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오븐 위의 얼굴 - 실비아, 살다

예민하고 섬세한 사람
글 입력 2023.03.10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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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시에 시작하는 연극은 귀가를 생각하게 하느라 조금 머뭇거려진다. 집에 들르자니 어중간해서 마로니에 공원에서 시간을 죽였다. 연극이 참 간만이라는 생각에 더불어 공원에서 잠시 숨과 이지를 고르었다. 웬만하면 연극 전에 시놉시스를 보지 않아 온 까닭이란, 늘 시간에 쫓기는 극적인 세-이프를 연발하는 결과였노라고, 잠시 넉넉히 웃었다. 1시간 정도 캄캄한 곳에 앉아 시놉시스를 읽다간, 생각을 하다간, 아직 다 고르지 않은 맥박을 재웠다. 다름 아니라 시놉시스가 그렇게 만들었다. '오븐에 머리를 박은'이라는 글귀에 눈이 잡힌다. 시인과 자살시도와 끝내 죽음, 3번의 시도 끝에 드디어 귀천한 그녀와 하필이면 '오븐에 머리를 박은' 그녀가 떠오른다. 어떤 죽음일까. 조심스러워졌다.


시인에 대한 개인적인 사설을 늘여뜨려 글을 지루하게 만들 생각일랑 없다만, 시인과 자살이라는 두 단어가 결합되면 언제고 떠오르는 모종의 멜랑콜리아가 있다. 김소월을 떠올리면 언제나 더불어 오는 감정. 정교하고 섬세하면서도 아름다운 것들을 위하여, 언어와 다정함을 위하여 살아가던 사람이 결국 자신의 삶을 이기지 못하고 그쳐버리는 것에 대해, 나는 주제넘게도 애도와 연민 비슷한 감정을, 그러나 여전히 찰나만큼만 가지곤 지워버리는 일이 줄곧 있었다. 그리하여 그의 언어가 살아남았으나, 그의 언어만이 살아남아 버린 아이러니에 대해, 언제나 잠깐 먹먹하던마는 금방 깨어 잊어내야만 했다. 


실비아, 제목이 이미 결말을 다 알려버렸듯이, 살았다. 다만 이 작품 속에서만 그러했다. 본 극은 그녀에 대한 헌정인 듯이, 영원히 회귀하는 그녀의 삶을 그려 놓았다. 실비아, 그리고 쉼표 사이에 묵직한 침묵을 가로하고 그녀는 살았다. 그 사이의 침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나는 그려보아야 했다. 그녀는 어떻게 살았고, 그 이전에 어떻게 죽어야만 했는지에 대해 나는 알고자 한다. 


*


실비아는 시인인 아버지와 전통적 여성의 화신인 어머니 두 슬하에서 시인이 되겠다는 꿈을 꾼다. 그녀는 과연 시인이 되었고, 대학에서는 연인도 만난다. 문외한인 나로서는 낯설지만, 장차 유명 시인으로 거듭나는 사내, 이름은 테드 휴즈라고 알리었다. 결혼하고는 남편과 서로 시를 쓰며, 그의 시를 타이핑하고 나의 시를 낭독하며, 꿈 같이 흘러갈듯만 보였으나, 삶이 그렇게 순탄하기만 할 리는 없지 않은가? 


그녀에게는 예민하다는 평가가 꼬리처럼 매달려 있다. 그것은 그녀를 시인이게 하는 힘이지만, 그녀를 얌전한 여인이 되지 못하게 만드는 장애물이다. 얌전한 여인이 되어 잠들어 보기에는 그녀가 가지고 있는 바 영감과 언어에 대한 명민한 감각이 방해했을 것이다. 모르면 몰라, 알면서도 그러할 수는 없는 것이니까. 


예민함과 섬세함은 같은 몸을 하고 있는 두 가지 이름이라고 생각한 지 오래다. 실비아는 시인으로서 섬세한 감각을 몸에 두르고 있는 한편으로, 예민한 사람이다. 적어도 그리 불린다. 그 섬세함이 그녀의 시성 詩性이고, 그 예민함이 끝내 그녀를 오븐 위에 놓인 것이겠지. 그녀의 예민함이란 말하자면, 격정적인 감정을 일으키는 것이고 꿈꾸게 만드는 힘. 달리 말하자면, '점잖은 시인'과 '과묵한 부인'이자, '암전한 여인'으로 거듭나지 못하게끔 막는 힘이다. 그녀 가슴에 솟는 과감한 용암을 본다. 그리고 장차 그녀가 겪어야 할 예정된 아픔들도 미리 보았지. 


