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다시 마주하는 여기, 우리, 최은미 '여기 우리 마주' [도서/문학]

우리는 그 시절을 제대로 마주하고 있을까?
글 입력 2023.05.05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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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시작하며


 

2019년 최초 감염 사례 보고를 시작으로 현재 2023년까지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가 유행중이다. 현재 마스크 의무 착용이 해제되면서, 더는 코로나가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만 같다. 하지만 매일 코로나 확진자와 사망자 수는 늘어나고 있고 변이된 바이러스 소식도 들려온다. 사람들은 더는 예전처럼 늘어나는 확진자 수에 반응하지 않는다. 하지만 코로나 팬데믹은 아직까지도 우리의 삶과 생각에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이를 완전히 뒤바꾸어놓았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을 코로나 이전의 세계를 그리워하다가, 그 이전을 상상하기가 더는 어려워졌다는 걸 깨닫곤 한다.

 

가끔 코로나가 한창 확산되던 초창기의 그 냉혹한 분위기가 떠오른다. 그때와 지금은 분명히 달라졌지만, 우리는 정말 그 시기를 통과한 게 맞을까? 그 때가 단순히 우리를 통과하도록 내버려둬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그 시기는 모두에게 힘들었지만, 유독 더 가혹하게 그 시기를 견뎌야했던 이들이 있었다. ‘우리’를 나누고 가르고, 배제하고 고립시키던 그때를 다시 상기해보고자 이를 배경으로 한 소설, 최은미 작가의 <여기 우리 마주>를 읽어보고자 한다.

 

 

 

우리



이 작품은 우리가 겪었던 2020년의 봄을 보여준다. 우리는 그 시기를 통과했으나 완전히 통과하지 못했다. 우리는 여전히 코로나 시국 속에 있다. 우리는 같은 시간을 지나고 있지만, 그 시간이 모두에게 같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가 겪었던 시국은, 같은 것”이 아니다. 우리가 경험한 시국은 시간적으로는 같지만 전혀 같지 않았다. 바라는 안전도, 느끼는 위험도 전부 다 달랐다. 서로에게 와닿는 불안감이 무게감이 전혀 달랐다. 그래서 작품을 읽다가 ‘우리’에 친근함을 갖다가도 어느 순간 멀어지고 만다. 우리는 ‘우리’가 결합의 뜻도 있지만, ‘배제’와 ‘고립’이 포함될 수 있다는 점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읽을수록 고립되는 것은 우리가 아니다.

 

코로나 시국 속에서 우리는 아주 많은 사람들을 묶고 가려왔다. ‘○○번 확진자’의 집단으로, ‘밀접 접촉자’로. 직계가족과 아닌 자들로. 기침하는 사람을 꺼리고, 이 시국에 무언가를 하려는 사람들을 선을 긋거나 멀리하거나 가까이했다. ○○번 확진자라는 이름은 익명성을 갖지만 동시에 확진자라는 것을 알림으로써 가시성을 갖는다. ‘우리’로 누군가를 묶었을 때 그들은 고립되는 동시에 타인을 고립시키고 배제되고 배제한다. ‘우리’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 우리는 그들이 어떤 문제를 겪는지 그들과 나의 시국이 같은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누가 그들을 나누었고 그들은 어디에 있을까.


 

이 작품은 일종의 재난 서사이다. 하지만 재난 서사가 지니고 있는 한계, 말하자면 재난이 원인이자 결과로써만 작동하는 플롯을 뛰어넘는 윤리학적 질문을 내장하고 있다. 우리 사회에는 이미 재난을 겪고 있던 사람들이 있지 않았는가, 하는 것. 그 재난을 우리는 왜 보지 못했던 것인가? 그 먼저 온 재난이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았던 이유는 아마도 “내가 자기랑 은채를 굶기는 것도 아니잖아”라는 태도처럼 선의를 가장한 배제가 완강하게 작동되고 있었기 때문일 터이다. 최은미의 소설이 놀라운 것은 그 배제를 이분법으로 편 가르지 않고, 배제 안에서 또 다른 배제와 혐오의 연원을 묻고 집요하게 가시화했다는 점이다. “안간힘을 쓰다가, 어느 날은 그냥 호스를 놓쳐버”리는 마음마저 고백한다는 점이다.

