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브론테의 작은 기록들 - 브론테 자매, 폭풍의 언덕에서 쓴 편지 [도서]

글 입력 2023.03.29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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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사람들이 책을 읽으라고 권유하고 특히 고전을 읽으라고 하는 것은 작가들이 인생에서 직접 경험하고 보며 배운 것들을 고전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세상에 존재하기 시작한 후 시간이 흐르면서 과학이 발전하며 많은 외적인 변화를 겪었지만, 사람의 감정과 생각은 과거와 크게 다르지 않다. 

 

요즘 한국에서 인문학은 실용적이지 못한 학문으로 취급되고는 하지만, 사람들은 인문학과 멀어지기 어렵다. 그들이 자신에 대해 탐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남아 있다면 말이다. 


브론테 남매는 모두 마흔을 넘기지 않는 시간을 살면서, 어느 시대에서나 모두가 경험하는 인생의 실패와 좌절의 순간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다음을 향한 새로운 발돋움을 놓는 모습을 보여준 사람들이다. 이들의 꾸밈없는 일상을 엿볼 수 있는 편지가 귀하게 여겨지는 이유다. 필자가 브론테 가족에 대해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탓인지 작년부터 올해에 걸쳐서 유난히 이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는 생각이 든다. 


작년 가을에 공연된 뮤지컬 <브론테>와 올해 초까지 이어진 뮤지컬 <웨이스티드>가 그 예이다. 뮤지컬 <브론테>에서는 <제인 에어>를 쓴 '샬럿 브론테'와 <폭풍의 언덕>을 쓴 '에밀리 브론테'뿐만 아니라 <아그네스 그레이>를 남긴 '앤 브론테'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유일한 남자 형제 '패트릭 브랜웰 브론테'는 재능이 많았지만 하나의 전문적인 경력을 만들지 못했는데 뮤지컬 <웨이스티드>에서는 그의 삶도 그려낸다. 


'허밍버드 출판사'의 세 번째 <일러스트 레터>는 브론테 세 자매, 특히 샬럿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편지의 대부분이 샬럿이 친구 '엘런 너시'에게 보낸 것이기 때문이다. 소량의 짧은 글로 산발적으로 남은 에밀리와 앤이 작성한 편지들도 대부분 엘런에게 보낸 것이다. 브랜웰의 편지는 두서없거나 간혹 눈물범벅이다. 에밀리와 앤, 브랜웰의 삶에 관해 샬럿의 삶에 기대어 짐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샬럿이 친구 엘런과 나눈 편지 외에도 에밀리와 앤이 성년이 된 후로 4년에 한 번씩 함께 만든 일기 소식지도 책을 귀하게 채운다. 일기 소식지에는 가족의 일상적인 생활이 생생하게 담겨있다. 샬럿과 에밀리와 앤은 평생 직업을 찾고 생계를 위해 일하면서도 글로써 많은 일을 하며 편지와 습작, 일기, 개인적인 기록, 시를 남겼고, 일곱 편의 소설을 책으로 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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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론테 자매, 폭풍의 언덕에서 쓴 편지>는 이전 <일러스트 레터>들과 마찬가지로 한국인이 사랑한 작가의 기록과 삽화로, 당시에 인물들이 겪었던 상황을 상상하고 그들의 삶을 통해 인생을 대하는 방식을 배울 수 있게 구성되어 있다. 특히 이번에는 편지와 관련된 주요 인물들이 모두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인지 파트 1에서 부모님의 만남부터 파트 6의 네 남매가 세상에 남긴 마지막 기록까지 남아있다.


흩어져있던 브론테의 기록들을 모아 샬럿의 전기를 쓴 소설가는 '엘리자베스 개스켈'이다. 그는 <제인 에어>의 성공 이후 1850년에 샬럿과 처음 만났다. 우리 후대인은 이 여인이 샬럿과 친밀하게 지낸 덕분에 샬럿의 생애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었다. 네 남매의 아버지 '패트릭 브론테'의 의뢰를 받아 전기를 쓰게 되었는데 개스켈은 '소중한 친구이자 고귀한 여인, 샬럿에 대한 자신의 기억을 모두 쏟아붓기로' 결심했다. 

