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2022년 9월 7일의 기록 [문화 전반]

첫 번째 필사노트를 끝 맺으며
글 입력 2023.02.18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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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쓸수록 느끼는 건 내가 ‘의미’에 상당히 집착하는 면모가 있다는 점이다. 모든 것에서 의미를 찾아야만 하는 버릇이 있다. 그 의미가 정말 그러한 것인지, 실은 그냥 내 스스로 붙인 이름에 불과한지도 모르면서 말이다.

 

나는 사라지는 것이 슬프다. 내가 사랑하던 존재가, 소중히 여기던 무언가가 어떤 식으로든 내 곁을 떠날 수 있다는 게 서럽다. 그 대상은 사람이기도 하며 물건이 되기도 하고, 생각과 감정 등의 추상적인 것이 될 수도 있다. 

 

어떤 순간에는 온전히 내 것이었던 그들이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릴 수 있다는 게 싫다. 내가 살아가는 삶과 살아있는 세상에 자꾸만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그 틀 안에 가두지 않으면 결국 사라진다고 믿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언젠가부터 글을 쓰고 사진을 찍는 것에 ‘순간’을 ‘기록’하고 싶은 나의 불순한 의도가 서리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애써 기억하지 않으면 사라질 순간을 기록을 통해 겨우 붙잡고 있는 것이다.

이보다 좀 더 이기적인 욕망도 있다. 


언젠가 유품정리사에 대한 에세이를 읽다 한 존재가 사라지고 나서 남는 것에 대해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책에서는 그가 생전에 채웠던 ‘서가’를 통해 그의 삶이 상상되고 있었다. 그 장면을 나의 삶에 비춰보며 나는 더욱 기록의 필요성을 실감했다.

내가 남기는 기록들이 결국 이 세상에 남기는 내 존재의 흔적이 되리라고 느꼈던 것 같다. 언젠가 이 땅에 더 이상 숨 쉴 수 없게 되더라도, 곧바로 이 세상에서 지워져 버리고 싶지 않은 나는 남은 사람들이 나에 대해 한 번쯤은 떠올려 줬으면 하는 욕심이 있다. 

 

어쩌면 내가 남긴 기록들이 그러한 역할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얼마 전 블로그를 보다가 잊고 살던 ‘순간’이자 ‘흔적’ 하나를 발굴했다. 그리 오래 지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조금은 낯설어진 기록들이다. 꽤 부끄러운 기록을 굳이 한 번 다시 꺼내 보기로 했다. 


기록을 한다는 것은 기억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이건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다.


 

 

2022년 9월 7일의 기록, ‘첫 번째 필사노트를 끝 맺으며’


 

올해 초부터 작성하기 시작한 필사 노트에 오늘로 마침표가 찍혔다. 평소에 공책을 끝까지 쓰는 일이 굉장히 드문데, 새로운 시작에 대한 유혹을 이기고 마지막 페이지까지 도달한 스스로를 칭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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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노트와의 첫 만남. 올해 초 망원동 소품숍에서 우연히 만난 취향 저격 수첩이었다. 동생이 선물해 줬기에 더욱 가치가 있는 물건이다. 소중히 다뤄야 할 것 같은 생각에 ‘필사 노트’라는 의미를 붙였었다.

처음부터 빈티지한 느낌이 매력적이던 수첩이었는데. 새 물건이 주는 설렘도 좋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남겨진 생채기와 자국들이 내게 길들여진 흔적들인 것만 같아 소중하게 느껴진다.

이미 몇 장 무렵 남았을 때부터 다음 타자를 엄선해 놓았지만, 보내주려 하니 괜히 섭섭해진다. 이게 뭐라고 꽤나 애착이 컸던 모양이다. 그냥 떠나보내기는 아쉬우니 노트에 적힌 문장들 중 마음에 드는 것들을 엄선해 본다.

 

 

1.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 앤드루 포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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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유년의 모든 때를 그 지붕에서 보냈을 것이다.

바다를 내다보면서, 충분히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세상이 움직이는 방식에 대해 

뭔가 의미심장한 발견을 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믿었다.

 

(29p)


 

잠시 후 수면 위에 반듯이 누워,

별들 아래서 유유히 떠다닌다.

중력도 없이, 

짝도 없이, 

길을 잃고서.

 

(66p)


 

여름의 끝자락에 있는 모든 도시들이 그러하듯, 도시는 슬퍼 보였다.

레이철이 그 여름 그 안에서 보았던 모든 가능성은 사라지고,

이제 해마다 반복되는 음울한 면모를 변함없이 드러내는 듯,

도시는 벌써부터 춥고 공허해 보였다.

