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고독의 색은 보라

글 입력 2023.03.19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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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적 큰집이던 우리집에는 친척들이 자주 놀러오곤 했다. 내가 기억하는 그 때의 우리 가족은 우리 가족의 연대기에서도 일종의 ‘여름’을 보내고 있어서 사람들은 피서객처럼 끊이지 않았고 정원은 항상 따스했던 것 같다. 시끌벅적한 집에는 지금 돌아보면 어렸던 친척어른들의 어린 말들과 젊은 웃음들이 주렁주렁 걸렸다.

 

비슷한 또래였던 사촌들이 놀러 올때면 뜨거운 해가 부드러워지는 늦은 오후에서 초저녁, 시골길을 누비며 강아지들처럼 어울려다녔다. 논밭을 따라 걷기도 하고 쪼로록 앉아 또래 중 가장 나이가 많던 오빠가 지어내는 이야기를 재밌게 듣기도 했다. 그럴때면 친척어른들은 정말로 어린 강아지들을 보듯 밖에서 우리의 세계를 애정과 호기심어린 얼굴로 지켜봤다.

 

또래의 사촌들이 집으로 놀러오는 주말 혹은 공휴일. 모아놓으면 여섯명쯤 되는 사촌 무리에서 나는 가장 막내인 사촌동생 바로 위였고 그 위로 대장노릇을 하던 친오빠와 사촌언니, 중간에 있던 친언니와 둘째 사촌언니가 있었다. 사촌동생은 나보다 네살이나 어려서 우리 중 완벽한 막내였고 나는 그런 막내도 아니고 누군가를 적극적으로 보살펴주는 언니나 누나도 아니였다. 나는 그래서 잘 어울려 놀면서도 속으로는 겉돌고 있다 느끼며 어린 와중에 헛헛함을 경험했던것 같기도 하다.

 

오손도손 사람 많은 유년기에서도 나 혼자 가졌던, 이유를 알 수 없이 진한 기억들도 있다. 비슷하게 사촌들이 놀러왔을 어느 주말 혹은 공휴일. 우리는 아마도 오후에 신나게 뜀박질을 했을 것이고 어느새 다같이 잠에 들었다. 낮잠을 자는 작고 보드라운 육체에는 기분좋은 한 겹의 옅은 땀이 베인다. 나는 아마 단잠을 잤던 것 같다.

 

그러다 어느새 선선한 기분이 들어 깼다. 잠에서 깼을 때는 붉은빛이 사라져가는 초저녁이였다. 피부에 베인 땀이 다 마르고 계절이 갑자기 바뀐 것처럼 느껴졌다. 거실로 나가보니 온 집안은 조용했다. 사람의 소요와 온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순식간에 모두가 세상에서 사라져버린 것처럼. 내가 알던 세계는 없었다. 나는 정녕 다른 세계에서 눈을 뜬 것처럼 느꼈다. 따끈하던 해는 사라진 시간, 작은 형광등만이 거실과 부엌에 하나씩 켜져있었고 유일하게 소리가 나는 것은 지지직 아주 약하게 틀어 놓은, 텔레비전의 열린음악회. 그 때 세계에서 남은 것은 오직 나 그리고 보라빛의 열린음악회였다.

 

그 이후의 기억은 멈춰버린것만 같던 시간이 다시 작동하기 시작한 현실로 이제 미끌어져 들어갈 것이다. 나는 외롭다고 해야할지, 고독하다고 해야할지, 엄마의 젖을 찾는 강아지 마냥 누군가의 온기를 찾으러 마당으로 나갔을 것이고. 아니면 그 미지의 감정을 끌어안고 거실에서 서성거리며 열린음악회를 보다 꿀렁꿀렁 그것을 목구멍으로 삼켰을지도 모르겠다.

