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여성’을 빼고 남는 게 없다면 [드라마/예능]

<퀸메이커>의 신선함과 태만함
글 입력 2023.04.27 1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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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서사’는 과거에 비해 각광받는 중이다. 초창기 한국 드라마에서 여성은 ‘어머니’로서의 모습만을 대변하거나 순종적인 이미지로 그려지는 등 역할에 있어 상당한 제약을 받았으나, 오늘날은 그렇지 않다.

 

여성 정치인, 여성 변호사, 여성 권력자, 여성 살인마 등 배역의 폭도 넓어지고 있으며, <더 글로리>,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슈룹>, <작은 아씨들> 등 여성 주연의 히트작들도 쏟아져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과거에 비해 드라마 속 화면에 다양한 역할과 모습들이 잡힐 수 있게 된 셈이니, 정말 반가운 일이다. 어쨌든 이제 ‘주연이 여성이어서 대중적으로 흥행하지 못한다’는 말은, 적어도 드라마판에서는 유효하지 않은 걸로 보인다.

 

한편 앞서 언급한 네 작품은, 주연이 여성이라는 사실이 드라마에 ‘힘을 보태준’ 경우다. 바꿔 말하면, 이들은 여성 주인공의 열연과 더불어 작품 자체의 스토리도 탄탄했기 때문에 좋은 작품성과 높은 화제성을 잡을 수 있었다. 이는 비단 여성 서사뿐 아니라 모든 드라마에서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2023년의 대중은 주연의 성별 자체보다는, 당연하게도 이야기의 참신함과 견고함에 더 주의를 기울인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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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맥락에서, 김희애와 문소리가 주연을 맡은 여성 정치극 <퀸메이커>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남기는 작품이다. 확고한 여성 서사를 표방하는 이 작품은 분명 지금껏 본 적 없는 신선한 그림들을 많이 만들어내며 앞으로 나아가지만, 한편으로는 기존의 클리셰들을 답습하는 데 급급하며 뒤로 후퇴하기도 한다. 이 드라마의 핵심 키워드인 ‘여성’과 ‘정치’를 중심으로 드라마의 면면을 살펴본다.

 

 

 

여성: 진일보한 배역의 다양성, 그리고 연대의 가능성


 

이 작품에서 단연 돋보이는 점은 배역의 상당수가 여성 캐릭터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주연인 황도희와 오경숙은 논외로 하더라도, 극중 대기업인 은성그룹 오너 일가의 회장과 그 자식들이 모두 여성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은 새롭다. 뿐 아니라 오경숙과 함께해온 노동자들도 여성으로 설정되어 있고, 황도희가 맞서 싸우는 은성그룹의 전략기획실장인 국지연도 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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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기존에 여성보다는 남성에게 많이 주어지던 배역을 여성 배우들이 맡다 보니, 이 드라마에서는 이전에 본 적 없던 새로운 그림이 많이 나오는 편이다. 마치 모계 사회처럼 엄마와 딸로만 이루어져 있는 대기업 오너 일가의 모습은, 확실히 예전의 한국 드라마에서는 보기 어려웠던 구도다. 또 여성 서사에 집중한 이 드라마는 최근 많은 드라마의 비판 요소였던 ‘억지 러브라인’을 만들어내는 데 시간을 할애하지 않았고, 이는 황도희와 오경숙의 ‘워맨스’에 대한 몰입도를 증진시키는 효과를 낳았다.

