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해피 투게더', 퀴어의 성장 이야기 [영화]

영화 <해피투게더> (1997)
글 입력 2023.02.21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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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을 떠나 지구 반대편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온 보영과 아휘. 두 사람이 설정한 그들 사이 사랑의 상징인 이구아수 폭포를 찾아가던 여정을 끝마치지 못한 채, 홍콩에서와 비슷한 그저 그런 이유로 싸우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기를 반복한다. 그들은 결국 영원히 다시 함께하지 못하게 된다는 게 <해피투게더>의 요약이다. 참으로 싱겁기 짝이 없는 이야기다.

 

그런데 왜 <해피투게더>는 개봉한 지 수십 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사랑받을까? 퀴어영화여서? 그렇다기엔 다른 퀴어 영화도 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새로운 퀴어 영화들이 매년 (쏟아져 나오지는 않더라도)조금씩 나오고 있는 시대다. 그런데 굳이 97년도에 개봉한 퀴어 영화가 21세기에 리마스터링해 개봉할 이유가 있을까?

 

아니면 금기된 사랑을 다루고 있어서일까? 그렇지만 퀴어는 미디어에서 '금기'의 틀을 깨고 나오기 시작한 지 오래고, 이제는 보수적인 한국 예능에서도 퀴어의 삶을 다루고 있는 시대이다. 게다가 불륜이라는 다른 형태의 금기된 사랑을 소재로 하는 <화양연화>나 스토킹과 고독을 소재로 하는 <중경삼림>에 비하면, <해피투게더> 속 보영과 아휘의 사랑싸움은 가끔은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사소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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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투게더>가 지금까지도 사랑받는 이유는 영화에 나오는 두 주인공의 이야기가 실제 사람의 삶처럼 촘촘하게 짜여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아휘와 보영이 헤어진 후부터 아휘라는 캐릭터에 집중해, 그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며 아휘의 내면적 성장을 묵묵히 지켜본다.

 

따라서 영화의 소재가 아휘와 보영의 사랑만인 것은 아니다. 아휘와 보영이 처음 만나서 호감을 느끼고, 사랑을 하고, 사랑이 식어 헤어지는 과정에 모든 장면을 할애하지 않는다. 대신 처음부터 삐걱거리는 두 사람의 관계를 보여주다가, 영화의 중반 이후부터는 스크린에 홀로 남아있는 아휘의 감정에 집중한다.

 

영화가 집중하는 아휘라는 캐릭터는 지금 보영과 함께하며 힘들었던 이전 사랑의 흔적을 잊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려는 의지를 얻는 시기를 지나고 있다. 그러니까 영화가 그리는 시간대를 굳이 정하자면 인생에 어느 때나 올 수 있는 두 사람 사이 사랑의 기승전결이 아니라, 아휘라는 젊은 퀴어 남성의 이십 대 초중반의 시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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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적 삶'의 불안정성


 

최근에 흥미로운 기사를 읽었다. 그 기사는 동아시아의 퀴어를 연구하는 서구의 연구인들이 보았을 때, 이상의 '모던 뽀이'로서의 삶은 어느 정도 퀴어성을 띄고 있다는 주장이 담긴 책을 소개하는 글이었다. 처음에는 잘못 읽은 줄 알았다. 이상에게는 여자인 금홍이가 있지 않던가.

 

알고 보니 이상이 살던 삶의 방식, 그러니까 낮과 밤이 바뀌고 비생산적인 룸펜으로 살아갔던 시간이 수많은 퀴어들이 살았던 삶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조금(사실 조금 많이) 비약이 있는 주장이라고는 생각하지만, 드랙, 볼 등 밤 문화를 대표하는 키워드로 요약되는 20세기 서양 퀴어들의 삶을 생각해 본다면 그 사람들에게는 이상의 기이한 삶이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아휘도 여느 젊은 퀴어와 마찬가지로 불안정한 삶의 시기를 지나고 있다. 그것은 아휘가 실제로 동성인 보영을 사랑하는 동성애자여서이기도 하지만, 영화가 시작할 때의 아휘의 삶의 방향성을 생각해보면 그의 생활은 역시 '퀴어하다.' 

 

그 삶의 퀴어성이 드러나는 부분은 첫째로 경제적 불안이다. 그는 스스로의 힘으로 취업하지 못해 아버지의 친구가 운영하는 회사에 낙하산으로 들어가 일하고 있었다. 둘째로 정상 사회의 관점에서 바라보았을 때, 남의 돈을 훔쳐 대뜸 먼 나라로 떠나는 그의 경제관념과 윤리는 깔끔하지 못하다.