 

(이기호, 심사평, 『여기 우리 마주(2021 제66회 현대문학상 수상소설집)』, p.297)

 


은채의 물건을 정리할 때 중고 물품을 사갔던 그 많은 여자들은 어디로 갔는가. 도대체 “다른 여자들처럼. 그냥 좀 편하게 살면 안 돼?” 속 ‘편하게 사는 여자들’은 어디에 있을까. 그 언어로만 단어로만 존재감을 드러내는, 빈번하게 발화되지만 실체는 찾기 어려운, “남편과 노동을 나누기 위한 싸움을 시작하기도 전에 에너지를 뺏긴 채로 ‘행복한 아이를 키워내는 다른 여자들’과 ‘편하게 사는 다른 여자들’을 가위눌리듯 떠올리”게 하며 존재감을 드러내서 '나'를 잠들지 못하게 하는 여자들은 어디에 있을까? 작품 속 ‘우리’들은 끝없이 실체가 없는 ‘편하게 사는 여자들’의 존재를 믿으며 그것을 경계하고 자신을 대어보며 자신이 어떤지 검열하고 여자들 속 누군가를 배제하고 혐오하며 또 다시 자기 혐오에 빠지고 고립된다.

 

 


여기



작품 속 ‘여기’는 익숙하다. 우리가 지나온 4월과 5월이 그대로 묘사되어있기 때문이다. 작품은 그러한 시국의 모습을 잘 담아내고 있지만, 제목의 ‘여기’는 단순히 시국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는 주인공 ‘나’가 존재하고 살아가고 있는 ‘나’의 일상과 공간들이다. 동시에 코로나 상황 속에서 일과 가사 육아를 모두 감당해야하는 기혼 여성의 위치일 수도 있겠다. 

 

가부장제 사회 속 가정 내 여성들에게 재생산노동이 전적으로 맡겨진 역사는 길다. 현대는 과거와는 양상이 달라지긴 했지만, 여전히 맞벌이이든 아니든 여성이 육아와 가사노동을 책임지고 감당해야하는 구조는 여전하다. 주인공 ‘나’는 공방 일과 육아와 가사를 모두 수행하고 있다. ‘나’ 뿐만 아니라 수미 역시도 그렇다. 주인공은 공방샘이자 아내이자 엄마이고, 수미는 차량운전기사이자 차량보조 선생님이자 아내이자 엄마다. 그런 주인공에게 집은 휴식의 공간이 아니라 또다른 노동의 공간이다. 


 

혼수로 샀던 그릇 세트의 반을 치우고 그 자리에 캔들 용기를 채워 넣던 날은 남편이랑 좀 다퉜던 것 같다. 팔려고 내놓은 식기를 보고는 남편이 기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소파가 있던 거실이 그립다고. 오일 향 때문에 머리가 아프다고.

 

“집에 와도 쉬는 기분이 안 들어.”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남편한테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 실제로는 쉬면서 쉬는 ‘기분’이 안 든다면 그건 진정으로 쉬는 게 아니지 않은 거 아닐까? 나는 남편이랑 얘기를 하면서도 머릿속으로 슬래시를 돌리는 버릇이 있었는데 그때도 그랬을 것이다. 비누 베이스 추가 주문/공기청정기 연락/양파/두부/우유/지퍼백/은채 이비인후과/싱크대 하수구 검색/비누 설거지 전에 저녁 설거지 끝내기/남편 쉬는 기분 들게 해주기.

 

그렇게 슬래시를 돌리고 있었을 뿐인데 남편은 내가 자기 말을 귓등으로 듣는다고 생각했었나 보다. 그동안 너무 궁금했었다는 듯, 남편이 나한테 이런 질문을 연이어 하는 것이었다. 자기야, 자기 혹시 캔들 왁스 젓던 주걱으로 애 볶음밥 해주는 거 아니야? 자기야, 실리콘 몰드 데우던 헤어드라이어로 애 머리 말리면 해로운 거 아니야? 자기야, 가성소다 풀면 연기가 막 나는데 애 호흡기에 안 좋은 거 아니야? 나는 적극적으로 남편을 안심시켰다. 자기야! 걱정 붙들어 매! 안 해로워, 안 해로워! 니가 묻혀오는 니코틴이 백배는 더 해롭지!

