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미술사 바깥에서 찾아낸 ‘인생 그림’ - 하루 한 장, 인생 그림

글 입력 2023.03.11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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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1] 하루 한 장, 인생 그림.jpg


 

어렸을 때부터 그림보다는 소설이나 만화를 더 좋아했다. 내가 작품을 봄과 동시에 작품 속의 시간도 같이 흐르는 소설, 만화와 달리 그림은 그려진 그 자리, 그 시대에 고정되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 그림을 알아갈수록 그림에도 시간의 흐름이 있고 흥미진진한 이야기도 담겨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눈여겨보지 않으면 알아채기가 어려울 뿐이다. 그림을 충분히 음미할 수 있게 도와주는 좋은 해설자가 필요한 이유다.


저술과 강의, 방송 활동으로 대중에게 꾸준히 미술을 알려 온 ‘아트메신저’ 이소영 작가는 『하루 한 장 인생 그림』에서 무감한 독자라도 그림의 세계에 푹 빠질 수 있도록 격려한다. 640쪽이라는 두께와 큰 판형에 겁먹을 필요 없다. 저자가 소개하고자 하는 것은 ‘알아야 하는 작품’, ‘봐야만 하는 작품’이 아니라 작가 자신의 ‘인생 그림’과 ‘인생 화가’이니까. 여느 미술 책처럼 미술사의 흐름을 따라가지도, 특정 화가나 화풍의 작품을 중점적으로 살펴보지도 않는다. 무언가를 외우거나 해석할 필요 없이 작가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 된다.


목차 페이지를 펼쳐 화가와 작품 이름을 훑어보면 정말 다양한 이름을 만나볼 수 있다. 앙리 마티스나 클로드 모네처럼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만한 화가도 등장하지만, ‘찰스 스프레그 피어스’나 ‘암브로시우스 보스샤트르’처럼 이름을 발음하기도 어려운 생소한 화가도 있다. 마음의 부담을 내려놓고 보면 큰 판형과 두꺼운 두께는 오히려 그림을 잘 감상할 수 있다는 장점으로 다가온다. 무작위로 페이지를 넘기며 끌리는 그림부터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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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이름을 아는 유명한 화가보다 잘 모르는 화가의 그림에 호기심이 생겼다. 그중 하나가 구스타브 카유보트의 <시카고 철도 건널목의 야상곡>과 <비 오는 자정>이다. 책을 처음 펼쳤을 때 바깥에서 비가 오고 있어서였을까 비 오는 풍경이 담긴 그림들이 눈에 들어왔다. 두 그림은 비슷한 구도로 비 오는 풍경을 담았지만 <비 오는 자정>은 유화, <시카고 철도 건널목의 야상곡>은 수채화라는 차이점이 있다. 두 작품을 비교해 보면 유화와 수채화 각각의 매력이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림이 그려진 시대나 화가에 대한 정보 없이 오로지 그림 그 자체에서 그림 보는 즐거움을 느낀 것은 오랜만이어서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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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윌리엄 고드워드의 <근심 걱정 없네>는 그 제목 때문에 자세히 보게 된 그림이다. 그림 속에서 한 여성이 부드러운 카펫 위에 옆으로 누워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무표정에 가까운 얼굴에서 슬픔이나 불안, 욕망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는다. 아름답고 평온한 여성이 주로 나오는 고드워드의 그림은 대중에게는 사랑받았지만, 평론가들에게는 찬밥 신세였다. 인상파와 모더니즘이 주류이던 시절, 신고전주의 풍이었던 그의 그림은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혹평을 받곤 했다.


고드워드가 자살로 생을 마감하자 명예를 중시하던 그의 가문은 고드워드에 대한 기록까지 삭제했다고 하니, 고드워드는 자신이 그린 그림과는 여러모로 대조적인 삶을 살았던 셈이다. 이 책이 아니었다면 이런 작가와 이런 작품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까. 고드워드를 비롯해 이 책에서 소개하는 이름이 생소한 여러 작가들은 우리가 미술사를 따라가느라 놓쳤던 수많은 화가의 존재를 상기시킨다. 미술사에 발자국을 남기지는 못했을지라도 화가로 살며 자신만의 그림을 그렸던 이들이 비로소 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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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의 미술 책이나 전시에서 잘 볼 수 없었던 화가와 그림을 본 다음에는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화가들의 그림도 살펴본다. 대표적인 사람이 빈센트 반 고흐다.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라서, 고흐를 인생 화가라고 꼽기에는 어쩐지 너무 평범하다 느껴질 정도다. 이 책에서 저자는 고흐의 작품 중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책이 있는 정물>과 <성서가 있는 정물>, <프랑스 소설 더미>를 소개한다. <별이 빛나는 밤>이나 <해바라기>로 고흐를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낯선 작품들이다. 이 작품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독서가로서의 고흐의 모습, 그리고 남동생 테오와의 관계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은 고흐와 아버지의 관계다.


