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불가해성으로 바틀비 바라보기 [문화 전반]

글 입력 2023.03.28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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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2023년의 대한민국에서 《필경사 바틀비》를 읽는다고 할 때, 그 행위가 가질 수 있는 의미는 무엇이 있을까? 1853년 허먼 멜빌의 단편 소설을 읽는 것, 자본주의 체계에 대한 저항의식을 읽는 것, 규율사회의 폭력성을 읽는 것, 우울 및 신경증의 병리학적 증상을 읽는 것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사실 우리는 하나의 소설을 읽고도 모두 다 자신의 내면-틀로 소설을 변형시켜 받아들이기에 이러한 질문은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들뢰즈, 지젝, 아감벤 등 여러 철학자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된 이 바틀비를 지금 우리가 읽어냈을 때, 우리는 그 소설 안에서 무엇을 찾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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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틀비를 본다’의 의미



《필경사 바틀비》는 월 스트리트에 있는 한 변호사가 자신의 사무실에서 일하는 필경사 바틀비에 대해 이야기하는 일인칭 시점으로 진행된다. 글의 화자인 변호사는 자본주의 체제가 상정하는 아주 이성적이며 합리적인 인간상이다. 돈을 주고 고용한 사람의 능력이 조금 부족하거나 자신의 지시에 응하지 않아도 그를 이해하려고 하며 인간적으로 자신의 집에서 머물 기회까지 준다. 그러나 바틀비는 계속해서 변호사가 제시하는 이성적 사회의 질서의 틀에서 벗어난다. 우리가 사는 세계의 틀에 맞춘 합리적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바틀비를 이해할 수 없다. 변호사는 바틀비를 ‘정상-비정상’의 경계에서 비정상으로, ‘건강-질병’의 경계에서는 질병 상태로 바라보며 자신의 규칙으로 어떻게든 그를 독해하고자 한다. 

 

이 소설은 “나는 초로에 접어든 노인이다.”(블루프린트, 2015)로 시작하여 “아, 바틀비여! 아, 인간이여!” 로 끝난다. 화자인 변호사가 스스로를 설명하며 시작하는 이야기는, 바틀비에 대한 한탄 혹은 안타까움으로 마무리된다. ‘하지 않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며 모든 지시에 부정을 선택하는 바틀비는 결국 해고당하고, 사무실에서도 떠나지 않다 결국 건물주가 부른 경찰의 손에 이끌려 교도소에 갇힌다. 그 안에서도 점심을 먹지 않는 편을 택한 바틀비는 결국 죽음에 이른다. 상식선에서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이 소설은 여전히 현대의 독자들에게도 상반되는 감상평을 제공한다.

 

우리는 이 소설을 읽고 바틀비에 대하여 생각한다. ‘바틀비가 이해되지 않는다’던가, ‘바틀비는 왜 그럴까?’, ‘바틀비는 왜 모든 걸 하지 않는 걸 선택할까’라는 궁금증도 많다. 살펴보면 소설 속 필경사 군단과 같이 돈을 받고 일하지 않는 바틀비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도 많다. 이러한 감상평이 존재하는 이유는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를 읽고 바틀비를 보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바틀비를 보았고, 바틀비에 대해 알게 되었고, 그렇기에 나의 합리적인 이성의 기준으로는 바틀비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 새로운 궁금증이 생긴다. 우리는 정말 바틀비를 봤을까?


이 소설 속의 화자는 변호사이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변호사가 재현하는 바틀비다. 우리가 봤다고 착각하는 것은 ‘소설 속 허구세계에 실존하는 바틀비’이며, 우리가 실제로 본 것은 ‘변호사가 본 바틀비’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지점에 대해 깊이 고민하지 않는다. 우리가 이 소설을 읽고 제일 먼저 하는 생각은 ‘바틀비는 도대체 왜 저럴까?’에 가깝다. 그러니 독자도 화자인 변호사처럼 우리가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근거 안에 바틀비를 편입시키고자 한다. 