그녀는 잘나가는 시인인 남편을 동경하고 사랑하면서 질투도 하였고, 무엇보다 그 앞에 초라해지는 자신을 본다. 남편은 말했다. '네 시는 놀라워, 조금만 정숙한 도덕성을 갖춘다면 더욱 훌륭해지겠지.' 그 말은 함의한다, 나의 언어에 이미 있는 것이 네 언어에는 없다는 것을, 즉 네게 정숙함이 부족하다는 것을. 누군가 그녀의 언어를 두고 우물쭈물 대다간 노-올라운 야성이라고 지칭해본, 그 어색이 급조된 찬사는 이 함의와 섞여 그녀의 언어를, 그 이전에 정신을 어딘가 부족한 것, 꺼림직한 것으로 규정하는 듯하다. 


남편이 잘나가는 시인이었다는 사실은, 그가 동시대성과 당대의식을 아주 훌륭히 짊어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는 어딘가 닮았다. 그가 집으로 초대한 사람들과 닮아 있다. 마찬가지로 잘나가는 문예지의 편집장인 알바레즈와 시인을 남편으로 둔 어느 부인, 그래, 그야말로 정숙한 부인이자 얌전한 여인의 초상인 어느 부인이 집으로 초대됐다.이제 함께 나누어 본 대담 속에서, 질기게 엮인 채로 연대하는 그들의 의식이 엿보인다. 품위를 갖추어야 하고, 고상한 척을 해야 하고, 점잖아야 하고, 정제되어야 하고, 달리 말해 야성적이어서는 안 되고, 서로가 갖추고 있는 명예와 훈장에 누가 되어서도 안 되며, 그를 부정해서는 더욱 안 되고, 그중 어느 하나라도 없는 때엔 당연한 조소를 사는. 그들은 고루함에 닮았다. 고루함들은 실비아를 겨누어 '거듭나야 할 존재'라 소리 없이 규정한다. 


이런 것들이 극 중 시간으로부터 500여 년이 흐른 지금, 종식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이런 연극은 태어나고, 관객은 환희하는 것임에 분명하다. 관객들은 자주 반응했다. 안타까운 소리와 환희하는 소리를 자아냈다. 그것은 우리에게 이 연극의 이야기가 닿고 있다는 것을 뜻하고, 이 극이 그를 성공적으로 그려냈음을 의미한다. 이런 것, 하나의 시대에 단단하게 자리 잡은 의식이자 불문율, 그것이 연대할 때 거인이 되어버리는 것을 우리는 살며 보아왔다. 다만 그때 아마 더 커다랬고, 지금은 보다 적노라고도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직도 누군가는 말한다. 지금이 얼마나 복된 시대인지에 대하여, 그 말은 너와 내 가슴에 쌓인 연대하는 의식, 거인의 의지에 대한 억하심을 겨눈다. 


그들은 말했다. 그대 예민한 자야, 감사할 줄을 모르고 겸손하기를 어려워하는 사람아, 그대만이 특별하다고 착각하지 말라. 그대도 나와 같다. 나와 같이 꿈이 없는 곳으로 가자. 이리 오라, 오기로 꽉 잡은 손을 놓아라, 떨어져라. 아프지 않은 곳, 더 이상 그대를 어딘가 불길하고 다른 존재로 여기지 않는 곳, 모두가 함께인 곳에서 모두 같이 쓸쓸해지자. 꿈꾸지 않으며 굳어가는 대열로 끌어내리려는 듯하다. 다만 점잖게 아닌 체 그러하다. 무대 위의 실비아도 객석에 앉은 그대들도 같은 것을 느껴보았을 것이다.


물론 시대는 어딘가 변해왔지. 얌전한 여인, 이제는 죄스러움이자 두려움인 이 단어가 그 상징을 가져보기에는 얼마나 긴 시간이 필요했을지. 나는 모른다. 내 언어에 지금 묻어나는 것들로만 미루어보셔도 아시리라. 나는 그녀의 삶에서 참 많은 부분 통쾌하고도 들끓는 듯한 감정, 공감을 느끼지만, 단 하나 절대 알 수 없는 것이 있다. 드문드문 아노라고도 말하지 못할 어떤 것들에 대해서는 그저 침묵해야만 한다는 것을, 그 정도의 지혜만을 겨우 가지고 있다. 


