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불완전한 기억 속에도 분명히 남아있는 것 [영화]

영화 <애프터썬(Aftersun)>(2022)
글 입력 2023.02.24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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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마, 아주 많이 사랑한다는 걸.’


 

‘소피’와 ‘칼럼’은 친밀한 부녀관계다. 때로 짖궂게 장난을 치기도 하지만, 함께할 때 가장 즐겁다.

 

아버지와 떨어져 사는 소피는 방학을 맞아 아버지 칼럼과 함께 튀르키예로 여행을 간다. 둘은 여행지에서 밤이면 다정하게 서로의 얼굴을 화장솜으로 닦아준다. 그러나 둘 사이가 언제나 화창하지만은 않다.

 

아버지 칼럼은 때때로 예상치 못한 순간에 화가 나 있다. 소피는 그런 아버지에게 사과를 하거나, 송곳 같이 뾰족한 말로 상처를 주기도 한다.

 

 

 

사람들 사이의 '소피'



소피는 당차고 밝은 아이다. 그리고 아버지 칼럼과 보내는 여름여행에 들떠있다.

 

이 여행에서 그는 처음 해보는 것들이 많다. 스쿠버다이빙을 하며 해마와 문어를 가까이서 보기도 하고, 처음 다뤄보는 캠코더를 들고 마치 방송진행자처럼 말한다. 서툴지만 상점에서 외국의 감사 인사말을 건네 보고, 머리장식도 해본다. 이따금씩 아버지는 이상한 동작과 화난 얼굴로 소피를 당황하게 만들지만, 이내 개의치 않는다.


소피는 여행지에서 만나는 다른 여행객들을 보며 자신이 어린아이라는 사실을 계속해서 확인받는다. 수영장에 가면 아버지가 선크림을 발라줘야 하고, 아버지가 부르면 놀다가도 따라가야 한다. 칼럼은 그런 소피에게 여자아이들과 어울려 놀기를 권하지만, 소피에게 그들은 너무 어려서 어울리기 싫다. 또래 남자애는 너무 어려서 시시하다.

 

호텔에서 만난 언니, 오빠들은 소피는 알 수 없는 고리로 그들만의 공감대를 형성한다. 소피는 그들보다 포켓볼을 잘 치지만, 여전히 ‘아빠를 찾아줘야 하는’ 어린아이다.

 

소피는 어서 어른이 되고 싶다. 어딜 가나 어린아이라는 이유로 배제되고 싶지 않다.

 


<Aftersun>(2).jpg

 

 

 

소속되지 못하고 떠도는 '칼럼'



반면 아버지 칼럼은 여전히 미래의 자신이 그려지지 않는다. 그는 서른한 살의 젊은 아버지이지만, 이 나이는 불과 몇 년 전에는 전혀 뜻밖의 숫자였다. 30대 초반의 이 청년은 아직 세상에 완전히 소속되지 못했다고 느낀다. 멀리 떨어져 살지만 같은 하늘 아래에는 가장 사랑하는 자신의 딸이 있음에도.


사랑하는 딸과의 여행은 끝이 아쉬울 정도로 즐거웠다. 그렇지만 행복한 시간 속에도 틈틈이 우울감이 그를 파고든다. 쉬이 그치지 않는 울음을 삼켜내려 애쓰는 칼럼의 마음 한구석에는 소피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 그래서 칼럼은 애처로울 정도로 위태롭게 우울의 시간을 버텨낸다. 온힘을 다해서 마음을 다스리고, 제자리로 돌아와도 딸에게는 미안함이 남는다.


칼럼의 걱정과 불안이 무색하게 소피는 즐거운 방학을 보낸다. 그리고 거기에는 칼럼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여행지에서의 아름다운 기억이 있었다. 사실 칼럼은 자신의 겪는 정신적인 문제를 소피가 겪지 않기를 바랐다.