 

비슷한 사례로는 <구경이>가 있다. 전직 경찰 구경이와 여성 살인마 K의 추격전을 담아낸 이 드라마는, 마찬가지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입체적인 캐릭터들을 모두 여성으로 설정하고 러브라인을 과감히 없애면서 독특하고 마이너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정치극이나 범죄극은 장르 특성상 주연 캐릭터들이 남성으로 구성된 경우가 많았기에, 적절한 연출이 뒷받침된 성별 반전은 그 자체만으로 극에 신선한 동력을 불어넣어줄 수 있다. <구경이>는 K를 육체파가 아닌 지능형 빌런으로 그려내고, K가 죽이는 대부분의 대상을 성범죄자들로 설정함으로써 여성 서사로서의 설득력을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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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맥락에서, <퀸메이커>에서 성별 반전에 힘을 더해 주는 서사는 여성 간의 연대에 대한 섬세한 묘사다. 이 드라마는 약자의 위치로 내몰린 여성들 간의 연대를 담아내는 데 분명 많은 노력을 들였다. 단적으로 이 드라마의 중심 서사는, 강자의 편에서 성폭력 피해자인 한이슬을 내치던 황도희가 약자의 편에 서서 같은 피해자인 국지연을 보호하는 입장으로 성장해가는 과정이다. 이외에도 마지막 한 사람까지 보듬고 가야 한다는 오경숙의 철학이 극중 여성 노동자 문제와 맞물리는 등, ‘여성 서사’로서 이 드라마의 완성도는 높은 편이다.

 

 

 

정치: 이상적이지도, 현실적이지도 않은


 

그러나 거기까지다. ‘여성 정치물’인 이 드라마의 가장 큰 문제점은, 여성 서사에 치중하느라 정치에 대한 묘사나 스토리라인에는 전혀 공을 들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정치물의 기본은 주인공이 되는 정치인이 갖고 있는 비전을 명확히 제시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작중 오경숙은 명백한 악역인 백재민에 대한 네거티브만을 지속할 뿐, 구체적인 공약은 단 하나도 제시하지 않는다. 유세 현장에 나가서 한다는 소리도 ‘시민 모두를 위한 서울을 만들겠다’ 같은 뜬구름 잡는 말들일 뿐, 그래서 사악한 백재민과는 달리 코뿔소 오경숙은 뭘 하겠다는 것인지는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실제로 작중에서 결정적으로 지지율 상황을 반전시키는 요소들은 죄다 상대 후보의 만행을 담은 ‘녹취록’뿐이다.

 

당선되고 나서 실시하는 ‘이익 배당금제’에 대해서도 충분한 고민이 있었는지 의문이다. 현실 정치에서도 아직까지 논쟁이 지속 중인 정책이라는 점은 차치하고서라도, 애초에 이전 화에 현금성 복지를 지향한다는 오경숙의 그 어떤 신념도 언급된 바가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의견이 갈릴 수 있는 이런 정책을 시행하는 오경숙의 모습을 ‘평가의 대상’이 아닌 ‘무조건적인 선’으로 묘사하는 연출은, 이 이야기가 나와야 할 당위성을 더욱 꺾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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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오경숙이 그닥 이상적인 정치인이 아닌 것도 문제지만, 더 심각한 건 정치와 연관된 모든 이야기들의 현실성이 심각하게 떨어진다는 점이다. 사생활 이슈로 순식간에 사퇴하는 서울시장, 시민의 분노가 커지고 있다는 등 정치인에 대한 ‘주장’을 서슴지 않는 앵커들, 자금난에 시달리는 원내 2당 후보, 선거를 며칠 앞두고 자당 후보에게 사퇴를 권유하는 당대표까지. 정치에 대한 지식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도저히 나올 수가 없는 장면들이 차고 넘친다. 서사를 위해 현실성을 희생할 수는 있다지만, 기본적인 몰입감을 방해하는 수준이니 문제다. 정치 드라마가 정치를 다루는 데 이렇게 안일해서는 안 됐다.

 

좋은 비교 대상으로 웨이브 오리지널이자 같은 여성 주연 정치 드라마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가 있다. 문체부 장관인 이정은이 정치권의 격랑 속에 휘말리며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를 다루는 이 드라마는, 그녀가 체육계 폭력 피해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설치하려는 ‘체수처’에 대한 이야기를 줄기차게 밀고 나간다.