 

(최은미, 「여기 우리 마주」 中)

 


홈공방을 시작한지 2년쯤 되었을 때 집안 물건과 공방 물건이 뒤섞이자 남편은 쉬는 기분이 들지 않는다고 말하며 나에게 질문을 쏟아붓는다. 집이라는 공간은 주인공에게 휴식의 공간이 아니라 육아와 가사, 일이 모두 합일된 노동의 공간이다. 어떠한 이유 때문인지 확실하게 나오지는 않지만 금전적인 이유 때문에, 또 전문성과 특수성이 없는 가사노동에 시달리며 자신을 잃어갈 때 자신으로 존재하기 위해 일을 병행하기 시작하고, 그 비중이 늘어나고, 쉬는 기분이 들지 않는다는 말을 제대로 듣지 않는 것 같자, 남편은 나의 의지를 꺾고 전문성을 의심하고 일과 가사일 양립을 걱정한다.

 

전문성을 수시로 의심받는 상황에서 전문가로서 설 수 있는 공간이 생기는 것은, 즉 공간적 분리는 주인공에게 절실하다. 주인공에게 부과된 많은 책임을 남편은 덜어주지 않는다. 선풍기를 돌려주려고 노력하지만 밥을 차릴 생각은 없고, 사춘기 아이와의 관계 개선도 아내의 몫으로 돌릴 뿐이다. “다른 여자들처럼 편하게 살라”는 말은 오히려 ‘나’를 괴로움에 빠트릴 뿐이다. 공간적 분리를 하듯, 슬래시를 쳐서 구분을 해보지만 공방 일과 가사일과 육아 일이 전부 포함되어있는 부분에서 많은 일들이 여성에게 부과되어있다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시간에 맞춰 학원차가 도착하지 않으면 아이들이 차를 기다리다 엄마들한테 전화를 했고, 그러면 그 엄마들은 일을 하다 말고 불안해하며 다시 수미한테 전화를 했다. 수미는 정확한 차량 시간과 아이들 승하차 안전 둘 다에 신경을 쓰느라 늘 곤두서 있고 지쳐 있었다. 내비 거치대에 휴대폰을 올리고 음성 카톡을 연 뒤 수미는 운전대를 돌리며 각각의 어머니들한테 신속하게 메시지를 보냈다. 유빈이가 잘 탔다고. 세훈이가 잘 내렸다고.

 

(최은미, 「여기 우리 마주」 中)

 

 

문제는 그 모든 어쩔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월세와 관리비가 계속 빠져나간다는 것이었다. 코로나 때문에 남편 급여도 30퍼센트가 감봉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나는 여러모로 죄인이 된 기분이 들었다. 일을 벌였는데 일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압박감이 너무도 커서, 나는 은채와 집에 있으면서는 공방 생각만을 하고, 공방에 나가서는 아이를 혼자 두고 나와서도 멍하게 앉아만 있다는 괴로움으로 시간을 보냈다. 이도 저도 아니라는 것. 어느 것도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 일 때문에 가족들한테 민폐를 끼치는 것 같은 그 기분. 일을 잘하려고 하면 할수록 수렁에 빠지는 그 기분. 그건 육아와 일을 병행하는 동안 지긋지긋하게 반복됐던 감정이었고 10년 가까운 시간 동안 경험과 체념이 쌓이면서 조금씩 뭉개가던 감정이기도 했다. 어쩌면 맞춰가고 있다고 믿었던 일과 가사와 육아의 균형을 2020년 봄은 다시 원점으로, 원점 그 이전으로 밀고 가고 있었다.

 

(최은미, 「여기 우리 마주」 中)

 

 

공간적 분리가 이루어진 뒤에도 여성들은 완전한 노동의 분리를 경험하지 못한다. 아이에 대한 걱정으로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자신을 찾는 아이의 전화에 이리저리 전화를 돌리고, 그렇게 결국 어느 쪽에도 집중하지 못하고 이도저도 하지 못하게 되는 상황에서 죄책감을 끌어안고 좌절하고 만다. 결국 일과 육아와 가사 일은 명확하게 분리되지 못하고 그저 얄팍한 슬래시를 그 사이에 끼워넣어 구분할 수 있을 뿐 한 줄에 여전히 동시에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피오줌을 싸며” 일과 가사 육아 일을 병행하지만 정작 자신이 전문가로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주부로서의 노동을 선별해 지워야만하는 상황에 자꾸 내몰리게 된다. 그렇게 노동을 지울수록 자신은 지워지고 또 ‘편하게 사는 여자’가 되거나 고립되어 자기 혐오의 굴레에 빠진다.