 

 

 

브론테 예술가들의 가족


 

어린 시절 잠도 자지 않고 많은 작품을 탐독했을 정도로 열성적으로 독서를 즐겼던 패트릭 브론테와 '작고 온화한 인간'이라고 설명되는 '마리아 브랜웰'이 만나면서 브론테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패트릭은 아내에게 보냈던 편지는 남아 있지 않지만 마리아가 서른 살이 되던 해에 헌정한 <생일을 맞은 어느 숙녀분께 바치는 시>를 보면 그 역시 대단한 언어의 마술사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여섯 아이가 태어나고 몇 개월 후 브론테 가족은 하워스에 자리를 잡게 된다. 그곳은 고지대 산맥에 위치한 것에 비해 위생 상태가 좋지 않았다. 이미 건강이 악화되고 있던 부인 마리아에게 절대 좋은 공간은 아니었다. 브론테 아이들은 침실에 누워 긴 시간을 보내는 엄마를 보채지 않고 얌전하고 조용했다. 

 

하인에게 마리아 브론테의 마지막을 들은 개스켈은 '어머니는 자녀들을 조금이라도 더 보려고 조급해하지 않았는데, 머지않아 엄마를 잃게 될 그들을 보면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리라.'라고 기록했다.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나이에 사랑하는 가족을, 특히 엄마를 잃은 아이들에게 엄마의 존재를채워 주기 위해 패트릭은 몇몇 여성들에게 구혼했지만 어려움뿐이었다. 죽은 마리아의 동생이자 브론테 아이들이 브랜웰 이모라고 부르던 '엘리자베스 브랜웰'이 마지못해 목사관으로 들어와 조카들을 돌보았다. 엘리자베스는 훗날 브론테 자매들이 직접 학교를 설립하려 할 때 계획을 지지하고, 자매들의 유학 비용도 대주었다. 


 

 

이들의 인생을 읽고



브론테 자매가 남긴 <제인 에어>, <폭풍의 언덕>, <아그네스 그레이>, <교수>, <와일드펠 홀의 소유주>, <셜리>, <빌레트>와 많은 시들을 놀랍게도 필자는 아직 제대로 읽은 적이 없다. 작품에 대해 알고 있는 상태에서 이들의 삶을 알았더라면 더 마음에 와닿는 내용이 많지 않았을지 아쉬움이 있었다. 책을 읽어가며 이들에게 대해 알아갈수록 오히려 작품에 대한 감상 없이 사람 그 자체로 바라볼 수 있는 좋은 조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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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의 언덕>이 보여주는 '야만적인 위엄'을 모른 채 황야를 사랑하고 '쓸쓸한 고독 속에서 소중한 기쁨을 무수히 찾아'내는 에밀리를 느꼈다. 열아홉 나이에 가정교사로 일하기 위해 홀로 집을 떠나는 앤을 통해 작가 이전에 한 가족의 용기 있는 막냇동생의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제인 에어> 이전에 일하는 중에도 글을 놓지 않으며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새로운 시작을 이끌어낸 샬럿의 삶을 대하는 강한 의지를 보았다. 


놀랍게도 한국에서 20대의 삶을 사는 작은 나와 겹쳐서 보이는 순간들이 여럿 존재했다. 나는 가정교사로 일한 적이 없는데 존재감 없이 그저 정해진 일을 하고, 나를 위한 시간을 갖지 못한 채 그들을 위해 일하는 허망함에 공감했다. 암담한 현실 속에서 '학교 설립'이라는 새로운 꿈을 꾸며 '무모하고 야망에 찬 계획'이라고 하더라도 뜨거운 열정으로 목표를 향해 움직이는 모습을 보며 잊고 있던 나의 불꽃을 발견했다. 

 

 

샬럿 ➵ 에밀리: 멍하니 바라보며 듣기만 하는 건 따분한 일이야. 가정 교사는 존재감이 없는 데다, 교사로서 수행해야 하는 힘겨운 임무와 관련된 일이 아니면 살아 있고 이성적인 존재로 여겨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는 그 어느 때보다 확실히 알고 되었어. 아이들을 가르치고 그들을 위해 일하고 그들을 기쁘게 해 주는 동안은 괜찮아. 하지만 잠시라도 자신을 위해 무엇을 하려고 들면 바로 쓸모없는 인간이 돼 버리지.


샬럿 ➵ 엘런: 처음에는 나도 이 제안을 정중히 받아들여 최선을 다해 일을 성공시키려 했어. 근데 한번 가슴에 불이 붙으니 도저히 단념이 안 되는 거야. 나는 역량을 키워서 나 자신보다 큰 사람이 되고 싶어. 내가 어떤 마음을 살포시 품게 되었는지 지난번에 보낸 편지에도 언급했지. 그저 살포시 품었을 뿐인데 메리 테일러가 불꽃에 기름을 부었어.

