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행복을 저금하세요

좋았던 기억을 잘 되새김질하려면
글 입력 2023.04.04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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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하다가 행복 저금통이란 단어를 보았다. 행복한 일이 생길 때마다 적어서 통에 넣어놓고 나중에 힘들 때 꺼내본다는 것. 그동안 힘들면 좋았던 기억을 꺼내 되새김질해서 저금통까지는 필요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이걸 자수를 놓아서 표현하는 사람을 보니 나도 유형의 것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간혹 회사에서 감당할 수 없는 분노에 휩싸일 때가 있는데 이때의 감정을 진정시킬만한 무언가가 없어서 눈물이 날 것 같은 순간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최근, 그리고 생각보다 오랜 시간 일상 곳곳에 덕질이 스며들어있기 때문에 가장 손쉽게 얻은 행복은 그쪽이다. 수도 없이 이야기했는데 내가 만들 수 있는 행복의 한계선이 분명하기 때문에 자극적인 행복은 외부에서 찾는 게 맞는다고 생각한다. 좋아하는 사람의 예상치 못한 행동은 하나의 이벤트가 되고 때로는 그게 행복으로 작용한다.


회사에서 나를 진정시키는 제1안은 의미가 있는 노래를 듣는 것. CD를 보는 것만으로도 좋은 만큼 수록된 노래를 듣는 것 역시 행복의 작은 조각으로 작용한다. 그래서 하던 일을 멈추고 이어폰을 찾아 귀에 꽂는다.

 

살면서 가장 비싸게 주고 산 CD에는 노래가 세 곡이 들어있는데 그 세 곡 중 한 곡을 들으면 얼추 영혼 없이 당장의 업무를 처리할 정도의 이성이 찾아온다. 진정 효과가 확실한데 언제 내성이 생길지 모르기 때문에 남용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다. 그래서 나는 원활한 업무수행을 위해 또다시 비싼 값을 주고 CD를 사고 마는 결말에 이르렀다. 어떤 행복은 그렇게 합리적인 과소비의 형태로 찾아온다.


행복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찾아오기 때문에 예상치 못한 일정을 계획하기도 한다. 예를 들자면 여행. 지금도 몇 년 전 여행지에서 가져온 행복한 기억을 꺼내 보기 때문에 여행은 그 자체의 설렘과 비일상성 외에도 부가적으로 당연히 따라오는 게 있는 일이 되었다. 사실 여행은 합리적이라는 말을 붙이기엔 빅 이벤트인데 과소비라고 하기엔 나를 위한 투자란 인상이 크다. 큰돈을 쓰는데 주변에서 말리지도 않고 오히려 부추기는 일. 이런 일에서 행복 한 알은 발견하고 돌아와야 맞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가끔 떨치기 힘든 부정적인 생각이나 감정이 덕지덕지 들러붙을 때가 있다. 생각은 안 좋은 쪽으로 꼬리를 물고 아주 막막해진다. 오래 쌓인 감정은 견고해서 떨쳐내기에 너무 버겁고 힘겹다. 그럴 때면 강렬했던 만큼 아끼는 기억을 살짝 꺼내본다.

 

그 순간조차 나를 위로하지 못하게 되면 그 이상의 방법이 없기 때문에 정말 몰리고 몰렸을 때만 되새기는데 살면서 이런 순간이 많지 않다. 노력한다고 만들어지는 게 아니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데, 그래도 가능하면 그런 순간이 하나라도 늘어날 수 있도록 열심히 살려고 한다. 착하게 살면 누가 선물처럼 좋은 순간을 주고 가주지 않을까 해서.


최근에 그런 선물 같은 순간이 있었다. 해본 적 없는 일을 혼자서 해결해보려고 했으나 시작부터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혔을 때 즉시, 바로 도움을 받게 되었다. 세상살이 기브앤테이크라고 생각하는 데 도움을 받기만 하지 줄 수는 있는 입장이 아니라서 감사를 표현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기꺼이 호의를 베푸는 사람이 주변에 있고 그 호의를 온전히 누릴 수 있다는 것. 이제 시작했고 결과는 다음 달에야 나와서 아직 이 일에 라벨링을 하지 못했지만, 아마도 어쩌면 올해의 순간으로 기억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

 

처음에 행복 저금통이란 말을 듣고 나도 종이에 그동안의 행복한 순간을 적어놓고 한 번씩 꺼내보려고 했는데 기억 몇 개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쪽지를 만드는 건 빠르게 포기했다. 행복을 정리하는 눈물 대잔치도 의미 있는 일이긴 한데, 나는 그보다 떠올리는 순간 바로 미소 지을 수 있는 효과 빠른 진통제가 필요했다. 즉각적으로 위로 효과를 보이지 않으면 샛길로 빠져나갈 수 있는 감정과 함께 살고 있기 때문에.


이 글을 쓰다가 고개를 돌리니 착장에 꽂아둔 연하장이 눈에 들어왔다. 연하장을 보니 편지와 관련된 순간들이 떠오르고, 자주 꺼내보고 싶어서 상자에 넣어두지 않은 편지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익숙한 편지 봉투를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살짝 좋아졌다. 그리고 그 순간 나에게 행복 저금통이란 보는 것만으로 행복해지는 유형의 물질을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단 생각이 들었다. 나를 단번에 미소 지을 수 있게 하는 것들. 아 어쩌면 나의 행복 저금통은 보물상자를 닮았을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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