 

기혼 여성들은 집밖으로 나서는 순간부터 이미 분열과 고립을 겪으며 착취의 대상이 된다.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도로 위에서 가장 쉽게 공격의 대상이 되곤 하지만, 운전과 차량 보조를 동시에 할 수 있다는 이유로 선호되기도 한다. 수미 또한 학원 운영자들이 오래 잡아두고 싶어하는 ‘여자 기사님’이다. 수미가 “정확한 차량 시간과 아이들 승하차 안전 둘 다에 신경을 쓰느라 늘 곤두서” 있는 동안 상가에 공방을 낸 화자 또한 ‘선생님’으로 생존하기 위해 “주부로서의 노동만을 선별해서 지워”야만 한다. 그들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직업 현장에서도 돌봄 노동을 부가받으며 이중으로 착취되는 한편, 이 젠더화된 노동의 울퉁불퉁한 흔적을 매끄럽게 지워 하나의 그럴듯한 인적 자본이 되길 요청받는다.

 

(강지희, 「파열하며 새겨지는 사랑의 탄성」, 『눈으로 만든 사람』, p.376)

 


일과 재생산 노동 사이 균형을 향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이들은 무너지고 만다. 코로나19시국, 재난 상황은 여성에게 더 많은 의무를 짊어지게 했다. “방역의 주체”가 되라고 하고 개학에 대한 의견을 수시로 물었으며, 아동학대 예방 공문은 학부에게는 가지 않고 학모에게만 간다. 코로나 시국 속 주로 집 안에 고립되어 있는 것은 여성과 아이임에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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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줄기가 터져 나오려는 호스의 입구를 한 손으로 틀어막고 한 여자가 서 있다. 다른 한 손으론 아이의 손을 잡고 있다. 여자는 휘청거린다. 호스에 장전된 것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서,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호스가 튕겨져 나가버릴 테니까. 물줄기가 요동을 치면서 가장 가까운 곳을, 가장 약한 것을, 가장 사랑하는 것을 찌를 테니까. 머리 위에 찬물을 끼얹고 자신의 뺨을 내리치면서라도 이 분노를, 이것을, 정확한 곳으로 겨냥하려고, 제대로 가누려고, 겨누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어느 날은 그냥 호스를 놓쳐버린다.

 

(최은미, 「여기 우리 마주」 中)

 

 

혐오는 약자에게로 향한다. 주인공이 공방을 홍보하면서 ‘#주부취미’라는 해시태그를 쓰기를 어려워했듯, “살짝만 당겨도 죽는 집단과 제대로 당겨도 죽지 않는 집단”을 확인하고 보았던 그 시국에 공방이 확산의 진원지가 된다면 모두 총살을 당할 거라는 수미의 말처럼 ‘공방’이라는 공간에 모인 주부들은 혐오의 대상이 되기 쉬웠다. 더군다나 도로 위에서 존중받지 못하고 갖은 욕과 죽고 싶냐는 말을 듣는 등 여성들은 이미 여성혐오사회를 살아가고 있었다. ‘편하게 사는 여자들’이라는 말에 포함된 혐오적 의미는 여성 사이에 또다른 분열을 낳았다.


“곧 끝날 수 있을 거라고”, “이제 거의 끝나간다고 생각했”고, 개학이 연기되어도 버텨왔고, 순차적 개학 소식이 들려오며 아이를 학교에 보낼 수 있게 되었을 때, 2차 유행이 터지고 만다. “맘카페는 폭발했다.” 이미 한계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코로나 이전에도 혐오의 대상이 되던 여성들은 이제 혐오와 분노의 방향을 틀어버린다. ‘나’는 공방을 주마다 찾아주던 동성커플로 추정되는 손님들에게 여자친구를 찾고, 클럽에 다녀온 인물일까 봐 그들이 떠난 뒤에 그들이 만진 비누 자투리를 에탄올로 소독한다. 수미는 남편과의 불화와 일과 가사와 돌봄 노동을 모두 견뎌보려다가 자신의 아기였던, 아이인 서하에게 분노를 터트린다. “결국 소설 속에서 코로나 확진자가 되어 오명의 대상이 되는 것은 룸살롱에 있던 수미의 남편이 아니라, 경제적 활동과 ‘좋은 엄마’로서의 노동을 모두 해야 했던 수미다.”(강지희, 위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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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주 동안 그녀들이 단 한 번도 마스크를 내리지 않았을까? 그렇지 않다. 별주 씨와 별은 씨와 별선 씨가 단 한 번도, 오일 병 트레이 안으로 손을 뻗지 않았을까? 그렇지 않다.

