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내다 버린 한 계절

글 입력 2023.06.12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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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서랍에 들어있는 물건들이 ‘언젠가 쓸 것’, ‘언젠가는 쓸 수 있는 것’, ‘언젠가 쓰고 싶은 것’과 같이 내 미래와 엮여있는 물건들이 아니라 그저 잡동사니로만 느껴졌다. 원인불명의 권태감이었다. 금요일 저녁이었고, 다음날은 아무 일정도 없는 토요일이었다. 내일도 거슬리면 청소나 해야지, 하며 잠자리에 들었고, 다음날 늦은 오전에 눈을 뜬 나는, 여전한 권태감에 머리를 질끈 묶었다. 커피를 내리곤 절반을 벌컥벌컥 마신 뒤 서랍을 뒤엎었다. 나의 한 시절을 갖다 버린 날이었다.


장장 만 6년을 함께 한 물건들을 이리 쉽게 버리게 될 줄은 몰랐다. 홀로 반년간 타지로 향하던 때에도 자그마한 열쇠고리 하나까지 챙겨가던 편이어서 더욱 몰랐다. 마음이 헤픈 것이 사람에게만 헤픈 것이 아니어서, 내 마음에 들어 사들인 물건도 한참 쓰는 편이니 선물 받은 것은 하등 설명이 필요 없다. 로고가 지워지고 모서리가 헤져도 제구실만 한다면 내게는 새 물건과 다름이 없었다. 그런데 J가 줬던 반지까지 싹 다 내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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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는 법을 배우기란 영 쉽지 않았다. 종량제 봉투는 제 시기에 잘 버리는 편이다. 다만, 종량제 봉투를 하나씩 내던지는 것과 쓰던 물건을 버리는 것은 확실히 다르게 와닿을 뿐이다. 쓰던 물건을 버리기란 여간 찝찝하고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버릴 물건들을 골라내며 생각이 많아졌다. 말이 잡동사니지, 내 과거의 파편들이었다. 서랍의 내용물들을 버리기란 내 흔적을 버리는 것과 같았다. 기억을 어떻게, 추억을 어떻게 그리 쉽게 버릴 수 있나, 하며 살아왔기에 더욱 예상치 못했던 행동이었다. 내가 저지르고 나서도.


기억은 미화되기 십상인 것에 반해 물건들은 그렇지 않다. 편지든 일기든 선물이든 손에 잡히는 기억의 물리적인 조각들은 내가 지나온 시절들을 마디로 나누어 온전히 보여주었다. 너 이때는 이랬어, 저 때는 저랬고. 이때는 좀 추했던 날들이 많네. 오랜만에 펼쳐본 어릴 적 일기장에 담겨있는 생각에 깔깔 웃기도 하고 마음에 흠칫 놀라기도 하는 것처럼, 물건들도 그렇게 내 과거를 보여주었다. 뒤엎은 서랍에서 나온 것들을 바닥에 흩트려 놓으니 내 옛날을 전시해 놓은 꼴이었다. 여러분, 와서 여기 좀 보세요. 이 사람이 이런 사람이래요.


수집벽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릴 적부터 유독 버리기를 힘들어했다. 매 찰나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두 번 다시는 반복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언저리부터였던 것 같다. 너저분한 책상을 보며 엄마는 항상 잔소리했지만 내게는 턱도 없었다. 다만 머리가 크며 공간은 넓고 빌수록 더 많이 배우고 담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서, 어지러운 주변을 알아서 치우기 시작했다. 다시는 오지 않을 순간과 주변을 내 손으로 치워버리는 것이었지만, ‘지금’을 위해선 어느 정도 비워야 한다는 사실은 변함없었다. 필기구들을 새 필통에 옮겨 담고 쓰던 필통은 서랍 구석에 꾸겨 넣으며 미련을 보이지 않는 곳에 넣어두는 법을 배웠던 듯하다. 아쉬움을 덜 갖는 법, 미련을 오래 지니지 않는 법.


그렇게 친구들이 써준 편지도, 풋사랑이 사줬던 티셔츠도, 펜팔이 사줬던 팔찌도 전부 방구석 어디론가 사라졌다. 자주 읽어보던 편지였고, 가끔 괜히 냄새를 맡아보던 티셔츠였고, 자주 끼고 다니던 팔찌였다. 이제는 다른 친구들만이 남아있고, 풋사랑은 옛사랑이 되었고, 펜팔은 SNS 팔로우만 하는 사이가 되었다. 분명 비워야 더 채울 수 있기에 시야에서 훌훌 치운 것이 맞긴 한데, 그렇긴 한데. 비우는 법을 배우면서 다른 것도 버리고 정리하는 법을 같이 체득했다. 비울 줄 알게 된 것은 공간뿐만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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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최근에 한 대청소는 약 3년 전이었다. 독립하고 나서는 짐을 줄이는 게 나에 대한 예의이자 미래의 나를 위한 선택이었기에 물건에 대한 애착을 버리려고 무던히 애썼다. 그래도 쉽지 않았다. 독립하고 나니 더욱 힘든 것도 같았다. 엄마가 만들어 준 가방, 언니가 만들어 준 파우치, 친구가 사준 베개 등 소중히 다루고 두어야 할 것들이 많았다. 이 외딴 공간에는 비록 나뿐이지만, 내 삶을 목견하고 있는 사람들이 분명 저 벽 너머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들이었다. 적은 월세로 부지할 수 있는 공간은 턱없이 좁았던 것에 비해 버릴 수 없는 것들이 천지였다.