 

그러나 바틀비는 그냥 존재한다.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과 같은 방식으로 존재한다. 그는 그냥 불가해하게 존재할 뿐이고 그는 그냥 부정(negativity)을 욕망할 뿐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바틀비를 볼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 ‘바틀비’는 보지 않은 채 우리가 모두 보았다고 착각하는 것이자, 알지 못하지만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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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속의 바틀비


 

우리는 스마트폰으로 수많은 정보를 본다. 타인의 SNS 속 사진과 근황을 보고 타인을 봤다고 착각한다. 우리는 인터넷 기사 속의 파업하는 노동자들의 모습을 보고 파업 노동자들을 안다고 착각한다. 우리는 커뮤니티에서 기초생활수급자들이 살아가는 쪽방촌의 짧은 영상을 보고는 그들을 이해했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실제로 본 것은 타인의 삶의 만분의 일도 되지 않은 찰나의 순간에 불과하고, 특정 정치적 입장을 취하는 신문사의 기사 세 줄에 불과하고, 다큐멘터리 감독이 특정 의도를 가지고 구성한 영상의 일부에 불과하다. 저상버스와 지하철역에 설치된 장애인용 엘리베이터를 보고 ‘요즘 참 살기 좋아졌다’라고 말한다. 그들은 실제 장애인들이 비장애인들처럼 일상적으로 저상버스와 엘리베이터 시설을 이용하는 것은 보지 못했으나 보았다고 착각한다. 

 

우리가 실제로 아는 것은 그것이다. 누군가에 의해 보이게끔 만들어진 대상일 뿐이다. 특별한, 그러므로 눈에 띄는 존재는 우리가 실제로 관측하기 전에 많은 시선에 의해서 해석되고 재현된다. 우리는 그렇게 변형된 해석과 재현을 그 존재 자체로 이해하곤 한다. 성소수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장애인에 대한 이야기를 보았을 때 이 소수자들은 손쉽게 일반화된다. 일반화되지 않은 존재를 향한 ‘너는 왜 그래?’라는 질문은 무례로 쉽게 읽히지 않는다. 

 

사회 질서로 편입되지 않은 존재를 자신들의 틀 안에서 읽어내려는 행위는 이해나 공감이 아니다. 이는 성소수자를 고쳐야 할 병리적 증상으로 바라보는 일이다. 더 나아가 빈곤층의 문제를 개인적인 노력으로 치환시키는 일이며, 제도적 차원의 문제로 인한 노동자의 안전사고를 개별 인력의 안전 불감증으로 읽어내는 일로 확대된다. ‘나’ 그리고 ‘내가 절대 되지 않을 타자’로 나눠진 세상은 타자에 대해 나의 시선과 관념을 덧씌우고 그 안에서 그들에게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만 존재하라고 명령한다.

 

이들은 스스로 보지 못한 것을 보았다고 착각하였고, 그러므로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반추하지 못한다. 결과는 참담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모른다는 것을, 보지 못했다는 것을, 알지 못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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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해 불가능한 지점에서 독해하기


 

변호사는 바틀비를 질병 상태로 판단하거나 비정상성의 범주에 넣으며 자신이 그를 읽어내지 못한 일에 대하여 변명을 늘어놓는다. 끝까지 자신은 그를 도우려했으며 신사적인 태도로 행동했다고 스스로 되뇐다. 그러나 결국 변호사는 마지막 순간, 바틀비가 과거에 수취인 불명 우편 처리소에서 일했다는 사실을 통하여 ‘선천적으로 불운하고, 무기력하게 절망에 빠지기 쉬운 인간’이라며 결국 그를 이해해내고야 만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바틀비가 비존재가 된 이후다. 한 번도 합리적인 규칙으로 독해할 수 없던 바틀비임을 떠올려보았을 때 변호사의 독해는 무언가 불편하다. 존재가 아닌 비존재에게 강제로 수여된 해석에 불과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바틀비를 어떻게 볼 수 있을까? 변호사에 의해 재현된 바틀비가 아닌 실재 바틀비를 보고 알기 위해서 해야 하는 일은 무엇일까. 


모든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지점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태도에서 시작한다. 우리는 서로를 어떠한 해석틀 없이 투명하게 바라볼 수 없다. 우리 스스로조차 스스로에게 투명할 수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손 한 뼘 정도는 이해할 수 없다. 그만큼 우리는 타인을 그 정도는 이해할 수 없다. 모두를 내가 사는 세계 속 규칙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는 누군가에게는 강압적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세계에서 바틀비가 점심을 먹지 않는 편을 택하게 된 것처럼, 나의 일상은 누군가에게는 작은 일탈이자 평생의 불가해성이다. 

 

그렇기에 변호사의 마지막 ‘아, 바틀비여! 아, 인간이여!’는 변호사의 마지막 깨달음으로 읽고 싶다. 바틀비라는 인간을 평생 이해하지 못함을 인정하는 깨달음의 탄식이라면, 변호사가 바틀비를 이해할 수 있는 물꼬를 튼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타인을 이해할 수 없다는 바를 이해하게 된다면, 우리는 타인을 지금보다 더 이해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나는 타인을 투명하게 이해하지 않는 편을 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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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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