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역사를 빌려 현재를 얘기하다 [영화]

글 입력 2023.03.06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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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디서도 환영 받지 못한?



지극히 대중적인 입맛을 가진, 딱히 시네필도 아닌 필자는 가끔 예상치도 못한 경로를 통해 좋은 영화들을 접하게 되곤 한다. 〈킹덤 오브 헤븐〉(2005)의 경우도 그렇다. 십수 년 전 개봉된 작품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것은 한 서양사 교양 강의를 들으면서였다. 서양사를 얘기하며 빼놓을 수 없고, 현재까지도 그 영향이 잔존하는 '십자군 전쟁'을 다루고 있는 작품의 예시로서 이 영화가 수업 중에 언급된 것이었다. 특히 구미를 당겼던 것은 언급과 함께 소개된, 영화에 얽힌 작은 에피소드. '감히' 십자군 전쟁이라는 역사적 소재를 택한 '서양인' 감독(리들리 스콧)의 영화를 관람하고, 기독교인과 이슬람교인 모두 화를 내며 자리를 떴다는 일화였다. 

 

영화를 포함한 모든 종류의 창작물은 사실 어떤 방식으로든 창작자의 파편이 그 속에 투영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영화가 ‘어디서도 환영 받지 못한’ 이 일화를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을까? 물론 다양한 해석의 여지가 있겠다. 영화가 그 어느 쪽도 만족시키지 못할 정도로 이 민감한 소재를 소화시키지 못했다는 증거일 수도 있고, 혹은 감독이 영국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중립적인 관점에서 영화가 만들어졌다는 방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할리우드의 서양인 감독이 영화로 풀어내는 십자군 전쟁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그 속에 담긴 관점은 어떠하길래 이런 흥미로운 일화를 탄생시킨 것인지, 까다로운 소재를 통해서라도 전하고 싶던 메세지는 결국 무엇이었을지. 잇따르는 질문들에 대해 영화를 감상하며 나름대로 찾아본 답변들을 차차 풀어나가보고자 한다.

 

 

 

2. 예루살렘, 그 곳은


 

사실 편하게 이야기의 전개를 따라가는 동안 필자 개인이 영화에 대해 느꼈던 전반적인 인상과, 필자의 감상에 앞서서 존재하는 다양한 평가들이 공통적으로 가리키고 있는 지점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요약하자면 다양성에 대한 이야기. 조금 더 섬세히는 종교적 명분을 앞세운 전쟁의 파괴성, 공존과 평화의 가치, 타종교로 비유되는 '다른 것'에 대한 관용 같은 이야기겠다. 조금은 뻔한 것도 같지만, 구태여 이 토픽을 제시한 이유는 영화가 이러한 메세지들을 표현하는 '방식'의 특이성에 대해 다뤄보기 위해서다. 그 특이성이라 함은, 이 모든 메세지는 영화가 '예루살렘'이라는 공간을 어떻게 특징짓고 있는가를 통해 드러나고 있다는 점이다.  

  

왜 '공간'에 주목해야 하는가? 그에 대한 답으로는 우선 감독인 리들리 스콧의 특징을 제시해본다.그는 특유의 화면 연출과 영상미로 비주얼리스트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을 만큼 시각적인 부분을 강점으로 삼고 있는 감독이다. 눈으로 얻는 정보의 힘은 상당히 절대적이고, 영상 매체가 가진 최고의 매력 역시 우리가 생각하는 바를 곧 시각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이다. 화면 연출에 강한 감독이 역사적 배경이 된 공간을 영상에서 어떻게 '그려내고' 있는가는 작품의 의도를 짐작하는 데 핵심적인 단서가 된다. 그렇다면, 영화 속 예루살렘은 과연 어떠한 공간일까.


먼저, 영화는 예루살렘을 문화의 중심지이자 접변지로 해석하고 있는 듯하다. 주인공 발리앙이 여정에 오르기 전 몸담고 있던 마을은 허름하고 소박하게 묘사된다. 흑백에 가깝게 어두운 색채와 차분한 분위기와 대조되게, 주인공이 예루살렘에 도착하자 화면은 매우 화려해진다. 사람들의 옷차림, 특히 시빌라의 다채롭고 고급스러운 의상이나 시끌벅적한 시장의 풍경은 예루살렘의 문화수준을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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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리앙의 마을(위)과 시장에 등장한 시빌라(아래)>

 

 

또한 영화 속 예루살렘은 다양한 문화와 종교가 공존하는 곳이기도 하다. 물론 이것을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평화로운 공존의 의미로 보기는 힘들겠지만, 영화에는 유럽인들과 이슬람 문명권 사람들이 균형 있게 등장하며 종교 건축물들 역시 다양하게 등장한다. 예루살렘의 랜드마크로 등장하는 건축물은 이슬람 사원의 모습을 하고 있고, 동시에 발리앙이 예루살렘에 도착해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상상력을 동원해 표현된 기독교적 성지 골고타 언덕(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힌 곳으로 알려진 곳)이다. 예루살렘의 궁전 역시, 영화의 시간적 배경 상으로는 십자군 왕국의 궁전이 되어야 하지만 그 양식은 이슬람의 것을 따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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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고타 언덕(위)과 이슬람 양식의 십자군 궁전(아래)>