압축팩에 내 방을 집어넣고 힘껏 청소기로 빨아들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부피가 큰 느낌이었다. 아무리 버리고 버려도 이미 마음을 줘버린 물건들이 많아서, 종이 뭉치는 갈수록 높게 쌓였고 잡다한 것들은 질서 없이 쑤셔 넣어지고 욱여넣어졌다. 공간에 자신만의 규칙을 부여할 때 그 공간에 애정이 간다는데, 그런 규칙을 세울 틈도 없이 좁아서 나는 항상 내 방처럼 미간을 좁게 찌푸리고 살았다.


숨이 막힐 듯이 좁은 사방은 일상마저 성가신 세계로 바꾸기 시작했는데, 다행히 나는 삶을 미워하는 데에 천재가 없어서 결국 뭉그적거리다 온갖 옷을 갖다 버리고 별별 종이를 묶어 버렸다. 열심히 덜어내어 내 공간을 만들고, 그래야 뭐라도 들여놓고 싶은 생각을 하고, 그러면서 더 나를 챙기고, 더 윤택한 하루를 살아보고. 삶에 작용하는 연쇄작용은 꼭 사소한 것에서부터 시작되더라.


열심히 살아온 족적이었으나 과거의 흔적이 이쁘고 기특하다고 하여  지금의 ‘내’가 미간을 찌푸리고 있게 둘 수는 없었다. 많은 것을 내어버렸고, 숨이 트였다. 작은 것에 대한 애착이 나를 침몰하게 둘 수는 없으니까. 이렇게 버리는 것의 중요함을 돌연 다시 깨달았던 날이 20대 중반의 초시에 한 번 있었다.


뒤엎은 서랍과 책장에서 찾은 K가 줬던 가죽 지갑, 수많은 문장을 적고 낙서했던 드로잉북, 희곡을 공부하며 읽었던 논문들, 유럽에서 여행 다니며 썼던 선글라스, 인어 비늘 같은 귀걸이, C가 생일선물로 줬던 화장품, 더는 쓰지 않는 파우치 등을 버렸다. 저번 대청소 때는 차마 버리지 못했던 것들이었다. 삶의 한 계절을 정리한 셈이었고, 공간이 비었다. 비워진 직육면체는 더 많은 것을 담을 수 있게 되었다. 예를 들어 앞으로의 나날 혹은 H의 마음이 담긴 편지 같은 것들. 여행 채비와 닮기도 했고, 새해맞이 의식 같기도 했다. 새롭게 꾸려진 정식正式의 생활을 받아들이기 위한 일종의 의식 같은 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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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녔던 물건들을 마치 사건 현장의 증거처럼 여겼던 날들이었다. 치열하게 살아왔음을 보여주는 증빙자료, 뭐 그런 것. 생生에의 애착을 증명해 주는 것들. 여태 버리지 못했으나 이제 와 후련하게 버릴 수 있는 것은 아마 이제는 기억만으로도 사건을 증언할 수 있기 때문일 테다. 더는 그 시절을 물리적으로 잡아두지 않아도 오롯이 기억하고 있어서. 추억들이, 시절들이 스며든 게 지금의 나라서.


그 시절에 썼던 마음에 대한 예의를 이제야 버릴 수 있는 것도 한몫했을 테다. 어떤 심산으로 J의 팔을 베고 잤는지, 어떤 심정으로 H와의 여행을 거절했는지 지금은 면밀히 기억나지 않아도 당시의 마음들이 어여뻐서 소중히 대하던 것들이 있다. 다만 이유 모를 권태감이 들었던 그 토요일엔, 어쨌건 나는 여기에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데, 예쁜 것은 맞지만 더 귀엽고 소중한 것들을 담고 싶다는 욕구도 문득 치밀었을 뿐이다. 그래서 한밤 서울 대로변을 같이 걸었던 Y가 건네준 목걸이도 쉬이 버릴 수 있었다. 물리적인 파편 따위는 갑자기 무용하게만 느껴져서. 정말 그 시절의 너와 나에게 더는 미련이 없어져서. 어쩌면 권태감이 아니라 마음이 뜬 것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아무 일정도 없어 느긋했던 한낮이 순식간에 지나간 토요일이었다. 3년 만의 대청소였다. 내다 버린 옷과 종이, 봉투들은 주말이 지나면 수거될 예정이다. 내 삶의 잉여를 버린 것인지 내 몫을 버린 것인지 조금은 헷갈렸지만, 그래도 내 몫은 챙길 만큼 다 챙긴 것 같아 적당히 후련했다. 먹잇감을 한입에 삼킨 뒤 오랫동안 소화하는 뱀처럼, 오랜 기간 서랍에 넣어둔 채 기억의 영양분을 힘껏 흡수한 것 같달까. 이별이 후회되는 물건이 하나도 없었다. 앞으로 수집할 계절의 조각들은 어떤 모양일지, 어떤 서사로 전시될지 예측할 수 없지만, 아무렴 어떻겠는가 싶다. 서툴지만 잘 비우고 잘 담을 수 있으리라 믿는다. 지난 토요일처럼.


 

저 나무상자에는

오래 열어보지 못한 편지들이 있고

열어보지 못하는 것은 찢을 자신이 없기 때문이고

찢을 수 없는 시간에 대한 예의를

아직은 완전히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 번도 제대로 알 수 없었던,

그걸 찢는 순간에야 비로소 이해하게 될

편지들

 

- 나희덕, <찢다>, 《가능주의자》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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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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