 

몇 번째 수업부터였을까. 향료 병의 라벨을 일별하다 어느 순간 그녀들은 뚜껑을 열었다. 오일이 묻은 드로퍼를 얼굴 앞으로 천천히 가져갔고, 몸의 감각기관 하나를 빠르고 완전하게 열었다가 닫았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나는 마스크에 가려져 있던 그녀들의 얼굴을 보았다. 마음에 드는 향을 찾았을 때의 그녀들 표정을 읽었다.

 

좋은 신호였다. 나는 공을 들이고 싶어졌다.

 

그리고 그때부터 무언가가 시작되었다.

 

우리가 서로에게 잘 보이고 싶어졌을 때. 일을 잘하고 싶어졌을 때. 내 전문성으로 그녀들한테 신뢰받고 싶어졌을 때.

 

(최은미, 「여기 우리 마주」 中)

 

 

원데이 클래스나 취미반에서는 절대 풀지 않는 것을 정교하게 펼칠 수 있는 판이 열리면, 나는 나의 무언가를 가리기 시작한다. 수미는 알고 있었을까. 누구누구의 맘도 아닌 무슨무슨 샘도 아닌 딱 떨어지는 ‘선생님’이 되어야 할 때, ‘지도사’라는 정식 호칭으로 서 있어야 할 때, 내가 나의 무엇을 보이지 않게 하는지. ‘선생님’으로 생존하기 위해 내가 얼마나 깨끗하고 멀쩡하게, 주부로서의 노동만을 선별해서 지워버리는지. 하지만 ‘선생님’인 그 순간에도 내가 알아서 감춰버린 그 노동에 얼마나 실시간으로 잠식당하고 있는지. 어떻게 얼굴이 지워진 채로 다른 여자에게 다른 여자가 되어가는지. 나로 서 있기 위한 최소한의 힘을 기르기 위해 어떻게 또다시, 계속 다시, 매일 다시, 내 노동을 지우고, 지운 것에 먹히고, 먹혀가는 채로 지우면서, 편하게 사는 여자들 중 하나가 되는지. 왜 나는 나의 어떤 부분을 지워야만 내 실력을 신뢰받을 수 있다고 믿게 되었는지.

 

그래서 우리는, 별주 씨와 별은 씨와 별선 씨는, 수미는, 나는, 우리가 그 봄에 감당하던 것들에 대해 어느 순간부터 말을 하지 않게 되었다. 지레짐작으로 서로를 넘기게 되었다. 서로한테 매력적인 사람이고 싶을수록, 테이블에 함께 앉아 있는 채로 고립되어갔다. 아주 많이 힘든 날일수록, 다른 여자들도 나처럼 힘들 거라고 믿기가 어려워져갔다. 그와 동시에 그녀들은, 내 공방에서 무언가를 원하기 시작한 그녀들은, 애정을 갖기 시작한 공간에서 마스크를 내려버렸으므로, 그 공간 전체를 안전한 장소로 만들고 싶어 했다. 나리공방이 청정 구역이 되길 바라는 꿈을 품고 나를 바라봤다.

 

(최은미, 「여기 우리 마주」 中)

 


 

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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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룡알 모양 CCTV 카메라 렌즈를, 혹은 그 너머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엄마를 쳐다보는 서하의 시선과 열이 나는 수미를 마주하고 있던 장면들이 떠오른다. 우리는 정말 제대로 서로를 마주하고 있는 것인지를 묻는 것일까. 배제와 혐오의 확산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 소설 자체가 어떤 ‘마주’가 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며, 다시 이 글을 읽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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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하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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