 

영화 중반의 한 장면에서 소피는 저녁 식사 전 무력감을 토로한다. 아이가 표현하는 감정은 세세한 우울감의 묘사이다. 화장실에서 이야기를 듣던 칼럼은 거울 속 자신의 얼굴에 침을 뱉고, 애써 아무렇지 않다는 듯 웃어 보인다.

 

우울감은 아이의 삶에도 스쳐가는 자연스러운 감정이지만, 칼럼은 이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불안감을 감추려 애쓴다.

 

 

<Aftersun>(3).jpg

 

 

아버지에게 사소한 감정을 공유하는 소피와 달리 관객은 칼럼의 말에서 그의 진정한 감정을 읽어내기 힘들다. 칼럼이 좀처럼 어려움에 대해 말하기를 꺼리기 때문이다.

 

여행 초반 부러진 팔목에 한 깁스를 푸는 칼럼의 모습은 그의 성격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아마도 오른손잡이일 그는 왼손에 작은 가위를 들고 어렵사리 붕대를 자른다. 그런 도중 손이 미끄러져 그만 팔에 피가 난다.

 

하지만 칼럼은 나직하게 비명 지르곤 다시 벽을 두고 소피와 나누는 대화에 집중한다. 또 다른 장면에서 칼럼은 소피에게 어떤 일이든 아버지에게 말할 수 있다는 점을 상기한다. 그렇지만 정작 자신은 어떠한 어려움도 주변에 토로하지 않는다. 하물며 스쿠버다이빙 복장을 입을 때에도 칼럼은 소피에게조차 도움을 청하지 않는다.

 

그러나 칼럼의 마음속에는 말 못한 많은 이야기가 들어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튀르키예의 한 카펫가게에서, 칼럼은 각자의 사연이 그려진 카펫들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결국 빠듯한 예산에도 불구하고 고가의 카펫을 사들인다. 자신과 같이 각자의 사연을 가지고, 또 말하는 카펫에게 칼럼은 동질감을 느끼고 쉬이 지나치지 못했을 것이다.


칼럼은 여행 초반부터 틀어진 계획이 내내 신경쓰였지만, 그 속에서도 딸을 위하는 아버지 덕에 소피는 매 순간이 편안하고 즐거웠다. 칼럼은 딸이 불편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다. 그만큼 딸을 아주 많이, 사랑하기 때문이다.

 

우울감이 밀려오는 밤에 그는 낮에 찍은 캠코더 속 딸의 모습을 돌려본다. 매 순간이 소중한 딸과의 시간은 여행과 함께 끝이 난다.

 

 

<Aftersun>(5).jpg


 

 

그 후에 남은 것



딸이 떠난 공항에서, 칼럼은 어렵게 지탱하던 축을 놓아버렸을지 모른다.

 

스크린으로 보여지는 것은 생일을 맞은 서른한 살의 소피가 캠코더 영상을 통해 되짚어 본 기억에 불과하다. 캠코더로 촬영된 영상 밖의 장면들은 소피가 재구성한 여행의 기억이다. 그럼에도 그 기억 속에는 자신을 향한 아버지의 한결같은 애정이 있다.


아마도 90년대, 30대의 나이에 멈춰버렸을 아버지 칼럼은 그때의 자신과 같은 나이의 딸 앞에서 재생된다. 지금은 만날 수 없는 아버지를 추억하는 소피의 모습에는 짙은 그리움이 묻어있다.

 

부모가 된 자신이 간절히 그리는 사람은 완벽했던 자신의 아버지이다. 칼럼 자신의 걱정과는 다르게, 우울감과 치열하게 싸웠던 그였지만, 한 사람에게는 그저 무한히 다정한 사랑으로 기억되었다.


스스로 부족하게 느껴지는 사람이 다른 이에게 건강한 영향을 줄 수 있을까에 대한 답이 이 영화 안에 있다. 사랑은 주는 이의 모습과 상관없이 전해질 수 있다. 수많은 사연을 품고서도 완벽하게 사랑해주는 아버지였던 칼럼처럼.

 

 

<Aftersun>(6).jpg

 

 

[홍가흔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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