과 마찬가지로 정리해야 할 대상으로 삼는다.

 

개인적으로는 이 식물과 꽃이 어떤 순환체계를 만들고 있다는 설정이 흥미로웠다. 누누와 나나는 자신들의 오줌을 양분 삼아서 그것들을 키우고, 다 큰 것들을 취한다. 더러워 보이지만, 생명의 순환이 이루어지고 있고 이 곳에서 피어난 꽃은 이 창백한 연극에서 순수한 생명의 위치를 점한다. 누누와 나나가 잉태해낸 순수한 존재다. 애당초 이 생물의 부산물을 이 연극에서는 오물로 취급하지 않는다. 하지만 로봇은 그것의 가치를 알지 못하고, 누누의 자살 협박을 통해서만 물러난다. 그조차도 법적인 절차로 해석된다. 어쨌든 청소부 로봇의 등장은 어렴풋이, 로봇이 인간을 대체했음을 암시한다.

 

등장인물들에서 느껴지는 은근한 냉소는, 마지막 소녀의 등장으로 비극성이 강조된다. 소녀는 굴뚝이라는 배경의 세트장 밖에서 관객들을 의식하며 움직인다. '갓생을 사는' 모드라는 그녀는 인간이라기보다 인터넷의 요정 같다. 누누와 나나는 그녀가 공중에 떠있음에 경악하며 굴뚝이 올 것이라는 소식을 들으면서 얼떨떨해한다. 그녀 역시 굴뚝이 누구인지 모르고, 하물며 그 자신조차도 분열되어있는 것처럼 보인다. 고도의 소년과 다르게, 그녀는 공허함을 남기고 공중에서 나타나 공중에서 사라진다.

 

작가적 메시지에서 좀 더 보강하여 설명하겠지만, 소녀가 간 후 밝았던 조명은 아주 깊은 곳처럼 급격히 어두워진다. 어두운 곳에서, 나나는 희망을 잃고 누누의 곁을 떠난다. 누누는 어둡고 추운 곳, 아무도 따라오지 않고 기다리지 않는 곳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모습을 내려다보면서 자신의 마지막 '밥줄'을 잘라버리고 갓생사는 소녀의 몸짓을 의식처럼 따라한다. 초라한 텐트로 누누가 들어가면서 막이 내린다. 그야말로 비극적인 변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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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미련하고 고집 있는 자가 보여주는 희망


 

이 차갑고 무의미하며, 사람들이 출퇴근하는 곳에 서있고 누군가에겐 삶의 현장이 되는 이 굴뚝을 굴뚝에서 기다리는 것이 정말 희망없는 행동일까? 단언컨대, <굴뚝을 기다리며>는 그에 대해 아니라는 대답을 한다. 나나의 고통을 막기 위해 소리 지르는 누누, 결국 굴뚝을 떠나지 못한 그가 이 차가운 세상에서 작품이 내놓는 답이다. 그리고 이 것이야말로 이 작품은 연극 <굴뚝을 기다리며>를 아주 멋진 작품으로 만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선 '굴뚝'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굴뚝은 차가운 우리 사회, 시스템, 무의미한 판타지와 희망으로 해석될 여지가 많다. 하지만 굴뚝은 굴뚝이 아니다. 누누는 자신의 직업을 버리고 굴뚝을 '내려왔다'. 작품의 배경은 '굴뚝 위' 인 것처럼 보이지만 누누와 나나는 다시 돌아오는 것이 두려울 정도로 깊은 곳으로 내려옴을 통해 이곳에 당도했고, 실제로 누누와 나나만이 남았을 때 장면은 급격히 깊은 지하로 전환된다. 처음 굴뚝에 들어왔다는 누누의 이야기와 마지막 장면 외에는 굴뚝의 위에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는 점을 생각해볼 때 심오하다.

 

높은 상공과 깊은 지하를 동일한 곳에 놓은 작품의 연출은 감탄스럽다. 왜냐면 굴뚝이 현실의 어떤 가장 표면적인 것, 우리를 가장 고통스럽게 만들고, 떨어지면 죽을 것 같은 부분인 동시에 사회에서 찾지 못한 가치를 찾기 위한 누누와 나나의 정신적 침잠, 사회 구조의 깊은 모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살아가게 만드는 부분을 모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굴뚝이 맨 위에 있는지, 맨 아래에 있는지도 중요하지 않다, 지상과 멀리 떨어져있는 높이가 중요한 것이, 그 곳에 위태롭게 서있는 인간이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해석을 어렵게 만드는 것 중 하나는 다양한 말들이 이중적인 의미와 상징으로 동시에 사용된다는 점이다. '밥줄', '굴뚝' 등 다양한 소재들이 동시에 존재함으로서 진실에 가깝게 표현된다. 이 작품이 현대사회의 많은 요소들을 겨냥하고 있음을 고려할 때, 우리 사회가 가진 경계 없는 혼란을 표현하려는 의도가 있을 수도 있다. 이는 작품의 아주 초반에서도 묘사된다. 신발로 발이 아픈 나나에게 잘못된 다리를 짚어주면서 인식에 관해 언급한 것이 그렇다.

