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궤도를 잃은 우주여행자 [문화 전반]

내가 책장을 넘기자, 그는 내 손을 잡아주었다.
글 입력 2023.03.09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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궤도를 이탈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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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나는 궤도를 잃었다.

 

분명 얼마 전까지 별에 이끌려 그 주위를 돌았다. 별이 나를 밀어내도 가까워지려고 안간힘을 썼다. 정신 차리고 보니 망망한 어둠 속에 있었다. 여기가 어딘지, 나는 어디로 향하고 있는 건지, 이 방향이 맞는 건지. 내가 한없이 항성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숨 막히는 어둠 속에서 두려움과 우울이 엉겨 붙었다. 무전기를 들 힘도 없었다.

 

우주를 입체적으로 본다면, 우리는 한없이 태양 주위를 돌면서 어디론가 향하고 있다던데. 궤도를 잃은 나는 얼마나 멀어지고 있는 걸까? 일상을 잃어버린 채 나는 바닥에 눌어붙고 있었다.

 

오래전부터 나는 궤도를 잃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깨닫지 못했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때로는 내가 미워서 방치했다. 뭍으로 던져진 물고기처럼 나는 호흡을 잊어버렸다. 매일 밤 끝도 없이 바다에 빠지는 꿈을 꾸었다. 뭍에서도 바다에서도 숨을 쉬지 못했다.

 

우주에서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사위가 보이지 않아서 나는 글을 읽어도 음악을 들어도 감흥이 없었다. 그것과 나 사이에는 매질이 없었다. 시간은 나를 통과하고 있었고 나는 때때로 시간의 흐름마저 느끼는 것이 힘들었다.

 

 


아아, 들리나요?



견디다 못한 사람들이 문을 두드렸다. 나는 그들이 나를 내버리길 바라면서 한편으로는 바라지 않았다. 몸을 일으킬 힘이 없었다. 방은 발 디딜 틈 없이 어지러웠다. 방구석에 쌓아놓은 책 무덤이 무너졌다. 쾅쾅 두드리는 소리를 피해 반납 기한이 한참 지나 연체된 책을 펼쳐 들었다. 언 땅에 봄볕이 스미듯, 책을 펼쳐 읽는 순간 어떤 문장 하나가 들어왔다.


 

“불행이 바라는 건 나를 홀대하는 거야. 내가 나를 하찮게 여기고 망가트리는 거지. 난 절대 이 재앙을 닮아가진 않을 거야. 재앙이 원하는 대로 살진 않을 거야.”

 

(최진영, 『해가 지는 곳으로』 中)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이 이야기가, 목소리가 나를 묵묵히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때때로 어떤 우연은 필연이라 믿고 싶을 만큼 기적 같다. 나는 그 문장을 따라 읽었다. 내 마음에 스며든 목소리가 내 목소리를 입고 방안에 울려 퍼졌다. 그제야 소리가 들렸다. 나는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폐허가 된 지구, 서로를 짓밟는 가혹한 세상, 그러나 무너지더라도 다시 상대의 손을 잡는 마음. 나 스스로를 홀대하고 방치했던 것이 생각이 났다.

 

책상의 물건을 조금씩 치웠다. 그 계절엔 잃어버렸던 물건들을 하나씩 찾았다. 꺾여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주인공처럼, 해가 지는 곳으로 언 발을 옮기는 인물처럼, 나는 느리지만 조금씩 몸을 움직였다. 그렇게 하나씩 했다.

 

할 수 있는 것부터, 차근히. 내 눈앞의 현실에서, 미운 나에게서 도망치고자 독서를 했는데 결국 나는 다시 나에게로 돌아왔다.

 

 

 

이야기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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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작품에는 저마다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우리가 그것을 향유하고자 손을 뻗으면 예술은, 이야기는 우리의 손을 잡아준다. 그리고 간직하고 있던 자신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그것은 우리가 마음의 준비를 하고 손을 뻗기 전까지는 묵묵히 목소리를 들려줄 기회를 기다리는, 내 호흡에 맞춰주는 다정한 세계다. 언젠가 그 이야기는 내 속에 들어와 숨어있다가 필요한 때에 나타나 제 목소리를 들려준다.

 

삶의 어떤 순간마다 우리는 이야기를 통해 어디론가 나아가고, 삶을 견디고, 때로는 뒤돌아본다. 이야기는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서 나오고, 내 안에 깃든다는 점에서 우리의 삶은 가능성을 품은 곳이 된다. 우리는 이야기를 통해 다른 가능성을 보고 멀리 여행을 떠날 수 있다. 동시에 이야기에 이입하게 되면서 결국 나를 마주하게 된다. 결국 이야기를 품는다는 것은, 읽는다는 것은 세상과 연결되는 일인 셈이다.

 

최근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이야기들이 많이 나온다. 그러한 적나라한 이야기들은 흥미를 끌 수도 있지만 상처를 주기도 한다. 인간의 악한 실체를 까발리는 이야기보다 슴슴하더라도 선의를 보여주는 이야기를 더 보고 싶다. 우리는 필연적으로 사람과 부딪치며 살아가기 때문에 사람에게서 상처받을 수밖에 없다. 선한 이야기들은 우리가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사람에 대한 신뢰를 회복시켜준다. 이야기보다 사람이 먼저 있기 때문에, 세상 어딘가 누군가의 상상 속에 선한 인물과 이야기가 있다는 건 그런 존재들이 분명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뜻일테니까.

 

나는 이야기의 힘을 믿는다. 이야기는 내 양어깨에 손을 올리고 나를 다독이고 격려해주었다. 앞으로 행운이 뒤따라 운명 같은 좋은 이야기들을 많이 품을 수 있기를 바란다. 다채로운 목소리를 갖게 되어 더 나를 잘 보듬어주는 내가 되고 싶다. 또 이야기를 써나가고 싶은 사람으로서, 나도 좋은 이야기를 쓰고 싶다고 소망해본다. 좋은 이야기에 대한 고민을 계속 이어 나가려 한다. 나는 또 어떤 존재가 될 수 있을까. 항성이 되기를 소망하며, 또 운명처럼 항성을 만나길 바라며 계속 여행해야겠다. 이 넓고 푸른 우주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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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하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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