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절벽 먼 곳의 세계로 [도서/문학]

신철규,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문학동네, 2017)
글 입력 2023.03.09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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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가 후들거려 결코 절벽 끝에 서볼 수 없었다. 절벽 끝에 선다는 마음은 기꺼이 허공으로 몸을 던져볼 용기, 혹은 가없는 덤덤하게 아래를 내려다볼 담력을 가져야 한다는 강요의 문제다.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없고, 맞고 틀림도 알 수 없는, 날카로운 벼랑의 위아래로 뻗어 있는 저 말간 하늘은 오로지 절벽 끝에 다다라서야 만끽할 수 있다는 것. 그러므로 드넓은 저 하늘을 꿈꾸는 너 역시 우선은 절벽 끝에 서야만 한다는 것. 그것이 절박한 절벽의 은유다.

내가 나의 절박함을 관찰하는 순간 내 발 아래가 벼랑으로 변하는 것이 절벽의 양자역학이다. 단 한 걸음 앞이 깎아지른 절벽이며 돌이킬 수 없는 공허라고 믿을 때 나는 기어코 강해지지만, 나의 강함이 충분한지 허공으로 내딛기 전에는 알 수 없다는 것이 절벽의 물리학이다. 그것이 먼저 추락하거나 이미 날고 있는 저들이 내게 전해준 진실이라면, 나는 결코 절벽 끝에 서본 적이 없다.

자신을 절벽 끝으로 몰아세우지 못하는 스스로의 나약함을 한탄하는 사이에도 누군가는 멀리서 절벽 끝을 바라보며 그 슬픔에 대하여 쓴다. 자기 자신을 두려운 절벽 앞으로 몰아가야 하는 세계의 당위를 한탄하면서, 우리를 절벽 아래로 당기는 지구, 그 중력만큼을 슬퍼하면서 시를 쓰는 사람.

신철규의 시집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문학동네, 2017)를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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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긴 식탁에 앉아 밥을 먹는다
기도하는 두 손에서 솟아나는 또다른 두 손

높은 성에 사는 귀족들은
왜 그렇게 긴 식탁에서 밥을 먹었을까
기도가 끝날 때까지 얼마나 많은 침을 삼켰을까

소방차의 사이렌 소리가 저녁의 공기를 뒤흔들고 지나간다
놀이터에서 뛰어놀던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그치고
시소의 한쪽 끝에 앉아 반대편 의자 위에 걸터앉은 붉은 해를 바라보던 한 아이는 울음을 터뜨린다

우리가 밥을 먹으려고 고개를 숙일 때 이 세계의 울음과 단식은 사라진다

- 「식탁의 기도」 중에서
 
 
“세상에서 가장 긴 식탁”이 있다. 그곳에 앉아 식사를 하기 위해서는 그 길이만큼이나 긴 인내와 고난의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가 초조하게 음식을 기다리면서 “얼마나 많은 침”을 삼키고 있을 때, 어딘가에서 하루가 저무는 것을 지켜보던 어떤 아이는 “울음을 터뜨”린다. 놀이의 시간에 애써 잊고 있던, 이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굶주림을 하루의 끝에서 결국 마주하고 만 것. 아이의 울음은 “공기를 뒤흔들고 지나”가는 사이렌 소리처럼 요란하지만, 식탁에 음식이 놓이는 순간 우리는 “이 세계의 울음과 단식”과 차단된다. “밥을 다 먹고 설거지를 하고 배가 꺼지”고 나서야, 그렇게 한참이 지난 뒤에야, 우리는 아이의 울음을 설핏 떠올리며 다시 “뜨거운 밀랍을 귀에 붓고” 기도를 시작한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와 같은, 점차 굳어질 “딱딱한 기도”를.

기다려야만 먹을 수 있고, 기다림 끝에도 먹지 못할 수 있다. 시인이 보는 세상은 이처럼 길고 단단하다. 견디기 위해서 인내와 고난이 반드시 필요하며, 때로는 인내의 결과가 극복의 불가능성으로 산출되는 잔혹한 현실 앞에서 우리는 좌절하며 아이처럼 운다. 어쨌거나 우리는 일단 주린 배를 채우며 하루를 견뎌야 하는데, 그렇게 버텨낸 하루가 모인다고 해서 전체의 삶이 온전해지는 것 역시 아니다.
 
 
오늘도 누군가 옥상에서 지상으로 몸을 던졌다
가해자에게도 피해자에게도 이 세계는 지옥이었다
자신의 몸에 불을 지른 사람은 불을 끄기 위해 바닥에 뒹굴다가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살 타는 냄새가 화면을 뚫고 나와 거실을 가득 메운다
가슴 안에 불을 담고 사는 사람
고개를 숙이고 자신 안의 절벽을 바라보는 사람
오늘도 누군가는 사랑의 기억으로 옛 애인의 집 유리창에 돌을 던지고
그녀는 유리 파편을 씹으며 사랑의 기억을 지운다

