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버지니아 울프와 함께 유럽을 거닐다 [도서/문학]

글 입력 2023.04.10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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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나와 나를 둘러싼 것들을 많이 돌아보고 있다. 전과 같은 시각으로 모든 것을 볼 수 없어 혼란스러웠다. 그러던 중 모아놓은 돈으로 처음으로 길게 여행을 다녀왔다.


사실은 그 여행을 그저 즐기려고 떠난 건 아니었다. 철저히 계산적으로 한국에서의 도피라는 목적을 세웠다. 도저히 현실로 다가올 불확실한 미래를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영원하게 내 이상의 공간이었던 유럽으로 떠났다. 불안감 대신 다른 것으로 나를 채우면 내게도 밝은 미래가, 선명한 무언가 보이겠지, 기대하며 아주 분명하고도 불순한 목표를 가지고 비행기를 탔다.


무언가 알고 싶었던 사람치고는 그저 본능에 충실했다. 유명한 식당에 들어가 메뉴를 보고 가장 먹고 싶은 음식을 구매해 먹는다, 마시고 싶었던 와인을 좋은 사람들과 같이 나눠 마신다, 가고 싶던 곳에 가려는 계획을 세운 뒤 지하철을 타고 간다. 그냥 길거리를 걸었는데 새로운 것들이 있었고, 처음 경험해보는 것투성이였고 사람들이 많이 가는 유명 관광지, 나만 알 수 있는 추억이 담긴 관광지를 돌아보며 인생의 몇 주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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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지하철에서는 와이파이와 데이터가 터지지 않아 미리 내려받아 놓은 책을 읽었다. 수많은 책 중 내가 고른 책 한 권은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이었다. ‘댈러웨이 부인’은 의식의 흐름이라는 새로운 소설 창작 기법을 도입하여 인간의 내면세계를 탐구한 대표적인 모더니즘 작품이다. 요즘 유행하는 자기계발서나 작정하고 쓴 양질의 정보 글은 아니다. 다만 가만히 흘러가는 인간의 정신 흐름을 글로 붙잡아 보여주는 에세이에 가깝다.


그러나 의식의 흐름이란 강의 물결과도 같아서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가 무심결에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꽂히면 그냥 읽는 버릇대로,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고른 이 책은 어쩌다 보니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나에게 큰 울림을 주게 된다.

 

 

인생을 사랑하고 있어. 사람들 눈 속에, 팔을 휘젓고 또는 발소리를 요란히 내고 뚜벅거리며 걸어가는 사람들의 걸음걸이 속에, 들끓는 아우성, 마차, 자동차, 버스, 짐차, 또 발을 질질 끌며 흔들흔들 걸어가는 샌드위치 맨 속에, 악대 오르간 소리와 환성(歡聲) 속에, 또 머리 위로 날아가는 비행기의 묘하고 드높은 폭음 속에 내가 사랑하는 것이 들어 있어. 인생, 런던, 6월의 이 순간이.

 

- <댈러웨이 부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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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교롭게도 이 부분을 읽을 때 나는 런던에 있었다.


인생, 런던, 2월의 어떤 순간들.

 

내가 선택하지 않았다면 느끼지 못했을 순간들을 즐기고 있었다. 타워브리지 근처에서 골이 아플 정도로 끈질기게 울리는 사이렌 소리, 모던하면서 높이 솟은 건물들, 운 좋게 마주한 파란 하늘과 상공을 가로지르는 제트기의 꼬리, 숨 가쁘게 걸어 다니는 런더너들과 전통 있는 왕실의 근위병 교대식까지. 누군가는 글만 봐도 시끄럽고 정신없다고 할 수 있겠지만 나는 이 복잡함이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버지니아 울프의 나라이자 세계적인 도시. 내가 도시와 그 속의 사람과 아우성과 교통체증도 사랑하는 이유는 어쩌면 그 속에서 태어난 도심 인의 반증일지도 모르나 이렇게 부대끼며 살아가는 게 참으로 좋아서 평생 도시를 떠나지 못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내가 사랑하는 수많은 사람이 얼마나 많이 여기에 있는지, 그렇기에 내가 얼마나 인생을 사랑하게 되었던지, 될는지 모르겠다는 희망을 확인했다.


 

음과 음 사이의 간격은 음 자체만큼 의미 있는 것이다.


- <댈러웨이 부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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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서 나는 에펠탑을 보고 또 봤다. 보통은 감상이 희석될까 두려워서 한 번 본 건 두 번 다시 보지 않으려 하는 나지만, 언제 다시 올 수 있을까 해서 계속 에펠탑을 찾았다. 어딜 들렀든 에펠탑에 넘어갈 땐 꼭 지하철을 탔어야 했는데 그게 나는 꼭 에펠탑을 보기 위한 관문이라 여겨졌다.

 

이를테면 개선문을 구경하고, 지하철을 타고 10정거장을 가야만 에펠탑이 보인다. 오르세 미술관에 들렀다가, 지하철을 타고 5정거장을 간다. 자연스레 에펠탑을 향해 걷고, 보상처럼 보이는 에펠탑을 만끽한다.'어디로든 가는 문' 같은 게 생겨 내 시간을 쓰지 않고 목적지에 도달하면 참 좋겠지만 현실에 사는 그 누구도 시간과 차원을 넘나들 순 없으니, 일정한 시간을 투자해야 원하는 곳에 갈 수가 있다.


