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삶에 적응하면 공허를 안을 수 있을까 - 리턴 투 서울

내가 공허를 안은 줄 알았는데, 공허가 날 안고 있으면 어쩌지.
글 입력 2023.05.09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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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턴 투 서울>은 우연히 자신이 태어난 서울로 리턴한 25세 ‘프레디’, 어쩌다 한국 부모를 찾으면서 시작된 어쩌면 운명적인 여정을 담은 2023년 우리가 열광할 완전히 낯선 영화. 캄보디아계 프랑스인으로 프랑스 영화계를 이끌 차세대 주자로 떠오른 데이비 추 감독의 신작이며 프랑스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국계 아티스트 박지민의 첫 배우 데뷔작이다.


실제 한국 입양아 친구와 한국 가족을 만난 경험을 바탕으로 <리턴 투 서울>의 각본을 완성한 감독은 “’나는 누구일까?’라는 질문에 남들이 정해 놓은 틀에 맞추기보다 스스로 저항하며 정체성을 찾아가는 여성의 이야기”라며 주인공 ‘프레디’에 대해 “그녀는 관객들이 기대하는 여정과 정반대되는 선택을 하며 스스로 진화한다.”고 설명했다. 영화의 대부분이 한국에서 촬영되었으며 오광록, 김선영 등의 연기파 배우들이 ‘프레디’의 한국 가족으로 출연해 현실적인 열연을 펼쳐 탄탄한 완성도와 흥미로운 볼거리를 자랑한다.


2022년 칸국제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초청을 시작으로 2022 LA비평가협회 뉴제네레이션상, 보스턴비평가협회 작품상, 아테네국제영화제 작품상, 아시아태평양스크린어워즈 신인 연기상과 감독상 등을 수상했으며 일찌감치 2023년 아카데미 국제영화상 예비 후보와 인디펜던트 스피릿 어워즈 국제영화상 후보에 이름을 올려 화제를 모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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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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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주인공 프레디가 계획 없이 들른 한국 게스트 하우스의 프론트에서 헤드셋으로 한국 음악을 듣고 있는 테나를 만나는 것으로 시작된다. 테나가 듣고 있는 음악이 궁금해 테나의 헤드셋을 빌려 듣고, 개구지면서 의미심장한 웃음을 짓는 그녀는 거칠 것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녀가 한국에 당도한 이유부터가 계획된 도쿄 여행을 기상 상황이 가로막은 것이었으니 그녀가 거칠 것은 사실 이제부터 시작인가 싶기도 하다.

 

태풍으로 결항된 도쿄행 비행기 대신 승무원이 권한 서울행 비행기를 탄 프레디는 어릴 적 한국에서 프랑스로 해외입양이 된 한국계 프랑스인이다. 프랑스어 교사인 어머니를 두어 프랑스어에 능통한 한국인 테나와 프레디는 스스럼없이 친해진다. 테나는 한국어를 전혀 모르는 프레디를 위해 잠시 동안 프레디의 말을 담당해 준다. 비록 배려심 깊고 조심성 있는 테나가 프레디나 대화 상대의 모든 말을 그대로 옮겨주지는 않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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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나와 그 친구로부터 해외입양 기관 하몬드를 알게 된 프레디. 처음에는 친부모를 찾을 생각이 없었으나 그녀는 하몬드를 찾아가 친부모 찾기를 시도해 본다. 흔히 예상할 수 있는 바와 달리 하몬드를 찾아가는 프레디의 발걸음은 특별히 무겁지도 않고 표정에는 이렇다 할 괴로움이나 떨림이 없다. 일견 그녀의 태도는 지도를 들고 특정 장소를 찾아가는, 그저 길을 찾는 데 열중한 관광객 같기도 하여 나는 극장에서 조금 당황했던 것 같다. 물론 그녀는 한국에 어쩌다 오게 된 관광객이 맞긴 맞다.

 

그래도 친부모를 찾는다는 중대한 문제 앞에 서 있는데, 주인공이 고뇌나 애증 한 점 잘 보이지 않는다는 데서 다소 낯설었던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데에는 미디어에서 해외입양아동의 이야기를 보여주는 방식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과거에 봤던 한 영화의 장면 장면이 이 사고에 영향을 준 것 같다. 한국에서 태어나 벨기에로 입양되었던 융 헤넨 감독의 자전적 애니메이션 영화인 <피부색깔=꿀색>을 인상 깊게 봤었다. 거기서 감독의 어린 시절을 담은 주인공은 사춘기 즈음 자신을 버린 한국을 증오해 일부러 일본 문화에 자아를 의탁한 시기를 보내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가 무의식적으로 그리던 그림에는 어릴 적 한국에서 본 탈춤이 들어가 있었다. 그에게 한국은 증오와 분노, 배신감의 대상이었다가 애증의 대상이 되었고 나중에 어른이 된 그는 자신을 버린 어머니의 어려웠을 처지를 상상하며 증오를 해소한 채 자신의 배경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한다.