 

책 151쪽과 163쪽

 

 


빛나는 존재들



그들과 다른 시대를 살고 있는 데도 상황들에 깊이 공감하며 읽어내려갔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공통적인 삶의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는 인물들을 만날 수 있는 고전의 중요성을 다시금 깨닫는 시간이었다. 

 

책을 읽는 내내 브론테 남매만큼 내 시선이 닿은 사람은 샬럿이 '로헤드 학교'에서 만난 절친한 친구 엘런 너시였다. 40년도 채 살지 못한 이들과 곁에서 함께한 엘런이 어느 순간부터 부럽다고 느껴지면서 나에게 엘런과 같은 친구가 있는지, 내가 엘런의 입장인 샬럿과 같은 친구가 있는지 생각하게 되었다. 


샬럿과 엘런은 10대 때 만나 샬럿이 임종을 맞을 때까지 편지를 주고받았다. 엘런이 남긴 현재까지 추적할 수 있는 대략 340통의 편지를 통해 우리는 샬럿과 그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을 수 있었다. 다시 한번 브론테 가족의 흔적을 읽는 날이 온다면 엘런에게 보낸 샬럿의 편지들에 집중해서 읽어보고 싶다. 

 

이 책을 읽으며 브론테 가족 모두를 잠시나마 만날 수 있었고, 멀리서 마음 담아 응원하고 어느 순간부터 네 남매 모두를 몹시 아끼고 있었다. 가족을 잃은 아픔에서 시작된 이들의 예술 활동은 각자의 방식으로 빛났다. 책 제목이 <브론테 자매, 폭풍의 언덕에서 쓴 편지>이듯 후대에 작품을 남긴 세 자매에 내용이 집중되어 있었지만 브랜웰 또한 가족에게 중요한 존재였음은 틀림없다. 

 

오랫동안 '참을 수 없는 정신적 불행과 육체의 병'으로 고통받던 브랜웰이 먼저 세상을 떠난 후 샬럿은 출판사에 편지를 보낸다. "제가 눈물짓는 것은 가족을 여읜 슬픔 때문이 아닙니다. 버팀목이 부러졌다든지 위로를 주던 이가 사라졌다든지 사랑스러운 동반자를 잃어버려서가 아닙니다. 재능의 파멸과 장래성의 붕괴, 밝은 빛으로 타오를 수 있었던 무언가의 쓸쓸하고 때 이른 소멸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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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브론테>와 달리 <웨이스티드>는 네 남매의 이야기를 전한다. 뮤지컬을 인상적으로 본 덕분에 브랜웰의 작은 흔적들도 나에게는 의미 있게 다가왔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 1848년 9월 24일, 아버지의 교회지기이자 자신의 벗인 존 브라운에게 이렇게 외친다. '나는 살면서 위대하거나 선량한 일은 아무것도 해 놓지 않았어. 오, 존. 난 죽네!' 그 스스로 무엇도 남기지 못했다고 말하지만 자신의 인생을 통해, 가족에 대한 사랑을 담은 그림을 통해 그는 세 자매처럼 잊히지 않고 존재할 것이다.

 

책은 리뷰에 쓴 브론테 네 남매의 부모님에 대한 내용과 엘런, 브랜웰에 대한 언급보다는 제목처럼 '브론테 자매'에 대한 기록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위대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길게 적지 않은 이유는 이들의 이야기는 다른 가족 구성원에 비해 이미 세상에 많이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불멸의 작품들을 남긴 자매만큼 다른 가족의 이야기는 나에게 좋은 인상과 감상을 남겼다. 끝으로 브론테 네 남매를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열일곱 에밀리의 일기의 일부를 소개하며 마친다.  

 


앤과 나는 모든 일이 순조롭게 돌아간다면 1874년에 우리는 어떤 모습이고, 무엇을 하고 있고, 어디에 살고 있을까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가 되면 나는 쉰일곱 살이 되어 있을 거다. 앤은 쉰다섯이고 브랜웰 오빠는 쉰여덟이고 샬럿 언니는 쉰아홉 살인 그해에 우리 모두 잘 지내고 있기를 바라며 이 기록을 마친다.


1834년 11월 24일, 월요일 기록 - 책 134쪽

 

 

[정서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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