어쩌면 버지니아의 말이 맞았구나 생각했다. 우리가 건반을 누를 때조차 시간 사이에 틈이 있다. 최대한 부드럽게 연결해 그 틈을 크게 벌리지 않기 위해 페달을 밟고 소리를 늘이지만, 연주자는 안다. 이 모든 게 스타카토처럼 짧은 손가락과 건반의 압력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우리 사이의 공백. 앞으로 나아갈 때의 막막함이라는 틈도 사실은 징검다리 같은 성장 사이에 꼭 필요한 과정이라는 사실을. 사실은 1m, 1cm, 아니 1mm라도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기간이 있다는 것을.


 

나는 지금 무엇을 꿈꾸는 것일까? 무엇을 생각하려나? 펼쳐서 늘어놓은 책을 읽어보면서, 전원에 동터오는 하얀 새벽의 어떤 모습을 그리려나?


이제는 뜨거운 햇빛도 두려워 마라.

또한 혹한(酷寒)의 눈보라도.

〔〈심벨린〉 4막 2장에서〕

 

- <댈러웨이 부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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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는 따스한 햇살이 만든 강의 윤슬과 차가운 강바람이 공존하는 나라다. 내가 주로 머물렀던 인터라켄이라는 도시의 공원 한구석에서는 관광객들이 하늘 위에서 패러글라이딩한 후 착륙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거기서 시선을 조금만 옆으로 돌리면 유모차에 아이를 산책시키는 부부와 시내를 향해 바쁘게 달리는 자동차 행렬이 보였다.


산에 쌓인 하얀 만년설이 노을 지는 시간에는 분홍색으로 물들어 탄성을 자아내는데, 조금만 더 지나면 그 하늘이 어둠으로 덮여 지독히도 쓸쓸해진다. 스키 타는 사람들의 즐거운 활강과 스트레스 없이 웃는 얼굴들로 가득 찼던 눈밭은 밤이 되면 위험한 적막함과 고요함으로 꽉 찬다.


따뜻함과 차가움, 둘 중 불쾌한 건 하나도 없었다. 차가운 강바람이 만든 추위도, 따뜻한 햇살이 만든 눈부심도. 다만 시간에 따라 이렇게 바뀌는 눈앞의 풍경이 기묘하게 아름다워 두려움 따위를 느낄 새가 없었기 때문이다. 스위스는 전 세계에서 4위의 행복지수를 가지고 있다. 아마 이렇게 장엄한 대자연을 느끼고 그 속에서 뒹굴다 보면 개개인의 잡념, 이기심, 등은 모두 그저 인간의 문제임을 깨닫게 될 것 같았다.

 

 

인생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이 세상에선 알 사람이 하나도 없어. 얼마나 순간순간을 사랑하는지를.


- <댈러웨이 부인> 중에서

 


'댈러웨이 부인'에서는 여주인공 클라리사를 비롯해 그녀의 첫사랑 피터 월시, 셉티머스 등 모든 등장인물들은 과거와 현재의 괴리, 놓아버린 이상에 대한 미련을 가지고 있으며 존재와 의미에 대해 끊임없이 고찰한다. 


그래도 그들은 살아간다. 눈앞에 보이는 사람들을 관찰하고, 리젠트 파크에서 산책하고, 파티를 열어 사람을 초대한다. 모든 걸 해결해야 한다는 욕심과 자책감에 빠져 있기보다는 삶 그 자체를 사랑한다.


 이렇게 당황하고 방황하는 나의 머릿속과 비슷한, 결정을 번복하고 무언가를 후회하는, 싫어하기도 좋아하기도 해지는 자연스러운 양가감정은 누구에게나 생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런데도 삶을 사랑하는 것일 테다. 살아 있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 자신과 서로를 따스한 눈짓으로 안아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알아야 할 테다.


*

 

“좋은 책을 읽는 것은 과거의 훌륭한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이다."라는 프랑스의 철학자 데카르트의 명언이 있다. 책에서는 수많은 인물이 등장하고, 나는 여행에서 그 누구보다도 등장인물들과 가장 솔직한 대화를 할 수 있었다. 속마음은 입 밖으로 뱉는 말과는 다르게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어쩌면 의식의 흐름이라는 기법을 통해 '댈러웨이 부인' 안 등장인물의 속마음을 들여다보는 행위가 내 안에 사는 여러 감정의 나를 가장 잘 꺼내 놓는 최고의 방법이었을지도 모른다. 후회, 절망감, 두려움, 슬픔. 그런데도 기쁨, 즐거움, 행복함을 느끼는 나와 우리.


여행은 끝났다. 나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여행, 그 속에서 느끼고 즐기며 깨달은 것도 많았지만 나에게 미래에 대한 실마리가 보이냐고 묻는다면 사실 잘 모르겠다. 유럽에서의 나는 그저 의식의 흐름대로 사색하고, 먹고 마시고 걷고 사진 찍었을 뿐이다. 한국에 돌아온 지금은 서울을 걸어 다니며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 해결된 것보다 해결해 나가야 할 일이 훨씬 많다. 미래는 미지수고 머리는 종종 너무 복잡해 터질 것만 같다.


그런데도 자꾸 여행이 끝났나라는 의문이 든다. 여행은 끝났나? 아직도 나는 어딘가를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탄다. 목적지까지는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고 거기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덜컹거리는 지하철에 몸을 맡기고 책을 읽는다. 나는 생각한다. 삶을 커다란 여행으로 보면 모든 게 즐거워지지 않을까? 하고. 그곳이 서울이든 파리든, 런던이든 스위스든, 여행하듯 살아보자고 결심한다.

 

자연스럽게, 흐르는 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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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하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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