 

나는 프레디 역시 친부모 찾기를 시작할 때 복잡한 심경을 보일 거라고 예상했던 것 같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다르다. 해외입양의 배경이 있다고 해서 한국이나 친부모에 대한 감정이 다 같을 수는 없는 것이다. 프레디에게는 프레디만의 유년과 풍족함 또는 결핍이, 그리고 프레디만의 기질이 있으니.

 

한국에 오기 전까지 그녀에게 한국이 어떤 존재감을 가졌는지는 하몬드에서 꺼낸 사진 한 장에서 엿볼 수 있다. 프레디가 가진 한국의 흔적이라곤 달랑 어릴 적 사진 한 장과 그 사진 뒤에 쓰인 한국 이름 연희일 뿐이다. 같이 찍힌 여성이 어머니인지도 확실치 않다. 사진 뒤에 알파벳으로 적힌 연희라는 이름조차 프랑스어 발음으로 읽어 욘애인 줄 알고 살아왔다. 연희라는 이름의 발음 정도는 알아보려면 알아볼 수 있었을 텐데 그녀에게는 그게 그리 중요치 않았던 게다. 그녀에게는 프레디라는 이름이 있고 그 이름으로 그 기억으로 쌓아 온 프랑스에서의 인간관계와 문화, 추억이 있다. 그녀는 자신의 말대로 ‘나는 이제 프랑스 사람’인 것이다. 서구 국가에서 동양인의 얼굴로 살아온 그녀가 정체성 혼란을 겪었는지까지는 영화가 비춰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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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우리가 목격할 수 있는 프레디의 혼란은 친부와 친부의 가족을 만나면서부터 시작된다. 그녀가 가진 한국의 흔적이란 사실 사진 한 장뿐이 아니었다. 그녀는 술집에서 처음 만난 다른 테이블의 한국인 손님으로부터 토종 한국인 얼굴을 하고 있다는 말을 듣기도 한다. 테나는 이에 대해 네가 조상으로부터 온 얼굴을 하고 있다고 부연해준다. 그 얼굴로 대변되는 그녀의 몸, 그 몸 안에 흐르는 피는 결국 한국의 친부모로부터 왔다.

 

군산에 있는 친부의 집에서 사흘 묵게 되는 프레디는 한국말과 한국 문화, 그리고 자신은 가지지 못한 기억들에 둘러싸이게 된다. 도시에서 살고 싶어 한 친모와 그렇지 않았던 친부의 의견 차이로 부부가 헤어졌고 친부 혼자 아이를 키울 수 없어 연희를 해외로 입양 보냈다는 이야기를 프레디는 듣는다. 살다 보면 온갖 일이 다 있다지만 지금은 재혼을 하고 자매 둘을 더 낳아 키우고 있는 친부의 모습이 다소 아이러니했다. 그리고 친부의 아내가 자연스럽게 혼자 과일을 깎아 오는 모습 등에서 집안의 가부장적인 분위기도 얼핏 느껴졌다. 그런 점에서 친모가 도시에 살고 싶다 말한 데에는 더 여러 의미가 깔려 있지 않았을까 상상해 보기도 했다.

  

프레디의 손을 잡고 울면서 기도드리는 할머니의 모습, 이제 다시 이렇게 우리가 만났으니 프레디가 한국에서 함께 살며 한국남자와 결혼하기 바라는 친부, 뜻은 통하지만 많은 디테일이 탈락되기 일쑤인 고모의 영어 통역. 모든 것은 낯설고 어색하기만 하다. 프레디에게는 그 문화 차이와 기억이라는 정보량의 차이가 기이하기까지 했을 것이다. 군산을 떠날 때 친부가 사준 플랫슈즈를 산에 버리고 오는 것이 프레디의 심경을 보여준다.

 

한국어도 배우고 같이 살자는 친부에, 프레디에게 반해 프랑스로 돌아가지 말라고 애걸하는 또래의 한국인 남자까지. 한국은 갑자기 그녀를 붙잡는 것처럼 보인다. 이에 프레디는 이렇게 말한다.