 

다시 돌아와서, 그래서 친구를 잃고 밥줄마저 끊어버린 누누의 고독은 아주 비극적이면서 아름답게 묘사된다. 그는 가장 미련한 자다. 앞서 말한 수많은 인물들, 결국은 그의 마지막 동료였던 나나는 모두 춤을 출 수 있는 존재들이었다. 춤은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겠으나, 개인적으로는 리듬없이는 할 수 없는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너무 긴장하고 몸을 맡기지 못하면 춤은 출 수 없다. 누누를 제외하고는 모두 춤을 췄다. 그것은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겠지만, 어쨌든 그들은 현실과의 끈-혹은 밥줄-을 잃어버리지 않은, '자연스러운 존재'들인 것이다.

 

하지만 누누는 그러지 못한다. 결국 혼자 남은 그는 소녀의 '갓생사는 루틴'을 의식적으로 행하면서 춥고 외로운 길을 택한다. 그는 사람들의 무리를 슬프게 바라보면서, 그곳에 섞이지 못한다. 무대에서는 어두운 곳에 바람이 불면서 마치 크리스마스 처럼 별빛들을 비추듯 연출한다.

 

 

 

4. 나가며


 

극단의 이름은 고래다. 인간이 닿지 않은 바다 아주 깊은 곳을 멸종위기의 생물은 유영한다. 미련한 누누의 이미지가 극단의 표어와 일치하면서 묘한 감상을 불러일으킨다. 이 혼란스러운 시대에 예술을 한다는 이들의 <굴뚝>은 수많은 맥락이 합쳐서 엄청난 감동을 준다.

 

이 고통스러운 시대에 깊은 곳을 유영하는 것, 굴뚝이라는 것이 차가운 환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파고드는 것, 춤을 추는 것처럼 자연스럽지는 않지만, 나는 이것이 가장 인간다운 행위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이 예술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단순히 먹고사는 문제를 등한시하고, 밥줄을 잘라내는 것이 예술인 것이 아니라, 고통스러움과 인내심을 미련하게 포기하지 못하고 그 대상의 내부를 탐험하는 것을 말한다.

 

<굴뚝을 기다리며>는 희망적인 메시지를 주지 않지만, 최소한 그런 미련한 이들이 우리 사회에 있다는 메시지를 준다. 수많은 굴뚝의 가장 깊은 곳에, 이 외롭고 미려한 자들이 있을 것이다. 춤을 추지도 못하고 외로운 모습으로. 하지만 그 미련한 자들만이 굴뚝에 매료된 세상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수많은 높이에서 떨어져 죽지만 않는다면, 안과 밖이 손쉽게 전환되듯이 가장 좁은 곳이 가장 넓은 곳으로 변할 수 있을 것이다. 애당초 진리는 상태가 아니라, 상태의 중첩에 가깝기에 가장 부자연스러운 것이 자연스러운 것 아니겠는가.

 

작품의 그런 메시지는 나라는 사람에게 가슴 맺힐 정도로 아름답게 다가왔다. 이십대 후반의 나이에 만난 세상과 사회, 수많은 나 자신의 페르소나들은 '고도를 기다리며'를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고도의 실존적 메시지는 우리 삶 전반에 걸쳐 많은 위안을 주지만, 고통스러울 정도로 이 혼란스러운 시대에 옆에 서있어 주진 못했다. 하지만 이 작품은 다르다.

 

그래서 더욱, '고래'가 더 오랜 시간 넓은 곳을 유영하길 바란다. 바다의 가장 강력한 생물로서, 더 많은 것을 흡수하고 커지길 바란다. 이 시대, 우리 사회에 그런 고집있는 상징주의자들은 인간을 위해, 그리고 최소한 그런 미련한 의지로부터 많은 위안을 받는 수많은 나같은 자들을 위해 멸종되지 않아야 한다.

 

 
[이승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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