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순간에 영혼을 붙잡아 영원하기 [영화]

영화 <바빌론>과 앞으로도 영원할 영화 속의 우리
글 입력 2023.03.22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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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바빌론>을 보았다. 큰 계기는 없었다. 주위 사람들이 호평 일색이었고, 포스터의 마고 로비가 예뻤고, 원래부터 ‘바빌론’이라는 단어를 좋아했으니까 보았다. 결과적으로 영화 자체에는 만족했지만, 나를 스스로 3시간 동안 상영관에 가두는 고문과 중간중간 했던 헛구역질로 기진맥진해졌다. 바빌론을 보라고 입이 마르도록 권했던 친구들의 영화 취향을 얕본 결과다. 속되게 말해 ‘여러모로 더러운’ 영화였지만, 영화가 하고자 하는 말은 너무나도 뜨겁게 내 가슴 속에 남았다.

 

"영화가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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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가슴 속으로 굴러들어온 영화


 

영화관을 나올 때, 인터넷 어디선가 보았던 ‘영화가 끝나고 바깥을 보았을 때 내 인생이 무언가 다르게 느껴지는 영화가 진짜다’라는 말이 생각났다. 그렇다면 <바빌론>은 나에게 ‘찐’이 될 수 없겠구나, 싶었다. 피곤해진 정신을 이끌고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춤을 추며 사라지던 넬리의 마지막 뒷모습을 생각했다. 버스에 올라탔다. 모국어로 사랑을 고백하던 마누엘을 생각했다. 버스에서 내려 캠퍼스의 운동장을 가로질렀다. 쥐를 먹는 괴인을 향해 열광하던 맥케이를 생각했다. 동기들을 만나 웃으며 인사했다. 영화 속의 시간을 서성이며 울던 매니를 생각했다.

 

아, 역시 영화가 좋아!

 

 

 

필름과 스크린


 

사람이 가득 찬 상영관을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가끔은 상영관 하나를 통째로 대여할 만한 재력이 있었다면, 하고 바라기도 했다. 흔히 말하는 ‘관크(관객 크리티컬. 타인의 관람을 방해하는 행위)’를 나도, 남도 일으킬 걱정 없이 속 편하게 보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했었다. 이런 생각에 자꾸 사람들이 영화관 대신 OTT 플랫폼이 있는 침대 위로 향하는 것 같다.

 

위와 같이 오직 영상과 스크린만을 향하던 생각들은 <바빌론>을 보고 바뀌었다. 나는 여전히 상영관을 통째로 대여할 수 있는 재력을 가지고 싶다. 그렇지만 그곳에서 영화를 혼자 보고 싶지는 않다. 영화라는 예술이 가지는 힘은 나와 그들, 바로 우리 관객이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와 관객은 소통하고 있다. 영화는 자꾸 우리에게 말을 건다. 너의 지나간 시대를 나는 기억하고 있다고, 네 추억과 새로 만들어 나갈 기억이 바로 이곳에 있노라고 말이다. 그 말을 듣는 우리는 홀린 듯 영화관으로 향한다. 상영관 좌석에 제각각의 자세로 앉아 영화와의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다.

 

<바빌론>은 바로 그런 시대를 말하는 영화이다. 연로한 배우의 지나간 전성기, ‘더 크고 사라지지 않으며 의미 있는 것’의 일부가 되고 싶었던 청년의 노력 그리고 천재적인 배우의 훗날 폄훼당한 극적인 연기까지 모두 영화에 박제된다. 보는 내내 저 카메라와 스크린이 등장인물들의 생기를 쫙쫙 빨아올려 성장하는 것 같아 거북하기까지 했다.

 

그들은 모두 몰락하여 떠나고 죽어 기억 속에서 사라진다. 그러나 감독은 평론가 엘리노어 세인트 존의 입을 빌어 말한다. “당신이 죽어도 당신이 나오는 영화를 재생시키는 순간, 당신은 그 안에서 몇 번이고 살아날 거예요.”

 

영화의 마법은 이곳에 있다. 만든 이들이 사라져도 필름만 남아있다면 그들은 그 속에서 영원하다. 수십, 아니 수백 개의 영혼이 그 필름 안에서 죽지 않고 살아있다. 청년 매니는 영원한 것의 일부가 된 것이다. 대사를 듣는 순간 벌컥 올라온 질투를 느꼈다.

 

내가 매일 나의 기록과 씨름할 때, 저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필름 안에서 영원히 기록되겠구나. 적어도 아주 잊히지는 않겠구나. 부러웠다.

 

 

 

영원할 우리


 

기승전결과 결자해지의 원리로, 질투에 휩싸인 나를 감동에 훌쩍이게 한 것도 <바빌론>이었다. 영화는 3시간 내내 영화를 만드는 이들과 과거의 할리우드에 찬사를 보내지만, 마지막 10분 남짓만큼은 관객에게 영광을 돌린다. <사랑은 비를 타고>를 관람하는 우리, 즉 관객들의 울고 웃고 즐기는 모습을 찬찬히 비춘다. 영화에 눈을 고정한 채 온갖 표정과 소리로 영화와 수다를 떠는 관객을 보여준다.

 

수백 명의 생명을 갈아 넣어 그들의 영혼을 먹인 필름이 스크린에 상영될 때 비로소 ‘영화’라는 거대한 예술이 완성된다고 말한다. 그 순간 영화가 붙드는 영혼의 수는 더 이상 수백이 아니라, 수만, 수천, 운이 좋다면 수백만이 된다. 매니 뿐만이 아니라 이 영화를 보는 나 또한 이 ‘더 크고 사라지지 않으며 의미 있는 것’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영화는 순간의 필름에 수백만의 영원을 담아내는 예술이다. 사라지지 않고 신기하게도 계속 무언가가 축적되는 예술이다. 매니가 <사랑은 비를 타고>를 보며 울던 그 순간, 나에게도 주마등처럼 스치던 영화들이, 강렬한 순간들이 있었다. 영화는 영화 그 자체로 기억되지 않는다. 영화관을 박차고 나와서 바깥을 볼 때의 풍경, 엔딩 크레딧이 모두 올라갈 때까지 앉아있던 사람들의 면면, 관람 도중 먹었던 팝콘의 달콤 고소함과 나초의 바삭함, 그리고 내가 영화와 만났던 그 ‘시대.’ 영화의 화룡점정은 영화 바깥에 있다. 아니, 그 바깥의 것조차 영화다. 이러니 내가 이 영화를 곱씹으며 감탄을 참을 수가 없지 않겠는가?

 

"영화가 좋아!"라고 말이다.

   

삼진아웃이다. 앞으로도 동네 영화관을 부지런히 드나들어야 할 것 같다.

 

 

[박주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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