버릴 때는 언제고 이제는 가지 말라는 거야?


그리고 자신에게 반한 남자에게 일부러 상처를 주고 좋은 음악이 흘러나오면 남의 시선도 관여치 않고 즉흥적으로 춤을 춘다. 프레디의 춤동작은 딱히 어떤 장르의 움직임이나 특정한 안무를 따라한 것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그때그때 펼쳐지고 바뀌는 박자와 운율에 따라 몸을 움직이는 것으로, 차라리 행위예술 같이 보일 때가 더 많았다. 프레디가 한국에서 누군가의 통역 혹은 문화적인 차이라는 장애물을 거치지 않고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마 음악뿐일 것이다. 그녀는 삶을 시주, 낯선 악보를 갑작스레 보고 연주하는 일이라고 느낀다. 갑자기 맞이한 음악이지만 순간순간 적응하며 연주를 해야 한다. 그것이 어찌 흘러갈지를 즐기는 게 그녀의 몫이다.

 

음악이 다른 예술과 크게 다른 점은 보존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악보가 있지 않냐고 할 수 있지만 악보는 음악의 기록이지 그때그때 연주되고 실시간으로 감상되는 그 곡 자체가 아니다. 물론 녹음 기술이 있지만 음악은 매번 연주할 때마다 다르다. 그렇다고 판화의 에디션처럼 어디에 물리적으로 고정되지도 않는다. 몸 안에 분명히 들어왔다가 그 사람의 내면을 흔들고 지나가는 음악은 어느새 빠져나간다. 프레디에게 시주의 삶도 그런 의미였을까.

 

자신은 다른 사람 마음에 쑥 들어갔다 나오지만, 그 사람의 마음이 어떤지는 자기 몫이 아니며 크게 진지하게 여기지도 않는 프레디의 태도에 화가 난 테나는 자신에게 입 맞추려는 프레디에게 이렇게 말한다.


넌 딱한 아이 같아. 


누구나 가슴 속에 내면아이를 품고 살아가지만 프레디의 내면 아이, 아니 슬픈 내면 아이는 확실히 한국에 온 뒤에 눈을 떠버린 측면이 있다. 속일 수 없는 공허, 하룻밤 불장난으로 덮어버릴 수 없는 공허가 수면 위로 올라와 버렸다. 프레디는 읽을 수 없는 한글 문자를 쏟아내듯 보내고 자신의 숙소 앞까지 찾아올 만큼 집착하는 친부의 모습에 친부에게 최악의 인상을 갖고 한국을 떠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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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뒤 프레디는 의외로 한국에 돌아와 살고 있었다. 다시 한국에 돌아와 거주하고 있을 때 프레디의 모습은 방황하고 방탕하게 노는 사람 그 자체였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과 즉석만남을 가지기도 하고 파티에서 마약을 즐기기도 한다. 친모는 여전히 프레디의 연락을 거부하고 있고 그것이 그녀의 공허를 배가시킨 듯 보인다. 메일함에는 친부가 간간이 보내는 메일이 쌓여 있다. 프레디는 메일을 보긴 하지만 답은 하지 않는다. 이 시기 알게 된 무기회사의 무기상 한 명과 연락해 프레디는 새로운 직업을 갖게 된다. 


또 다시 시간이 지나고, 이제는 환각제가 있는 파티와 무분별한 만남과는 거리가 멀어진 듯 보이는 프레디가 다시 한국에 온다. 이번에는 회사의 출장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이제 그녀는 매연 가득한 파티 대신 명상과 채식으로 내면의 평화를 챙긴다. 옆에는 신뢰하는 파트너 막심이 있다. 다시 만난 아버지와는 이제 정상적인 연락을 주고 받는 사이가 되었고, 아버지의 모습이 사진보다 젊어 보여 이상하게 느끼기도 한다. 어쨌든 아버지가 프레디의 마음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친부는 자기가 지은 곡의 몇 소절을 프레디에게 들려준다. 짧은 연주지만 그 음악은 프레디의 마음 어딘가를 건드린 듯하다. 음악은 듣는 사람의 몸을 한번 사로잡았다가 몸에서 빠져나간다. 음악은 그 사람의 몸을 지나쳐가지만 음악과 그녀가 조응해 생긴 감정은 몸 안에 남는다.