 

 

그리고 발리앙과 살라딘 등의 핵심 인물들은 이렇듯 영화가 제시한 '다양성과 (중립적)공존의 예루살렘'이라는 특징을 체현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영웅적 인물로 표현되는 주인공 발리앙은 강성한 십자군들의 논리에 회의를 느끼고 종교적 이분법이 아닌 개인적 신념에 따라 행동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의 신념은 신분과 출신을 막론하고, 싸울 수 있는 능력과 의지가 충만한 이들 모두를 최후의 수성전에 참전할 기사들로 서임하는 모습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그가 싸우는 이유는 타종교를 배척하기 위해서가 아니며, 그의 군대는 단일한 성질을 가진 이들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영화 속 살라딘 역시 타종교에 대한 관용적인 모습과 적국에 대한 관대함을 잘 보여주는 인물이다. 그는 십자군 기사들이 이슬람 사람들을 학살하고 자신의 여동생을 살해한 전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필요한 전투를 피하고 발리앙과 협상을 체결했다. 특히 예루살렘을 돌려받는 조건으로 성 안의 사람들의 안전을 완전히 보장해주겠다는 약속과 함께 뒤따르는 대사는 살라딘의 태도를 잘 보여준다. 자신은 ‘살라흐 앗 딘(신앙을 품은 정의)’이며, 즉 자신의 신앙을 정의롭지 않은 일에 명분으로 쓰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후 예루살렘에 입성해 십자가를 바로 세우는 장면 역시 그의 종교적 포용성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특히 "예루살렘은 무엇입니까?(What is Jerusalem Worth?)"라는 발리앙의 질문에 "아무 것도 아니야... 모든 것이기도 하고!(Nothing...... Everything!)“하고 대답하는 살라딘의 대화는 영화의 메세지를 가장 집약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예루살렘을 둘러싼 종교적 명분이 아니라, 그 속에서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과 그들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는 것을, 예루살렘이라는 공간에 대한 영화 나름의 정의 내림을 통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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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종교적 광기' 그 이상 


 

그런데 또 하나 특이한 점이 있다. 앞서 발리앙이 종교가 아닌 개인적 신념에 따라 행동하는 인물로 그려지고 있음을 지적했다. 하지만 실제 서양의 중세가 가히 종교의 시대였던 것에 반해, 신이 아닌 인간의 의지를 자유롭게 따른다는 발상은 지극히 현대적(인간의 이성과 자유의지에 대한 강조가 근대 계몽주의 태동 이후임을 감안하면)이다. 발리앙의 여정은 자살한 그의 아내에 대한 종교적 구원의 목적으로 시작되긴 했지만, 실제로 예루살렘에 다다르자 그는 기다리던 신의 응답을 듣지 못하고 종교에 대한 회의를 느꼈으며. 선왕의 왕국은 이 마음 속에 있다는 결말부 발리앙의 대사는 그러한 그의 가치관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전술했던 후반부 기사 서임 장면, 그 스스로는 영주의 사생아이지만 어엿한 영주로서 대접을 받는 장면, 동시에 영주이면서 마을의 개간을 위해 손수 나서는 장면 등은 당시 중세의 엄격한 신분질서와 계급사회에 기반한 모습이라기보다는 현대의 평등주의적 가치관과 더욱 어울린다. 

  

그리고 영화는 이러한 발리앙의 '현대적'인 특징과 대비되는 것으로서 종교적 광기의 '미진함'과 그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를 드러낸다. 발리앙이 예루살렘을 처음 찾은 이후 신의 응답을 듣지 못해 실망하는 장면, 이슬람이라는 이교도에 무조건적인 적대 감정을 가지고 있으면서 전쟁을 일으키려는 십자군 기사들에 대한 부정적인 묘사, 종교의 부패를 암시하는 각종 대사와 협력을 추구하는 발리앙과 살라딘이라는 인물 묘사 등이 그렇다. 영화는 계속해서 종교라는 명분으로 자행되는 참극들을 간과해선 안되고, 그 어떤 이유에서든 전쟁은 반드시 파괴와 폭력을 수반하며 인간의 존엄을 해치는 행위라는 점을 참혹한 전쟁 장면을 통해 보여준다. 결론적으로 종교적 이분법을 타파하고 화평과 공존을 도모하자는 결말은 바람직해 보인다. 하지만 반복적으로 강조되는 십자군의 종교적 광기는, 영화의 한계로 작용하기도 한다. 그 한계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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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십자군 전쟁은 단순히 종교적 목적 달성을 위한 성전이기만 했던 것이 아니라, 여느 전쟁이 그렇듯 수많은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이해가 관계가 얽혀있었다는 것이 학계의 전반적인 평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행된 학살과 파괴는 영화의 설명처럼 '종교적 광기'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 감독이 십자군전쟁을 보다 중립적으로(다시 말해, 지나치게 유럽에 우호적이지 않도록) 조명하고자 전쟁의 부정적인 면에 집중했다는 점에서는 좋은 평가를 내릴 만하다. 하지만 그가 표현한 특정 원인이 너무 강조되다 보니 오히려 다른 현실적인 요소들, 파괴적 결과를 야기했던 인간의 세속적 욕망이 은폐되는 면도 있다는 것이다. 이 점을 유의하고 앞서 살펴봤던 발리앙과 살라딘의 대화 장면을 다시 살펴보자.