고흐가 10년 동안 그린 그림이 879점에 이른다 하니 우리가 알고 있는 고흐의 작품은 얼마나 일부분에 불과한가. 저자는 우리가 이미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화가에게도 충분히 새로운 부분이 있다는 것을, 들여다볼수록 더 많이 보인다는 것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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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이러한 태도는 피에트 몬드리안의 작품을 다루면서도 잘 드러난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몬드리안은 ‘차가운 추상’의 대표 화가로 인식된다. 점, 선, 면과 같은 기하학적 요소를 이용한 추상화들이 그의 대표 작품이다. 그러나 정작 몬드리안을 다루며 저자가 내세운 몬드리안의 작품은 <붉은 옷을 입은 여인>이라는 이질적인 그림이다. 그의 추상화를 떠올리면 같은 화가의 작품이라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다.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몬드리안의 화풍은 40대 이후에 자리 잡은 것이다. '신조형주의'라 불리는 몬드리안의 기하학적 추상 세계가 워낙 유명하다 보니 그가 20대, 30대 때 그렸던 그림은 잘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몬드리안에게 관심을 갖고 굳이 찾아보지 않는다면 알 일이 없는 이 그림들에서 추상화만으로는 다 알 수 없는 몬드리안을 발견할 수 있다. 교과서 속 화가 중 한 명이었던 몬드리안이 한 명의 독립된 예술가로 다가오는 순간이다. 

 


예전에는 미술사에서 중요하지 않은데 대중들만 좋아하는 작가에 대해 나 역시 오해했다. 하지만 예술은 취향의 문제다. 어떤 작품이 더 옳고 그른가를 따지기보다 어떤 작품이 나에게 더 좋은가? 하는 질문도 필요한 법이다. 미술은 수직과 서열로 나누는 경쟁이 아니기 때문이다. 미술은 오랜 시간 취향이 혼재된 공기 같은 문화였다. 다양한 화가가 존재하기에 내가 좋아하는 화가도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164쪽

 

 

목차에 나와 있는 작품을 쭉 보다 보면 미술사의 흐름에서 비켜난 그림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미술사적 관점에서 이 그림들은 ‘의미 없는’ 그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예술 작품을 의미 유무에 따라서만 나누고, 의미 없다고 평가되는 작품을 나에게도 의미 없다고 쉽게 판단해버리는 것이 예술을 감상하는 우리에게 과연 좋은 일일까? 미술사에서 중요하게 평가되는 그림을 그린 화가들조차 자신의 작품이 미술사에서 한 획을 그을 것이라 기대하며 붓을 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들은 그저 자신이 느끼고 받아들인 것을 최선을 다해 그림으로 표현했다. 의미는 그림이 완성된 다음에야 다른 사람들에 의해 부여되는 것이다. 


예술의 소용은 단순히 특정 작품에 대한 지식을 공부하는 게 아니라 그 작품으로 감상자 각자의 마음에 새로운 감상이 싹트기 시작하는 순간에 있다. 하지만 정보가 넘쳐나는 요즘은 자기 자신의 느낌과 판단 없이 그 정보 자체를 받아들이는 과정을 예술 감상과 동일시할 때가 많다. 그런 의미에서 『하루 한 장 인생 그림』 그림에 대한 지식을 익히기보다 그림을 향해 마음을 열도록 도와주는 책이다. 누구의 어떤 그림을 어떤 방식으로 보든 감상자의 자유고, 때론 아무런 맥락 없이 그림에서 느껴지는 당신의 감정 자체가 진실이라고 말해준다. 

 

머리말에서 저자는 독자 각자가 이 책을 읽으며 자신만의 인생 그림을 찾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더불어, 그림과 가까워지려면 시간이 필요하니 이 책을 여러 번 자주 봐 달라고 하기도 했다. 머리말을 읽고 이 두꺼운 책을 손 가는 대로 펼쳐 보며, 효율적으로 뭔가를 해보겠다는 마음이 예술을 상대로는 얼마나 무용한지 새삼스레 느꼈다. 그림으로 시험을 치르는 것도 아니고 작품이 어디 도망가는 것도 아니니까. 손 닿는 곳에 책을 두고 마음이 소란하거나 불안할 때 한 장씩 펼쳐서 원하는 만큼, 원하는 방식대로 그림을 톺아보자. 미술사와 상관없이, 나만의 인생 그림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김소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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