비었던 곳이 갑작스레 채워지면 외려 아직 빈 곳이 더 생생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자신을 급히 보내버리는 아버지의 모습 때문인지, 아니면 아버지에게 정이 들어버렸다는 사실에 만감이 교차해서인지 프레디는 자신의 곁을 지켜준 막심에게 상처를 주며 자해한다. 프레디를 급히 보내는 생부의 모습은 내일 출근을 앞둔 자식을 급히 귀가시키는 여느 부모의 모습 같기도 했지만 문제는 또 두 부녀의 감정의 축적에 큰 차이가 있었다는 점이다. 프레디는 이제 겨우 생부를 자기와 관계된 사람으로, 자기 친부로 받아들이고 있는 단계인데 프레디의 생부는 프레디를 여느 평범한 관계의 자식 대하듯 급히 떠나보낸 것이다. 함께 시간을 보낸 부모자식 사이에도 시차가 생길 수 있는데, 이 둘의 사이는 어떻겠는가. 프레디는 이 만남으로 간신히 찾았던 평화를 무너뜨린다.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커다란 와해이다. 프레디의 말대로, 한국은 프레디에게 해롭다. 

 

프레디는 다음날 아침 역 앞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풍경을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지켜본다. 프레디의 눈으로 본 한국의 모습은 낯설음과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라는 분위기가 뒤섞여 있다. 그때 생모로부터 만나고 싶다는 연락이 온다. 

 

본래 기관에서는 친부모에게 세 번이 넘는 연락을 할 수 없지만 프레디의 사정을 아프게 여긴 직원 누군가가 생모에게 여섯 번의 연락을 한 것을 알게 된 프레디다. 생모의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프레디는 그저 눈물을 흘린다. 마음속 응어리 일부가 눈물로 녹아 비로소 흘러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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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로 프레디의 공허는 채워졌을까? 적어도 일 년 뒤 프랑스도 한국도 아닌 제3국을 여행 중인 프레디는 자기가 싫어하던 생일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게 된 것 같다. 자신은 행복하다는 프랑스어 문장을 번역기에 돌려 한국어 문장으로 만든 뒤 생모의 메일 주소로 보내기도 한다. 

 

그러나 행복을 인정한 선언은 갈 곳이 없어져 버렸다. 생모가 준 메일 주소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뜬다. 아마도 일 년간 연락이 오고 가지 않은 메일이니 원래도 프레디와의 만남에 방어적이었던 생모가 메일 계정을 지운 것이 아닐까. 프레디는 존재하지 않는 메일 주소라 뜬 화면을 말없이 바라본다. 

 

역시 즉흥적으로 하루 묵기로 한 호텔을 빠져나갈 듯이 움직이던 프레디의 시선 끝에 걸린 것은 피아노와 그 위에 놓인 악보이다. 그녀가 영화 앞부분에 시주를 언급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시주를 보여줬다면, 영화는 프레디의 실제 연주로 끝을 보여준다. 호텔 로비에 놓인 피아노의 검고 하얀 건반을 누르며 처음 본 악보를 묵묵히 연주하는 프레디. 

 

음악의 물결 위를 수생식물처럼 흘러가며 즐기던 그녀였다. 그러다 생부의 음악 몇 소절이 그녀 몸 안에 무언가 남겨 놓고 가기도 했다. 그것은 마음속에 뿌리 내리는 조그마한 정이었다. 공허는 조금 채워질 때 그 전체가 더 생생히 느껴진다. 그녀는 그것을 잘라내고 싶어했다. 마음만 먹으면 널 지울 수 있다며 남에게 대신 상처주는 것으로.

 

그런 그녀도 시간이 흘러 흘러 마음의 평화를 받아들이고 행복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행복을 인정한 순간 행복은 몸 누일 곳이 없어지기도 한다. 갑자기 행복이 허상이 된 것만 같은 그 순간에 그녀는 처음 본 악보를 연주한다. 처음 본 악보에 적응하는 것은 그녀가 갖고 태어나 갈고 닦은 능력이다. 


시주, 그 적응이 허함을 메워주기도 할까.


그녀 마음 머무를 곳 찾아줄 수 있을까.  

 

사람이 공허를 누리게 될 수도 있을까. 

 

공허를 누린다는 건 공허를 끌어안을 수 있게 되었다는 뜻 자체가 아닐까. 살면서 공허를 포용한 줄 알았더니 공허가 나를 다시 안고 있는 형국이면 어쩌지. 여러 질문이 한 덩어리로 섞여 끌려나오는 감각에 착잡함과 쓸쓸함, 그리고 같은 인간으로서 응원의 감정을 느끼며 극장을 걸어 나오게 되는 영화, <리턴 투 서울>이었다.

 

 

[신성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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