- 「생각의 위로」 중에서
 

하루의 끝, “저녁 뉴스”에서 전달해주는 “이 세계는 지옥”이다. 이 지옥은 권선징악의 도덕 법칙마저 벗어났기에 “가해자”에 대한 형벌인 동시에 “피해자”를 향해서도 모습을 드러낸다. 선악의 구분 없이 이토록 가혹한 지옥은 시인에게 내세에 대한 관념이 아니라 “샅 타는 냄새”가 가득한 “자신 안의 절벽”에 대한 자각으로서 실존한다. 이런 지옥이 세계의 진짜 모습이라면, 우리는 시인처럼 “밤늦게 돌아온 아내”의 손을 붙잡고 “당신의 손금을 손끝으로 따라가”며 같은 운명임을 자각하는 일로 위로를 얻을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고통만이 존재하는 허탈한 세계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절벽 끝으로 스스로를 내몰며 절박하게 비상(혹은 더 높은 확률의 추락)해야 하는가. “너무 무거워서 엎드려 울 수밖에 없는” 눈물을 흘리면서,, 우리의 “등에 걸터앉아” 허리를 짓누르고 조롱하는 “신”(「눈물의 중력」)의 존재를 저주하면서 울 수밖에 없을까. 시인은 단호히 고개를 저으며 결연한 표정으로 말한다. 이 지옥의 세계를 탈출하는 방법은 ‘건국’이라고.

 
아이 둘이 모래 위에 집을 짓는다
약간의 물기가 있는 모래로

흙과 자갈 사이에는 무수한 크기의 모래 알갱이가 있습니다

한 움큼씩 떠올린 모래로 모래산이 만들어진다
토닥토닥 열 손가락을 쫙 펴고
흥겹게 노래를 부르며

딱딱해진 케이크 같은 모래에 구멍을 뚫는다
구멍은 창이 되고 문이 되고 방이 된다

작대기 하나로 깃대를 세우고 비닐 조각으로 깃발을 만든다
이 세계에 없는 나라가 만들어진다

- 「모래의 집」 중에서
 
 
아이들이 새로운 나라를 만들고 있다. “물기가 있는 모래”를 뭉쳐서 산을 쌓고, 창을 만들고 문을 단다. “깃대를 세우고 비닐 조각으로 깃발을 만”들면 작은 해안가 위에 “이 세계에 없는” 새로운 나라가 완성된다. 놀이처럼 흥겨운 리듬 위에서 순식간에 지어진 이 세계는 어쩐지 한없이 약해 보인다. “멀리 있던 파도가 가까워”지면 깨지고 부서질, 그래서 자주 “위태롭”게 변해버릴 작은 세계. 시인은 이토록 연약한 나라가 피와 불로 가득한 지옥보다는 나은 세상이라고 기대하는 것일까. 겨우 “작대기로 금을 그으며 파도를 향해” 맞서는 방식으로 새로운 세계를 지킬 수 있다고 낙관하는 것일까.

이미 끔찍한 지옥의 세계를 오래도록 지켜본 시인의 상상은 그처럼 순진하지 않다. 이런 건국의 의의는 보존이 아니라 오히려 파괴에 있다고, 시인은 역설한다. 새롭게 지어진 세계는 “시멘트처럼 굳은 표정으로 / 금방이라도 쩍쩍 갈라질 것 같은 얼굴로” 붕괴되며 끝날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적어도 “자신들의 손바닥과 발바닥으로 지은” 우리의 세계를 직접 허물 수도 있을 테다. 오직 우리의 힘으로 세우고 우리의 힘으로 부술 수 있는 우리의 세계. 시인은 이런 세계의 질서가 유지될 수 있도록 만드는 단 하나의 규칙을 엄중하게 선포한다.

 
등과 등 사이에 사람이 있다
서로를 껴안을 수 없는 샴쌍둥이처럼
서로의 등 뒤에서 눈이 내려도 돌아볼 것 같지 않은 사람들
당신 뒤에 서 있다고 해서 모두 적은 아닙니다
(…)

여기는 믿음의 나라.
한 치의 의심도 허용치 않는 나라
믿어라, 믿어라, 믿어라
의심이 뭉게뭉게 피어오른다면 당장 이 버스에서 내려라
당신은 불 꺼진 집가지 부르튼 발로 걸어야 한다

- 「등과 등 사이」 중에서
 
 
이러한 세계는 반드시 “믿음의 나라”여야 한다는 것. 등을 맞댄 사람들끼리 “한 치의 의심도 허용치 않”아야만 한다는 것. 일말의 예외도 허용하지 않기에 어쩌면 폭력에 가까운 이 강요는 이미 지옥의 세계를 경험한 자들의 동의 속에서 정당성을 얻는다. “매캐한 연기”처럼 피어난 의심은 다시 매서운 절벽을 깎고 반드시 새로운 지옥을 불러올 테니, 우리는 “믿어라, 믿어라, 믿어라” 스스로를 끊임없이 세뇌해야 한다. 무한한 믿음이 붕괴되는 순간 유한해진 세계는 다시 무너져야 한다.

시인은 깊고 아득한 수많은 슬픔을 껴안으면서 새 나라의 청사진을 품는다. 지옥도 신도 참견할 수 없는 절벽 먼 곳의 세계. 시인의 위로는 아주 먼, 이런 세계에 있는 것 같다. 어쩐지 이 세계에서만큼은 가능한 한 오래 머무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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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승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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