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지배하지 못한 것들을 지배하려한 인간의 비극 - 연극 '슈미'

글 입력 2023.03.09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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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미 포스터.jpg

 
 

 

1. 움직이지 않는 하얀 여자, 슈미


 

대리석으로 된 의자가 무대의 중앙에 놓여있다. 왼쪽 후방에는 동그란 거울이, 대리석의 양 끝에는 물건들이 쌓여있다. 왼쪽에는 이사 온 새신랑 경남의 짐이 쌓여있다. 오른쪽에는 그들의 신혼생활을 축복하기 위한 꽃들로 가득 차 있다. 새신부 슈미는 권태로운 표정으로 대리석 중간에 눕는다. 이 하얀 대리석 위에 시체처럼 누운 슈미는 도자기 인형처럼 비인간적으로 보인다. 그는 방에 가득 찬 생화의 향기에 역겨움을 느낀다.

 

연극 <슈미>는 생기 없고 귀족스러운 여인이자 파괴하는 남근을 갈망한 여자, 슈미와 그를 둘러싼 수많은 인간상을 다룬 작품이다. 내가 여기서 남근이라는 단어를 썼다 해서 어떤 거창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길 바란다. 남을 해치고 위협하는 총은 이 연극의 전체적인 맥락을 고려할 때 그 외의 표현으로 표현하기 어렵다.

 

늦게 일어나 시체처럼 누워있는 슈미는 아내의 의무, 자식을 낳는 어머니의 의무, 생산적인 행동을 하려는 인간의 의무, 하다못해 어떤 생기있는 활동을 하고자 하는 최소한의 생물의 의무조차 행하지 않는다. 건조한 표정과 말투는 그가 그것을 거부한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 같다. 그런 그가 유일하게 생기를 되찾는 순간이 있다. 바로 그가 권총을 들 때다. 그때 그는 좀 더 주체적이고 열정에 휘감기는 것처럼 표현된다.

 

연극 <슈미>에서 권총은 그가 삶에 보여줬던 어떤 거부를 좀 더 노골적이고 폭력적으로 보여주는 장치다. 슈미가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삶을 거부한다면, 슈미의 권총은 폭력을 통해 살아가려는 인간과 의지를 꺾고 부숴버리는 방식으로 파괴함으로써 거부한다. 이 파괴과정에서 슈미는 비로소 자신의 힘을 느낀다. 그래서 작품 내내 슈미는 누군가를 조종하고,파괴하길 바라는 잔혹한 모습으로 묘사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슈미에게 파괴와 죽음은 힘의 회복과 고통의 회피를 의미한다. 이 변형된 욕망의 변형으로 그는 결국 스스로 파괴된다.

 

이 부분에서는 해석이 갈리겠지만, 나는 슈미가 남근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권총으로 대체한다고 생각한다. 남근이라고 표현했지만, 정확히는 남성들이 영위해왔던 어떤 힘, 여성인 자신에게 완전히 계승되지 않은 힘이라고 좀 더 풀어쓸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한 것은 몇 가지 근거가 있다. 우선 슈미는 전 생애에서 남성들의 지배를 받는다.

 

작품이 현대사회로 옮겨온 덕에 어떤 페미니즘적 메시지가 강조되기보다는, 현대인의 욕망과 상실이 좀 더 생생하게 묘사된다. 슈미의 이야기에서 아버지는 간접적인 방식으로 존재를 드러낸다. 그의 부유하고 생기 없는 삶의 근원은 근본적으로 아버지한테서 왔으며, 아버지는 일탈클럽을 방문하고 비싼 술을 마실 정도로 부유했다.

 

슈미가 받쳐준 쟁반 위에서 서있는 삶을 영위하고 있다는 도규의 비아냥처럼, 슈미는 돌봐주는 남성들 밑에서 부유한 삶을 꾸렸다. 집안의 경제가 무너졌을 때, 그는 자신을 사랑하던 경남을 통해 삶의 수준을 유지하고자 한다. 이전에는 아버지였고, 지금은 경남을 통해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장식장 안의 도자기 인형처럼 존재하면서 아버지의 공허한 삶의 철학을 이어갈 뿐 삶의 주체로 살아가지는 못한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의 일부만 계승한 불완전한 존재로서 살아간다. 그러던 중 슈미는 청소년기에 어느 날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유완을 만나고, 그를 조종함으로써 힘을 회복하고자 한다.

