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보편적이기에 찬란한 우리 [영화]

영화 「벌새」를 보고
글 입력 2023.05.27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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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극으로부터의 탈피


 

가끔 친구들끼리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도파민 중독자’라는 말을 쓰곤 한다. 우리의 일상을 둘러싼 대부분의 문화 콘텐츠가 자극으로 점철되어 있고, 또 사람들은 그것을 쉽게 접하며, 깊은 사고 없이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을 반복하면, 조금이라도 심심하거나 조용한 콘텐츠는 멀리하고, 계속해서 자극적인 것들만을 갈망하게 된다. 말 그대로 마치 뇌가 도파민에 지배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 나 역시 상당히 쾌락주의적이고 지루한 것을 견디는 걸 상당히 어려워한다. 그런데 일종의 질량 보존 법칙이라도 존재하는 건지, 다행스럽게도 특정 시기마다 무의식적으로 자극적인 콘텐츠를 기피하고 잔잔한 것들을 찾으려고 한다. 그래서 이럴 때마다 가능한 가장 차분하고 성격의 콘텐츠를 즐기려고 의도한다. 이 기준을 충족하는 문화생활 중에서 접근성이 좋은 것이 내게는 바로 독립영화였다. 영화 「벌새」도 이러한 계기로 시청하게 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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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새」를 보고 난 후에는 살짝 당황스러워했던 기억이 난다. 그 이유는 뭐랄까,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으나 그 예측치보다 훨씬 잔잔하고 밋밋했다고 해야 할까. 극적인 장면도, 감정이 절정에 달하는 부분도, 줄거리 상의 반전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너무나도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처음에는 이 작품이 굉장히 심심하게 느껴졌고, 그래서 감상을 끝낸 직후에는 “그래서 이 영화가 주는 메시지는 뭐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늘 그랬듯, 뒤늦게 찾아오는 여운이 무섭기 마련이다. 영화 「헤어질 결심」의 대사를 약간 응용하자면, 감정이 파도처럼 덮치는 작품이 있는가 하면, 물에 잉크가 퍼지듯이 서서히 물드는 작품이 있는데, 「벌새」의 경우는 후자이다. 얼핏 보면 평범하고 밍밍한 영화처럼 보여도, 그러한 특성만이 선사하는 고유의 매력이 존재한다. 후술할 것들은 내가 생각하는 이 작품만의 가치들. 다소 주관적인 의견이 포함되어 있으니, 참고 바란다.

 

 

 

01. ‘은희’라는 주인공이 주는 공감


 

문화예술, 특히 드라마, 영화와 같은 영상매체가 많은 이에게 오랫동안 기억되고, 사랑받기 위한 조건이 뭐라고 생각하는가? 나는 그것을 ‘공감’이라고 본다. 우리는 공감을 기반으로 세상을 이루는 모든 것들과 소통하며 살아간다. 영화 역시 마찬가지이다. 한 영화가 지니는 요소에 관객들이 공감하고, 그 공감을 바탕으로 영화에 이입하며 능동적인 반응을 끌어낼 수 있어야 비로소 대중들 기억 속에 각인되는 것이다.


「벌새」는 이 공감이라는 요소를 십분 활용했다. 우선 14살 중학생 ‘은희’라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설정한 점이 위 과정을 불러일으키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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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누구나 한 번쯤 소년기를 겪는다. 소년은 미성숙하다. 그렇기에 가장 급격하게 성장하는 시기이며, 또 그만큼 성장통을 가장 크게 겪는 때이기도 하다. 이는 시대를 불변하고 모두가 겪는 과정이기도 하다. 김일성이 죽었을 때, 성수대교가 무너졌을 때를 직접 겪어보지도 않은 내가 은희에게 공감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런 불안정한 존재라는 요소 때문. 그래서 본 영화는 다들 살면서 대개 거치게 되는 청소년, 그리고 소년의 시각을 통해 누구든지 꼭 경험하게 되는 사춘기 특유의 경험, 아픔, 기억 등을 그려냄으로써 많은 이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주인공을 청소년으로 설정한 것 외에도, 우리가 이 작품에 공감할 수 있도록 의도된 장치가 하나 더 있다. 바로 은희의 캐릭터성.


은희는 특별함과는 거리가 먼, 주변에서 쉽게 볼 법한 평범한 여자아이다. 학창 시절 반에 늘 있던 그저 ‘보편적인’ 학생. 그리고 은희라는 인물이 갖는 이 ‘보편성’은 관객이 은희의 감정과 사건, 그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세상을 쉽게 이해하도록 만든다. 이를테면 절친과의 싸움, 남자친구로부터 이별, 일탈, 그리고 그것을 들켰을 때의 수치심과 가족 내의 무관심, 가정 내의 보이지 않는 폭력 같은 것들. 우리는 영화 속 은희가 겪는 사건을 거의 한 번쯤 겪어봤고, 그렇기에 영화는 딱히 사람들로부터 이해를 갈구하지 않고 그저 은희의 시점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가감 없이 풀어나가는 것만으로 많은 지지와 공감을 도출해 낸다.

