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제목 없음

피카소의 <시녀들>(Las Meninas, 1957)
글 입력 2023.06.07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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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에 즐겨 다니는 사람은 두 부류로 나뉜다. 음성 해설을 챙겨 듣는 사람과 안 챙겨 듣는 사람.


나는 후자에 속한다. 작품에 관한 사전 정보 없이 마음대로 해석할 기회를 먼저 얻는 게 좋다. 음성 해설은 듣지 않아도, 작품 옆에 글로 적힌 간단한 작품 설명은 꼼꼼히 확인하는 편이다. 시간이 없을 때는 글을 다 읽지 못하더라도 제목만은 꼭꼭 확인한다. 전문가가 아닌 내가 해설도 없이 화가의 의도를 그대로 이해하기는 어렵겠지만, 적어도 대충 방향만은 비슷하게 맞추었길 바라는 심리인 것 같다.


그러나 최근에 미술관을 줄기차게 다니며 느낀 점 한 가지는, 생각보다 제목을 대충 짓는 화가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생각보다 많은 수준이 아니라, 도리어 정성 들여 제목을 짓는 경우가 드문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길거리 풍경1, 길거리 풍경2, 길거리 풍경3… 무제1, 무제2, 무제3… 사실 이렇게 숫자라도 붙여 놓으면 다행일 지경이다. 여러 개의 작품에 엄청 간단한 단어 하나를 같은 제목으로 주는 화가도 많다.


제목에서 많은 단서를 얻으려 드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이런 화가들의 습관이 얄밉다. 그림이 나타내고자 하는 것을 단번에 이해하기 어려운 추상적인 작품일 때는 특히 더 그렇다. 웃기기도 하지만 황당하기도 하고, 분명 자기 작품에 엄청난 정성을 쏟을 텐데 왜 제목은 이리도 성의 없이 짓는지-혹은 짓지도 않는지-의문이었다.

 

 

 

시녀들1, 시녀들2, 시녀들3… 시녀들58.



그렇다, 이 글은 바르셀로나의 피카소 미술관에서 <시녀들>이라는 작품만 58점 관람하고 쓰는 글이다.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작품 <시녀들>(Las Meninas, 1656)에 큰 감명을 받은 피카소는 이 작품을 거듭 재해석하여 쉰여덟 개나 되는 연작을 남겼다.



김지수기고글_사진1.jpg

 

 

그 작품들의 제목은 모두 같은 <시녀들>. 미술관에 가 보면 전혀 다르게 생긴 그림 여럿이 모조리 같은 제목을 달고 줄지어 선 모습을 볼 수 있다. 물론 파헤쳐 보면 다 같은 장면을 새로이 그린 것임이 느껴지지만, 한눈에 봐서는 같은 제목을 공유한다는 걸 납득할 수 없을 정도로 각양각색의 이미지를 뽐내는 그림들이다.


이 연작을 보면서도 이전부터 품어왔던 의문을 다시 떠올렸다. 사람들이 작품을 쉽게 지칭할 수 있게 각기 다른 제목을 지어주면 안 되는 건가? 제각각 다른 해석이 덧붙어 탄생한 소중한 작품일 텐데 그런 해석까지 포함해 제목을 따로 지어줄 수는 없었나? 나는 ‘이’ <시녀들>은 맘에 들지만, ‘저’ <시녀들>은 취향이 아닌데, 그러면 나는 ‘이’ 작품과 ‘저’ 작품을 어떻게 구분해 말할 수 있는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답을 해줄 수 있는 피카소가 옆에 있는 것도 아니고, 이 문제가 피카소 한 화가에게서만 나타난 현상도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빠르게 체념했다. 그리고 한 스물아홉 번째 <시녀들>을 보기 위해 넘어갔다. 이때쯤 가서는 제목이 어쨌든 <시녀들>이라는 사실에도 익숙해졌기에 제목만 덩그러니 적혀 있을 작품 설명란도 제대로 보지 않고 그림만 보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감상하다 보니, 내가 제목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정말 작품 자체에 온전히 집중한다는 게 느껴졌다. ‘어떻게 같은 작품을 쉰여덟 번이나 다르게 그리나’라고 생각하던 것도 잠시, 피카소가 각자 다른 점에 집중해서 그렸다는 게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간 내가 자유롭게 해석하고 싶다는 이유로 음성 해설도 듣지 않았으면서, 몇 글자짜리 제목에 발이 묶이기를 자처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제목조차 개의치 않으니 얼마나 재밌던지.

 

 

 

제목:



실은 제목이 중요하다는 생각조차 너무 언어 중심적인 사고이지 않을까. 대부분의 사고가 언어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만큼, 단편적이고 직관적인 정보를 주고받기에 제목이 용이한 것은 사실이지만, 회화 작가들은 시각 자극으로 자신의 의도를 전달한다. 화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미 그림에 모두 나타나 있다. 작품으로 충분히 표현했다면, 구구절절 제목을 붙이는 것이 오히려 사족이 될지도 모른다. 구체적인 제목을 붙이지 않는다며 성의가 없다고 투정 부리다니, 얼마나 거만한 생각이었나.


물론 나와 같은 문외한을 위해 작품 이해의 길잡이가 되어줄 친절한 제목을 지어주는 것도 좋은 방법이겠지만, 그건 작품을 완성하는 또 하나의 방법이지, 유일한 방법이 아닐 것이다. 이전까지는 <무제>라는 것, 제목이 없다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아직’ 제목이 없을 뿐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는 꼭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됐다. 정말로 ‘제목이 없다’는 게 가능하다.

 

 

김지수기고글_사진2.jpg

 

 

또 하나 재밌는 점은 이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이라는 제목마저도 원작가가 성의껏 붙인 이름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작품은 명확한 이름 없이 그저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부르는 말로 지칭되어 오다가, 현재 작품을 소장 중인 프라도 미술관에 가서야 현재의 제목인 ‘시녀들’로 자리 잡았다. 사실상 피카소는 벨라스케스의 <무제>를 오마주하여 <무제>를 쉰여덟 점이나 그리며 <무제> 연작을 만들어 낸 것이다.


지금 이 글은 사실 정말 제목이 없다기보다는, ‘아직’ 제목이 없는 가짜 <무제>에 가깝지만, 나 또한 벨라스케스의 <무제>를 오마주한 피카소의 <무제>를 위한 헌정 글을 쓰는 체하며 제목 없는 글을 쓴다.

 

 

 

김지수.jpg

 

 

[김지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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