 

슈미는 유완이 시련을 통과하거나 자신의 총으로 인해 자살하도록 종용한다. 이 두 가지 선택에서 슈미가 유완이 자신의 또 다른 분신으로 여겼음이 드러난다. 슈미는 유완이 끔찍한 삶의 고통 속에서 스스로 선택하는 방식으로 '삶을 긍정하는 것'하거나, 자신의 조종, 힘, 남근을 상징하는 총을 통해-그것을 긍정할 수 있는 방식으로- 파괴되길 바란다. 

 

전자의 선택을 하면 슈미는 유완을 통해 죽음보다 강한 삶의 본능이 있음을 긍정할 수 있게 되고, 후자의 선택을 하면 자신의 남근이 남성을 파괴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부정되었던 남근을 회복한 것이 된다. 하지만 이 유치한 판타지로 얼룩진 선택지 조차 슈미는 또다른 남성 유완에게 넘기고, 그 자신은 권태로운 삶을 이어나간다.

 

그래서 슈미가 권총을 들었을 때 비로소 살아있는 것처럼 묘사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에게 권총으로 대표되는 남근의 세계는 처음부터 빼앗겼던 것이고, 자신을 파괴해왔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똑같이 남의 삶을 강탈하고 파괴함으로서 자신의 힘을 확인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 과정조차도 직면하지 못했던 슈미는 자기 자신을 좀 더 안전한 곳에 두길 원하고-경남의 품 안, 그늘에서 비극을 바라보길 원하다-, 화려한 미사여구로 자신과 유완의 삶을 거창하게 꾸며낸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끓어오르는 욕망을 불완전하게 대체한 것이기 때문에-그 주체 역시 대행자가 수행하지 않았는가- 만족에도 이르지 못하고 그 자신을 스스로 파괴하게 된다.

 

슈미는 아름답고 오만해 보이지만, 삶의 고통 속에서 잔뜩 움츠러드는 선택을 반복한 유완을 닮았다. 슈미가 유완을 아버지와 같은 우상이나 자신의 권총 아래에 무릎꿇는 신하가 되는 슈미만의 시련을 이겨낼 '대행자'로 선택한 것은, 유완이 그와 마찬가지로 연약한 존재, 남근을 잃어버리고 삶의 고통에 허덕인 나머지 죽음에 이끌리는 나약한 존재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쌍둥이처럼 서로의 존재를 확인했지만, 평행선을 그리다 스스로를 파괴하는 선택만 반복했다. 그래서 이 작품이 더욱 비극적이다.

 

 

 

2. 수많은 빛으로 뻗어 가는 인간의 욕망


 

연극 <슈미>는 기본적으로 슈미의 파괴적인 방식으로 삶을 갈구하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그런 슈미를 둘러싼 다른 인물들은 슈미와 대조되고 영향을 주고받음으로써 작품의 깊이를 더한다. 우선 그와 부부관계를 맺은 경남은 도덕적이고 성실하지만 슈미의 불안과 분노를 재빠르게 눈치채지 못하는 둔한 성격의 소유자다. 그는 슈미를 사랑하긴 하지만, 그 안에 내재하여있는 것들을 바라보지 못한다. 그는 슈미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물질적인 부분만을 충족해준다. 그는 많은 빚을 져서 값비싼 집으로 이사 왔다. 하지만 그는 불안해하지 않는데, 그가 곧 교수로 임용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완의 등장으로 인해 이조차 불안해진다.

 

경남이라는 캐릭터는 상식과 정상적인 기반에 서있다. 그는 진심으로 주변인들을 아끼고 헌신하지만, 그 이면을 살펴보려 하지 않는다. 그는 유완으로 인해 자신의 교수 자리가 불안해진다는 것을 알고 유완이 알코올중독임을 알면서 알콜을 내민다. 유완이 잃어버린 원고를 보고 돌려줘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을 끝까지 챙겨서 보관하기보다는 아내인 슈미에게 그것을 건네준다. 유완이 그것을 잃어버렸다는 것 조차 몰랐다는 덧붙인 말 속에서는 대신 처리해달라는 메시지마저 느껴진다. 결국 슈미가 그것을 파괴했다고 이야기하고, 아이가 생겼다고 하자 지금은 유완이 먼저가 아니라는 말을 한다.