그녀는 여인의 삶 위로 '벨 자', 투명한 유리잔이 쓰이노라 말했다. 나는 또한 전통적 여인의 화신인 나의 어머니와 내 여동생 정도를 떠올리며 이해하노라 맨 처음은 생각하려 들기도 하지만, 이내 지운다. 그리고 차라리 반대편의 나로서 느낀 슬픔들을 생각한다. 부디 바라 건대는, 언젠가 나의 예민함 또한 이해받을 수 있는 순간이 찾기를, 가만히 바랄 뿐이었다.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이란, 거기 너희의 이해받지 못할 예민함이 있고 여기 나의 그것이 있다는 사실과 아직 서로 이해할 수 없는 각자만의 외로움에 자리해 있다는 것 정도였으며, 여하간 실비아가 노래하는 앞에서는 같이 감화되고 흥분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유리에 쓰인 삶이 어떤 감각을 자아내는지는 모르지만, 오븐 위에 놓인 얼굴의 감각 정도는 이해한다. 그것은 예민한 사람들, 그리하여 쉬이 몰이해와 조소를 사는 사람들, 어딘가 잘못되었노라 일컬어지는 이의 상기되는 볼과 어리는 뜨거움일지도. 그리 불러보아도 어째, 괜찮을 것 같다. 실존하는 실비아는 그렇게 타오르곤 이내 식어버렸지만, 노래하는 실비아, 극 속의 실비아는 구원받는다. 다름 아닌 자기 자신으로부터 구원받았다. 그게 무엇을 함의하는가. 극의 의도일지는 모르겠지만, 내 가장 애호하는 구절 중 하나에 닮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으로서 거듭나야 한다는 것. 잘나가는 시인인 아버지도, 남편도 아니고 한때는 그토록 인정받기를 원했던 편집장과 그 외 문인과 문단들로부터도 아니. '벨 자'라는 소설을 완성한 미래의 나, 빅토리아로부터 구원받아 스스로 일어서는 것이다.

 

 


 

 

일상 속에서는 좀체 공감을 득하기 어려운 것, 고막을 짜르르 흔들 정도로 쏟아내는 그녀의 격정과 억하심과 분노와 절망까지, 극은 과감하게 가슴으로 밀어 넣는다. 음악의 형태로 다듬어진 그녀의 과감한 감정들은 아름다움이 되어 마음의 벽을 따고 들어온다. 역설적이지. 실비아가 증오하는 남성들, 그녀의 아버지와 그녀의 남편은 모두 시인이었고, 그녀에게 아름다움을 강권했다. 정제된 아름다움, 사전 속에 갇힌 아름다움을 권하며, 이것이 시인이 갖추어야 하는 것이라 정해두었다. 실비아는 그렇게 가두어둔 채로 정제된 감정, 점잖은 체하는 것들을 싫어했음에도, 그녀는 그를 거부하는 과감하고도 야성적인 시인이었음에도, 그녀의 격정이 다시금 무대 바깥쪽에서, 이렇듯 깔끔한 하이 노트의 음색과 그 위에 영근 아름다움으로써 내게 닿는다니. 이건 영영 역설적인 인간의 한 부분을 가리키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격정적인 연극이었다. 실비아의 시성 詩性처럼, 점잖은 체 하거나 짐짓 아닌 척 빼거나 하는 서투름 없이, 곧대로 전개되는 서사와 무드와 주제의 합일이 좋았다. 말하고자 하는 바를 우직하게 밀고 나아가는 과정에서 예기치 못하게 파생될 수도 있을 심리적 저항은, 역시나 완벽한 가창으로 헷징한다. 연이어 일어나는 카타르시스의 파상 속에서 모두 전율했다. 무대가 끝나고 관객들은 일제히 일어나 박수를 쏟는다. 비록 설 자리가 넉넉잖아 혼자 앉아 있었다지만, 충분히 기립박수로 되갚을만한 무대였다. 섬세함과 예민함, 격정과 카타르시스, 싸늘한 몰이해로도 꺼트릴 수 없던 그 뜨거움과 같은 연극, '실비아, 살다'이다. 

 

 

[서상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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