 

마지막으로 직접 드러나진 않지만, 그와 가족 간의 단절도 짐작할 수 있는데, 아휘가 아버지와 연을 끊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그 회사 운영 자금을 훔쳐 애인인 보영과 아르헨티나로 떠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동아시아의 한 남성에게서 기대되는 정상성을 거부한 아휘에게는 수많은 부정적인 낙인이 찍혔을 것이다.

 

아휘가 굳이 애인과 함께하기 위해 가족을 떠났던 이유, 굳이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국가인 홍콩과는 정반대인 아르헨티나로 떠난 사연이 있었을 것이다. 가족, 그리고 사회와의 불화를 겪는 것이 바로 많은 퀴어의 삶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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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에노스아이레스라는 공간적 배경은 아휘의 이런 퀴어성을 더욱 부각시킨다. 말했듯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아휘의 본거지인 홍콩과는 낮과 밤이 반대로 바뀌어버린 삶을 살고 있는 도시이고, 그렇다면 아휘가 아르헨티나에서 지내는 동안에는 원래 그가 속했던 사회 속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는 삶의 궤적에서 탈선한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스페인어도 할 줄 모른다. 영화의 초반에 보영과 이구아수 폭포를 찾아가는 장면을 보면, 그는 주요한 단어를 띄엄띄엄 붙여서 겨우 소통할 수 있는 정도로('이구아수 폭포 어디있어요?'를 '¿Dónde Iguazú?(이구아수 어디?)' 정도로 이야기한다) 스페인어를 구사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언어를 모르면 소통의 창구가 눈에 띄게 줄어든다. 아르헨티나 체류 기간 동안 그가 교류하는 사람의 수는 연인인 보영을 포함해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적다.

 

그가 홍콩으로 돌아갈 돈을 구하기 위해 하는 일 역시 그가 주변부의 삶을 살게 되는 여러 이유 중 하나이다. 다른 사람들과 눈에 띄게 다르게 생겼고 특별한 전문적인 능력도 없는 아휘는 탱고바, 중국 음식점의 주방, 도축장을 전전하며 아마도 최저 시급에 가까울 돈을 받고 일한다. 모든 직업은 고귀하지만, 아휘가 너무나 원해서 선택한 직업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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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립을 자처한 곳, 부에노스아이레스


 

그런 점에서 보영과 아휘가 홍콩에서 지구 반대편인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떠난 건 흥미로운 부분이다. 그들은 자유를 부르짖으며 오로지 둘만 있기 위해 아르헨티나로 간 것이었지만, 그곳에서 '외국인'이라는 새로운 소수자 정체성이 겹치면서 자유에 대한 이상이 박살 나는 경험을 하기 때문이다.

 

외국인이라는 정체성은 해외에서 많은 사소한 갈등을 일으킨다. 먼저 이야기한 언어 장벽뿐만이 아니다. 다른 생김새와 어눌한 말투는 현지인에게 얕보이기 딱 좋은 조건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는 아휘가 보영을 위해 피자집에서 피자를 주문하고 수령하는 장면이다. 피자집 사장은 아휘가 분명하게 '모짜렐라 피자'를 달라고 했는데도 일부러 '나폴리탄 피자'를 들었다는 듯 행동한다. 피자집 알바생은 아휘에게 곱게 피자를 전해주지 않고 '가슴 큰 중국인 여자를 소개시켜달라'며 재미없는 농담을 한다.


이런 사소하고 성가신 경험은 보영과 아휘를 계속해서 외지인의 위치에 놓고, 고립으로 이끈다. 계속되는 고립감은 향수병을 만들어 내고 두 사람을 예민하게 만든다. 그러면서도 같은 이유로 자신을 죽을 만큼 힘들게 하는 연인을 떠나보낼 수 없는 상황이 보영과 아휘에게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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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있으면 죽을 만큼 힘들고, 떨어져 있으면 밀려드는 고독감에 미칠 것 같은 나날들이 계속되다가 그들은 드디어 헤어지기로 결심한다. 그렇지만 이역만리에서 홍콩 사람, 게이라는 정체성이 겹치면서 두 사람은 헤어진 후에도 지저분하게 자꾸 자주 마주치게 된다.

 

그야 아르헨티나에서 홍콩인을 찾는 것, 혹은 게이 남성을 찾는 것이야 조금 많아서 어렵다고 해도, 아르헨티나에 있는 홍콩 게이 남성을 찾는다고 하면 일이 너무 쉬워지기 때문이다. 소수자의 삶은 보통 그렇다. 커뮤니티가 활성화되어있지 않고, 설령 되어있다고 해도 사회적 신변에 관한 우려나 생계가 달린 문제들로 인해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두 사람에겐 유쾌하지 않게 계속 마주치는 날이 반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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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향, 그리고 성장


 

힘들었던 시간이 지나고 드디어 아휘는 자신을 둘러싼 갈등의 해소를 겪게 된다.