 

드라마 내에서 체수처의 정확한 설립 절차나 역할이 언급되지는 않지만, 사실 체수처의 진짜 의미는 ‘별 거 아닌’ 정치권의 자극적인 이슈들에 매번 묻히는 실질적인 민생/복지 정책에 대한 은유다. 정치권 능구렁이들 사이에서 체수처 설립을 우직하게 고집하는 이정은 장관의 존재 자체가, 현재의 정치권에 던지는 일종의 메시지로서 기능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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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 아니라 장관의 뒷수습을 하기 바쁜 부처 공무원들, 보여주기식 그림에만 집착하는 청와대 수석들, 보수 정치 세력에 붙어 비상식적인 혐오를 조장하는 목사, 입으로는 진보를 외치지만 실상은 독선으로 가득 찬 586 정치평론가까지. 이 드라마에는 정치와 연관된 캐릭터들의 인물상들도 현실과 꼭 닮은 모습으로 구현되어 있다. 건드리기 민감한 정치의 영역을 은근슬쩍 회피하기보다는, 정치권의 나쁜 단면에 대해 골고루, 그리고 과감하게 목소리를 내는 쪽을 선택한 것이다. 여러모로 정치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깊게 고민한 흔적이 보이는 이 드라마가, 단순히 정치를 복수의 소재로만 사용한 <퀸메이커>보다는 훨씬 의미 있게 다가온다.

 

 


홀로 설 수 있는 이야기의 필요성


 

종합적으로 <퀸메이커>는 여성 서사로서의 완결성은 높은 편이지만 정치극으로서의 몰입도는 떨어지는, 양가적인 작품이다. 그래서인지 이 드라마의 평가나 흥행 성적 역시 넷플릭스의 ‘킬링 콘텐츠’라고 하기에는 다소 미묘한 편이다. 좋은 여성 서사는 분명 작품의 완성도를 높여주는 요소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 작품성과 화제성이 담보되지는 않는다.

 

앞서 언급한 정치적 측면에서의 부실함을 제외하고도, 이 드라마의 이야기 자체는 사실 새로울 것이 거의 없다. 성폭력 사건에 연루된 여성이 자살로 위장된 타살을 당하는 초반부 전개는 <왜 오수재인가>와 판박이고, 서울시장이 되고 싶어하지만 재벌 처가에 이용당하는 사위 캐릭터는 <작은 아씨들>의 박재상과 다를 바가 없으며, 녹취록으로 판을 뒤집는 전개는 여느 막장 드라마에서 질리도록 봐 왔던 스토리다. 말하자면 성공한 여성 주연 드라마들과는 달리, <퀸메이커>는 여성 서사라는 점을 제외하고 나면 남는 차별적 강점이 거의 없기 때문에 ‘애매한’ 드라마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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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드라마가 처음부터 ‘여성극’만을 표방했다면, 이 애매함은 비판의 요소가 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드라마의 핵심 슬로건은 분명 ‘치밀한 연기, 계산된 무대, 완벽한 정치쇼’였다. 탄탄한 스토리로 흘러가는 정치극을 기대하게 해놓고, 막상 정치 스토리는 내팽개치고 제대로 만들어놓은 건 여성 서사밖에 없다면 그건 기만이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성별에 구애받지 않는 다양한 역할을 다룬 작품은 앞으로도 더 많이 나와야 한다고 굳게 믿는다. 그러나 그런 시도가 <퀸메이커> 같은 드라마로만 이어진다면, 언젠가 대중이 여성들의 이야기를 ‘여성 서사에만 공들이고 장르적 재미는 없는’ 작품으로 지레짐작할까 두렵다.

 

다양한 배우들의 다양한 작품을 한껏 즐기고 싶은 시청자로서, 모든 작품이 장르의 본분을 기억하기를, 그리고 다루기로 한 장르에 대한 ‘책임’을 제대로 지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외려 그것이야말로 이전에 본 적 없는 새로운 이야기들을 한아름 꽃피워낼 시작점이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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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민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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