 

그래서 경남은 겉보기에 좋은 남편이지만, 그는 자신과 타인의 이면을 직면하지 않는다. 겉으로 보기에 번드르르한 아내와 집을 얻은 삶이 비극적이냐는 슈미의 비아냥처럼, 경남은 겉표면을 보호하는 데 힘쓰고 다른 진실을 무시한다. 슈미가 준 목걸이를 기억하고 차지만, 신혼 여행 내내 가족의 상실로 고통스러운 슈미를 조금도 돌보지 않는다. 슈미 입장에서 그는 진실로 어떤 만족도 주지 않는 남성으로 묘사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삶은 위선으로 가득 차 있다.

 

두 번째, 도규는 슈미의 남성 버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슈미만큼이나 도규도 타인을 조종하고 파괴함으로써 자신의 힘을 회복하고자 한다. 그는 슈미의 하인을 자처한다. 그의 아버지는 슈미 아버지의 기사였으며, 그 역시 슈미를 자신 상관 모시듯 하다. 하지만 그의 내면에는 슈미를 지배하고 싶다는 욕망이 가득 차 있다. 그것은 사랑이라기보다, 어떤 지배욕에 가까운 것이다. 나이가 든 그는 이제 검사가 되어 권력과 돈을 소유했지만, 만족하지 못하고 슈미를 욕망한다. 그는 슈미의 삶을 끌어내리고 자신의 밑에 두기 위해 온 정성을 쏟는다.

 

총과 실탄을 주어 슈미의 삶을 꼬이게 한다거나, 집을 구매하는 데 많은 돈을 빌려준다든가 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런 모습은 작품이 후반을 향해 달려갈수록 극화되는데, 개처럼 다리를 하나 올리고 슈미에게 오줌을 싸는듯한 시늉을 하는 부분에서 정점을 찍는다. 슈미는 도규의 이런 면모를 잘 이해하고 있었고, 그에게 지배당하지 않기 위해 자살한다.

 

세번째, 애경은 슈미와 대조되는 존재다. 처음에 애경은 슈미와 비슷한 삶을 산다. 그는 적당히 교양있어 보이고 아름답고 젊은 아내로서 외교관과 사랑없는 결혼을 했다. 하지만 유완을 만나면서 그는 슈미와 같은 파괴적 삶을 살기보다 생명력 넘치는 삶을 살아가고자 한다. 유완을 처음 만났을 때 그는 허름한 곳에서 유완과 섹스를 하고, 그와 합심하여 논문을 쓴다. 애경이 그림을 그리고 유완이 글을 쓴 논문은 작품 내내 '아이'라고 묘사된다. 슈미가 홀로 생명을 파괴함으로서 자신의 힘을 확인하고자 하였다면 애경은 다른 사람과 합일하여 새로운 생명을 낳는다.

 

그래서 애경은 유완을 구하기 위해 사랑없는 가정을 버리고 서울로 돌아온다. 그는 슈미와 다르게, 하다못해 유완과 다르게 '사랑'을 긍정하고 자신의 '아이'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개인적으로 슈미가 유완에게 잔인하게 군 것은 유완과 애경이 자신과 다르게 죽음보다 생명에 가까운 삶을 살아간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애경은 유완의 삶조차 불분명할 때조차 자신들의 아이를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이 작품에서 그는 가장 자신의 삶에 직면한 사람이다. 사실 슈미가 그토록 바랬던 자유와 삶의 본능의 화신이 그 안에 있었다. 그는 모든 것을 잃어도 유완과 유완의 아이를 되찾기 위해 몸부림친다.