 

 

 

02. 사랑은 사람이 성장하게끔 한다


 

앞서 잠깐 이야기했듯, 은희는 영화 내내 다양한 인간관계로부터 좌절과 상처를 입는다. 특히 가족 내에서는 사고를 저지르고 다니는 언니 ‘수희’와 모범생인 오빠 ‘대훈’에 밀려 관심을 받지도 못한다. 대훈으로부터 일방적인 폭력을 당했음에도, 이를 알리자 그저 ‘너희 싸우지 좀 마’라고만 하며 넘어간다. 한창 사랑받고 자라야 할 시기의 은희가 무관심이라는 은근하고도 가혹한 가해 속에서 지내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장면.


이 외에도 도둑질을 들켜 위기를 맞이한 순간에 자신의 위험을 외면한 절친 ‘지숙’과의 싸움, 처음에는 좋다고 표현했다가 갑자기 은희를 모르는 체하며 마음의 변화를 드러내는 후배 ‘유리’, 남자친구와의 헤어짐 등 은희의 내면세계는 바람질 날이 없다. 그의 주변에는 오로지 절망과 분노, 슬픔만이 가득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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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 은희는 한 어른을 만나게 된다. 한문 선생님인 ‘영지’는 영화 속 거의 유일한 긍정적 어른으로 그려진다. 영지는 은희에게 진심 어린 애정을 보인다. 열렬하진 않아도 변덕스럽지 않고, 그래서 더욱 안정적인 형태의 관심. 공부를 열심히 하는지, 비행을 일삼는 소위 ‘불량아’는 아닌지 등 표면적인 모습 말고, 은희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슨 일이 생겼는지 등 그에게 꾸준하고도 은은한 주의를 기울인다.


이러한 형태의 마음은 은희가 성장하는 발판이 되어준다. 지숙과 다투고 온 날에 차를 끓여준다던가, 그림을 좋아하는 은희에게 스케치북을 선물한다던가, 자기가 불쌍해서 잘해주냐는 은희의 말에 ‘바보 같은 질문에는 답 안 해도 되지?’라고 답해주는 등 그가 은희에게 보이는 모든 말과 행동에는 과장과 편견 없이 오로지 따스함이 드러날 뿐이다.


그중 병원에 입원한 은희에게 ‘너 이제 맞지 마. 누가 널 때리면, 어떻게든 맞서 싸워.’라고 말을 해주는 부분은 은희가 성숙한 사람으로 발돋움할 수 있게 해준 결정적인 장면이다. 이 일을 계기로 은희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상황에 더 이상 참지 않고, 자기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진다. 또한 이를 끝으로 타인에게 계속해서 애정을 갈구하지도 않는다. 한 어른의 사랑이 불안정한 어린 자아에 얼마나 큰 힘이 되어줄 수 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부분.

 

 

 

03. 미지근하지만 그렇기에 강렬한


 

계속해서 말하지만, 본 영화는 자극적인 장면이 거의 없다시피 하다. 아니, 아예 없다고 봐도 무방한데, 이는 영화가 관객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에도 해당한다.


영화는 영지가 은희에게 하는 행동을 통해서 시청자에게 자신의 의도를 전달하려고 한다. 은희에게 쓴 편지가 대표적인 예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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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사는 것이 맞을까?

어느 날 알 것 같다가도 정말 모르겠어.

다만 나쁜 일들이 닥치면서도 기쁜 일들이 함께한다는 것.

우리는 늘 누군가를 만나 무언가를 나눈다는 것.

세상은 참 신기하고 아름답다. 

학원을 그만둬서 미안해.

방학 끝나면 연락할게.

 

- 영지가 은희에게 보낸 편지
 


영화의 수많은 장면 중에서 특히 이 편지는 곱씹을수록 내면으로 서서히 스며들었는데, 아마 이 편지의 내용이 영화가 관객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여기에는 특별한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다. 대단한 사람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악한 사람도 없다. 그것은 주인공 은희와 영지도 마찬가지이다.


어쩌면 이렇게나 보편적이고 복합적인 군상의 생활이 과장되지 않도록 그려냄으로써 이러한 속내를 드러내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을 한다. 계속해서 일어나는 부정적 상황 속에서 영지라는 인물과 만나게 된 은희처럼, 우리가 맞닥뜨리는 세상은 나쁜 일들이 닥치면서도 동시에 기쁜 일들이 함께한다는 것, 그렇기에 세상은 아름다운 것이라고 전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살아가면서 불행 속에 빠지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하지만 그 안에서 희망과 행복 역시 공존하기에, 우리는 절망 속에 침수되지 않고 계속해서 일상을 살아갈 힘을 얻는다. 영화는 은희를 통해 이 사실을 상기시켜 주는 것 같았다.


삶이란, 누군가를 통해 다양한 감정들을 나누는 것, 그렇기에 우리는 성장할 수 있는 존재이고, 그렇기에 세상은 아름다운 것. 어쩌면 이런 뻔해 보일 수도 있는 사실을 되새김으로써 다시금 일상을 덤덤하게 이겨낼 힘을 얻는다.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살아가는 모든 벌새에게, 그리고 또 다른 은희에게 이 작품을 조심스럽게나마 추천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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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승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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