 

가장 큰 변화는 보영과의 관계가 마무리되었다는 것이다. 이제 아휘와 보영이 모두 홍콩에 돌아간다고 해도 두 사람은 다시 만날 일이 없을 것이다. 그 옛날 홍콩에서부터 시작된 지독하고 상처만 남는(그렇지만 정말로 사랑했던) 일들은 다 끝이 난 것이다.

 

아휘는 드디어 이구아수 폭포에 간다. 본래 두 사람 여행의 목적은 이구아수 폭포에 가는 것이었다. 쏟아지는 폭포를 바라보며 아휘는 '폭포 아래에는 두 사람이 있는 장면만 생각해왔다'며 쓸쓸한 감정을 느낀다. 그렇지만 이구아수 폭포는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었고, 아휘는 그 의미가 무엇이든 폭포에 간 유일한 사람으로 남았다.


단순히 보영과의 관계가 끝이 난 것뿐만 아니라, 아휘의 삶 전반적으로도 나아지는 기미가 보인다. 아휘는 드디어 아버지와 화해한다. 아르헨티나에선 가족 명절에 가까운 크리스마스를 기점으로 그는 아버지와 대화할 결심을 하게 된다. 아휘는 진심을 담아 아버지에게 편지를 쓰고, 통화한다.

 

이때 아휘의 내래이션으로 '아버지가 차마 묻지는 못하셨던 일들'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고 하는데, 그 이야기가 무엇이든 아버지와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을 만큼 관계가 개선되었다는 점이 그의 삶에 일어난 발전이라고 생각된다.

 

아휘는 자신이 일해 번 돈을 모아 홍콩으로 귀국한다. 다른 사람의 돈을 훔쳐 아르헨티나로 달아났던 과거와는 정반대의 상황이다. 영화의 가장 마지막, 아휘의 대사는 '언제 다시 만날지는 모르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가 보고싶으면 어디서 찾을지는 안다는 거다'. 그는 새로운 사랑을 시작할 수 있을 만큼 회복되었다. 갈등의 해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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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이 나야 시작되는 이야기


 

왕가위 감독은 <해피투게더>를 처음 기획할 때부터 아휘의 복잡한 내면에 집중하려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치밀한 계획보다는 즉흥적인 직감을 바탕으로 영화를 찍기로 유명한 왕가위 감독의 특성상, 영화의 소재는 변하지 않았을지언정 주제는 수도 없이 바뀌고, 여러 장면이 즉흥적으로 찍혔으며, 버려진 장면과 이야기, 캐릭터는 훨씬 더 많기 때문이다.

 

게다가 보영 역할을 맡은 배우 장국영이 가수 활동 일정 등으로 남미에 오래 체류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리고 아르헨티나에 영화팀이 체류하는 기간이 기한 없이 길어졌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오랜 시간 스태프와 함께했던 양조위가 맡은 아휘 이야기의 비중이 커졌을 수도 있다.

 

<해피투게더>의 코멘터리라고도 할 수 있는 다큐멘터리 <부에노스아이레스 제로 디그리>에 나온 양조위의 인터뷰에 따르면, 영화 스태프들 역시 향수병을 지독하게 앓아 '왕가위 감독님이 우리 모두에게 죽음을 경험하게 하려 했던 것 같다'고 할 정도로 괴로운 시간을 아르헨티나에서 보냈다.

 

그렇지만 그렇게 오랫동안 고독을 느끼고 여러 가능성을 열어두며 캐릭터 설정을 추가하고 캐릭터의 다양한 모습을 촬영하자, 영화 속 캐릭터의 이야기는 깊어졌고, 그렇게 <해피투게더>는 다른 퀴어 영화와는 감성이 다른 영화로 탄생한 것 같다.

 

<해피투게더>는 다른 퀴어 영화처럼 '퀴어의 삶' 그 자체에 집중하거나, 주인공이 퀴어로 정체화하는 순간에 집중하는 게 아닌, 이미 주변부의 삶을 살고 있었고 그 삶을 개선해 나가는 아휘라는 인물을 그린 특별한 작품이다.

 

왕가위 감독은 영화의 코멘터리에서 <해피투게더>를 '삶의 어떤 시기가 끝났음을 알리는 이정표'로 표현했다. 아휘는 보영과 헤어졌고, 그러면서 자신의 청춘의 어느 고점을 지났다. 영화는 영화의 사운드트랙 중 가장 밝고 힘찬 노래, 'Happy Together'를 엔딩곡으로, 희미하게 웃는 아휘의 얼굴과 함께 마무리한다. 웃음의 의미는 명확하다. 끝은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순간이 영원한 이유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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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나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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