 

네번째, 유완은 슈미의 대행자이자, 놀라울 정도로 비슷한 인물이다. 그는 유혹에 쉽게 굴복하고 삶의 불안을 이겨낼 용기가 없다. 그는 자신과 비슷한 슈미와 만나 삶의 고통을 함께 끊고 자유로워지길 바라지만 슈미가 정말 바란 것은 죽음이 아니라 힘의 회복이었다. 슈미를 잃은 그는 자유라는 명목 아래에 소모적인 삶을 살다가 애경을 만났다. 그때야 그는 제대로 된 삶을 살고, 자신의 천재성을 발휘하여 첫 번째 '아이'를 낳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애경과의 관계 속에서도 그는 사랑을 긍정하지도 못했고, 슈미로 대표되는 자기멸절의 불안을 이겨내지도 못했다. 그는 애경으로부터 도피하고, 슈미를 찾아간다.

 

유완은 슈미의 조종에 휘청거리지만, 그는 삶의 본능으로 대표되는 애경을 완전히 저버리지 못한다. 그는 유혹을 이겨내지도 못하고 슈미가 건넨 총을 가지고 돌아오지만, 차마 그것을 스스로 쏘아 자살하지는 않는다. 그는 자신이 잃어버린 논문을 찾지 못해 울부짖고, 하루종일 그것을 찾기 위해 돌아다닌다. 슈미가 자살 방법까지 지정해서 준 권총은 그의 바지 안에 들어있다가 불행한 사고로 그의 하복부를 뚫었다. 그래서 유완은 슈미 우상도, 신하도 될 수 없었다.

 

유완의 연약하고 애처로운 모습처럼 인간의 삶은 결코 아름다운 작품이 될 수 없다. 슈미는 유완을 통해서 그 어떤 것도 확인하지 못했고, 침착한 모습으로 상상의 피아노를 쳐도 그들의 삶이 더 아름다운 것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슈미는 자신의 삶을 파괴하는 방식으로 작품을 마무리한다.

 

 

 

3. 나가며


 

작품을 감상하는 내내 에두아르트 폰 카이절링의 <하모니>가 생각났다. 그 작품에 나온 비인간적으로까지 느껴지는 귀족적 여인, 탐미적이고 죽음에 가까운 하얀 여인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슈미와 그녀는 귀족적 삶과 권태에 찌들어 있고, 그들은 늘 죽음에 가깝게 묘사된다. 우울증과 비슷한 증상을 보이는 이들은 그 안에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고 회복할 마음조차 거부하는 것처럼 보였다.

 

비슷해보이는 이들의 공통점은 이들이 단 한번도 삶의 주체로서 살아본 적 없다는 데에 있다. 슈미의 원작, 입센의 헤다 가블레르에서는 좀 더 여성주의적 시각으로 이 부분을 강조하고, 하모니에서는 남성 주인공의 불안과 판타지로 엮여 좀 더 모호하게 묘사된다. 그것이 좀 더 낭만적으로 묘사되건, 아름답게 묘사되건 하얀 여인들의 삶 자체는 폐허라는 점은 동일하다. 그 두가지 다 당대의 여인들에게는 진실이었을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이러한 비극을 재현하는 것은 좀 더 복잡한 해석을 유도한다. 현대사회에서 입센과 카이절링의 작품을 쓰던 때와 다르게 여성은 더이상 남성에게 종속되는 존재가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공유한 파괴적 남성적 힘 상징은 개인과 사회에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다양한 방식으로 폭력적으로 압박할 수 있으며, 누군가는 그것을 파괴적인 방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남성적이라는 단어를 썼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그것은 성별에 국한되는 것도 아닐뿐더러 현실적인 대상이 아닌 환상에 기대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쓴 이 모든 단어가 기묘한 방식으로 해석되지 않길 바라는 바이다.

 

다시 돌아와서, 현대인들은 모두 자신만의 남근과 하얀 여인들을 가슴 한켠에 가지고 있다. 그 형태는 다양할 것이며, 그것을 우리 안에서 어떻게 소화하느냐에 따라서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될 것이다. 그 결말이 비극이라 할지라도 슈미와 그 주변인물들은 이러한 삶의 역동성에 대항해온 인물들이고, 그 모습은 극화되었을 지언정 우리를 닮았다. 연극 <슈미>는 그래서 참 멋진 작품이다. 글을 쓰고보니, 이 멋진 작품에 관한 좀 더 다양한 사람들의 해석을 듣고 싶어졌다.

 


[이승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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