 

“What is Jerusalem Worth?”, “Nothing...... Everything!”

“예루살렘은 어떤 곳이죠?”, “아무 것도 아냐. 모든 것이기도 하고!”


예루살렘은 종교적 가치를 제외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곳일 수도 있지만, 단순히 성지이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슬람을 통합한 지도자로서, 이 곳을 수복했을 때 뒤따르는 정치적인 이점들, 사람들을 정신적으로 묶어주는 정신적 구심점으로서의 기능, 동서양을 잇는 지리적 요충지로서의 기능 등, 여러 현실적인 이유를 살라딘은 염두에 뒀을지도 모른다. 전투에서 패한 부하가 신의 뜻을 변명으로 삼자, 식수와 식량이 부족했던 것이라며 내뱉는 살라딘의 현실적인 면모가 떠오르기도 한다.  

 

하지만 역사적 정확성과 재현의 충실도가 곧 영화의 질과 의의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필자는 종교적 광기에 대한 영화의 반복적인 강조를 다른 시각으로도 해석할 여지가 있음을 제시하려 한다.  

 

 

 

4. 중세적 사건, 현대적 메세지



관객들은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보다 가까운 심리적 거리에서 역사적 사건을 접하고, 재해석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유혈이 낭자하는 마지막 전투 장면과, 개미처럼 죽어가는 병사들, 어느 진영인지도 알 수 없게 얽혀서 서로를 죽이고 있는 모습과 산처럼 쌓인 시체들…. 주인공의 시선을 따라가며 참상을 지켜보는 관객들은 지극히 인간적인 감정에 기반해 무엇이 이 지경을 만들었는가에 대한 질문과 동시에 이를 연상시키는 현실의 문제들을 고민하게 된다. 

 

즉, 이 영화가 전달하는 메세지는 사실 십자군 전쟁을 재해석하는 데만 쓰이는 것이 아니다. 왜 하필 감독은 거의 천 년이 지난 십자군 전쟁을 소재로 영화를 제작했을까? 서두에서도 언급했듯 종교를 명분으로 한 극심한 대립은 현재까지도 여전히 일어나고 있으며, 영화가 다루는 역사는 곧 현재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 점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특히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The King, Richard the Lionheart, went on to the Holy Land and crusaded for three years. His struggle to regain Jerusalem ended in an uneasy truce with Saladin. Nearly a thousand years later, peace in the Kingdom of Heaven remains elusive.”

사자왕 리처드의 3년간에 걸친 십자군 원정은 살라딘과의 불편한 타협으로 끝났다. 

거의 천 년이 지난 후에도, '하늘의 왕국'에는 평화가 도래하지 않았다.

  

‘하늘의 왕국’은 다름을 용인하는 관용과 공존, 공생 속에 이루어질 수 있는 이상향임을 영화는 계속해서 전달했다. 하지만 현실의 세계는 어떠한가? 영화의 직접적인 배경이 되었던 예루살렘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그를 둘러싸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극심히 갈등하고 있으며, 십자군 이데올로기 하에 이슬람과 기독교 문명 간의 대립 역시 계속되고 있다. 이는 꼭 종교적인 이유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국적, 나이, 성별, 경제력, 사회적 지위, 각종 정상성을 나누는 기준들…. 현대에도 사람들은 계속해서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지 못한 채 그를 이유로 타인을 배척하고, 상처 입힌다. 영화에서 나타나는 종교적 광기는 사실은 서로를 해하는 '현재'의 사람들의 모든 비합리적인 명분들에 대한 일종의 거대한 비유이기도 하다. 

 

감독이 말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이 부분 아닐까? 영화 속의 사람들이 그들만의 이유로 대립해왔듯, 사실 지금까지도 사람들은 여러 종류의 다름을 이해하지 못하고 각양각색의 명분으로 갈등하고 있다는 점 말이다. 그리고, 영화를 보는 이들이 신의 이름으로 파괴와 폭력을 일삼는 이들의 덧없음을 느꼈듯, 조금만 거리를 두면 우리가 답습하고 있는 인간의 고질적인 문제들을 발견할 수 있음을, 이를 바탕으로 노력해나간다면 그토록 원하던 ‘하늘의 왕국’이 언젠가는 도래할 것임을…결국 <킹덤 오브 헤븐>은 충실하게 역사를 재현하는 다큐멘터리적 영화라기보다는, 창작자의 현대적 메세지를 중세적 사건을 통해 전달하고 있는 시대물이었다고, 마지막 평을 내려본다. 


 

[황수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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