 

태양이 지고 스르르 열기가 빠져나간 저녁. 고요한 세상 속 나는 스스로와 비교할 대상이 없어 뒤로 가는지 앞으로 가는지 움직이고 있기는 한 것인지 알 도리가 없다. ‘잠을 깰때마다 세계와 나 사이에 다시 살아나는 저 거리감’*. 그래, 나는 아마도 스스로를 다독였을 것이다. ‘이 낯설고 생경한 세계는 내가 아는 세계다. 내가 기여코 태어난 세계다. 여기는 한 때 온기가 이는 내 보금자리다.’

 

그르니에에게 스스로와 세상간의 거리를 줄여준 것은 자신이 키우던 고양이 물루였다. 내가 나 자신을 바라보는 거리나, 스스로와 세계간의 거리나, 거리가 좁을수록 단순하지만 충만해진다. 그래서 철학이 한껏 거리를 벌여놓으면 몸, 가령 먹고 마시고 춤추는 것이 한껏 다시 줄여놓고 고독은 한잔의 따뜻한 우유 같은 것에 사라졌다가 하나의 낮잠이나 돌연 닥치는 세계의 변화, 날씨, 해가 지는 것 같은 것에 다시 방문한다.

 

침대에 다른이가 있었으면 하는 인류의 오래된 욕구도 자신과 세계 사이를 이어줄 수 있는 일종의 토템을 갖고자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잠을 자고 일어나 옆을 확인한다. 그 존재를 만져보거나 귀를 기울여보면 더 확실하다. 같이 잠에 들었던 그 사람이 여전히 쌕쌕거리면 나는 다시금 살고 있던 그 세계와 연결되고 거리는 줄어든다. 과거는 한낱 꿈이 아니라 누군가 보증해주는 실체의 시간이 되고 나 또한 한낱 유령이 아니라 육체를 가지고 있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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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swaldo Guayasmin, "Ternura"(Tenderness), 1989

 

 

낮잠을 자는 사람은 그러니까 하루에도 두세번씩 다른 세상을 만나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요즘 낮잠을 자주 자지는 않는다. 어쩌다 한번씩 낮잠을 자는 날이면 어릴적과 비슷하게 낯선 기분이 밀려온다. 왕왕 울어버릴 듯 서럽다가도 이제는 이런 기억들이 축적되어 감각들을 붙잡고 느린 곡예를 피울 줄 안다. 침대에 일어나 창문을 열고 고독에게 애도를 표하듯 향을 피우고 전신거울에 비치는 내 형체와 살갗을 빤히 쳐다본다던지. 벌어진 거리를 쑥 당겨 살갗이 마음에 빈 곳 없이 착 달라붙게 하는 것은 무엇보다 사랑하는 타인의 침범이다.

 

저만치로 멀어져 가는 발걸음을 다시금 바닥 위에 붙들어 놓는 누군가의 방문. 그래도 보라색은 빨강와 파랑을 섞은 것이라고, 잠시 죽는 수면과 잠시 태어나는 깨어남 사이에서 겪는 일순간의 생에 의아함처럼, 바다와 강이 섞이는 하구처럼 모였다 퍼졌다, 섞였다 분리되었다, 지구처럼 돈다. 아침, 낮, 저녁, 보랏빛의 커튼콜.

 

이 적당히 무겁고 세련되었던 기억은 작았던 나를 이해시킬 만큼 명료했고 평범한 날의 바람처럼 보잘것 없이 거대했다. 기억을 출력해 빨랫줄에 널어 놓는다면 이 기억은 앞줄에 있을 것이다. 공기가 달큰하고 시원한 오후, 엄마 곁, 바람에 나부끼는 빨래감 사이를 돌아다니던 날들처럼 나부끼는 기억속을 잠깐 헤집을 것이다. 집게핀을 빼고 사진을 살펴본다. 계속 문질러보는 기억속에 이번에는 문을 열고 마당 밖으로 나간다. 아는 얼굴들이 이리저리 흩어져 있고 더 이상 어두워진 날과 구별하기 어려운 호랑나비와 꽃들이 계절의 내음을 풍기는것만 같다. 뒤에는 열린음악회의 카펫이 부드러이 드리운다.



*장 그르니에, '섬', 고양이물루, 40p

 

 

[남영신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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