 

(177p)

 

 

필사 노트에 적힌 첫 책. 필사 노트를 산 날 함께 망원동 독립서점에서 구입했다. 제목이 인상적이어서 구입했는데, 내용과 크게 이어지지는 않는 것 같다.

 

열 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소설 작품이다. 짧은 호흡 안에 완결성을 갖춘 글을 쓰는 것이 어렵기 마련인데, 한때의 회상들로 이루어져 있는 작품들이 전부 현장감 있게 전개된다는 점이 작가의 역량을 돋보이게 했다.


이 책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흔히 특별하다고 생각되는 인물들은 아니다. 하지만 모든 평범한 삶에도 나름의 특별한 구석이 있듯이, 작가는 각자의 특별한 에피소드를 조명한다.

이 에피소드들이 대게 희극보단 비극에 가깝다는 점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비극적인 내용과 대비되는 감성적이고 문학적인 표현들이 음울한 분위기를 한 층 더하는 듯한 매력이 있었다.

소설의 제목과 동일한 제목을 가진 단편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사실 등장하는 주인공들 중 가장 이해가 어려운 행보를 보여준 작품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깊은 여운을 느낀다.


필력과 흡입력은 뛰어난 작품이었지만, 그와 별개로 솔직히 내 취향과는 거리가 먼 책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한 번쯤 다시 읽어보고 싶다 느끼는 내 감정이 모순적이다. 

 

굉장히 오묘한 책인 것만은 분명하다.

 

 

2. 코스모스 – 칼 세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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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 드루얀을 위하여

공간의 광막함과 시간의 영겁에서

행성 하나와 찰나의 순간을

앤과 공유할 수 있었음은 

나에게는 하나의 기쁨이었다.

 

 

여전히 끝을 보지 못한 책이라 서평을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하지만 이 문장은 필사 노트에 적힌 문장들 중 가장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은 인상적인 문구이다.

 

책의 가장 앞머리에 나오는 이 문장은 칼 세이건이 아내 앤에게 남긴 헌사이다. 한 평생을 우주를 연구한 천문학의 대가가 수많은 지식이 집약된 고전을 발간하며 아내에 대한 사랑을 드러냈다는 점이 굉장히 낭만적이다.

 

우주 차원에서 보면 인간은 정말 찰나의 순간을 살아가며, 우리의 터전인 지구 역시 광활한 공간에서 아주 극소한 부분만을 차지한다.

 

새삼 인연의 소중함을 느끼게 하는 문장이다. 나와 인연을 맺은 모든 사람들은 무한한 확률을 뚫고 나의 소중한 존재가 되어준 사람들이다. 너무나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코스모스에서 일반적인 곳이라 할 만한 곳은 

저 광대하고 냉랭하고 어디로 가나 텅 비어 있으며 

끝없는 밤으로 채워진 은한 사이의 공간이다.

 그 공간은 참으로 괴이하고 외로운 곳이라서 

그곳에 있는 행상과 별과 은하들이 

가슴 시리도록 귀하고 아름다워 보인다. 

 

(39p)

 


과학적 상식이 너무 부족하여 읽게 된 책이다. 시작을 망설이게 하는 두께와는 달리 꽤나 친절한 책이었다. 이 방대한 지식을 쉽고 재미있게 설명한 책의 저자 칼 세이건 교수께 경외심이 느껴졌다. 딱딱한 과학 책을 상상했던 것과 달리 표현들이 문학적이라 놀랍기도 했다.

번역의 중요성을 느끼기도 했다. 본래의 표현 자체도 분명 좋았겠지만 언어가 교체되는 과정에서 번역가의 관념이 투영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번역가가 천문학 전공인 것도 인상적이었다.

물론 학술적인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에 관련 지식을 갖춘 분이 적합했을 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사용된 단어와 표현들을 보면서 단순히 천문학적 학식뿐만 아니라 문학적 감수성까지 풍부하신 분이라 감탄했다.



3. 리버보이 – 팀 보울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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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항상 아름다운 건 아냐. 

강은 바다로 가는 중에 많은 일을 겪어. 

돌부리에 채이고 강한 햇살을 만나. 

도중에 잠깐 마르기도 하고. 

하지만 스스로 멈추는 법은 없어. 

어쨌든 계속 흘러가는 거야. 그래야만 하니까. 

그리고 바다에 도달하면 다시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날 준비를 하지. 

그들에겐 끝이 시작이야. 

난 그 모습을 볼 때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껴. 

 

(193p)

 

 

리버보이는 나에게 특별한 추억이 있는 책이다. 이 책은 열 살 무렵에 엄마가 선물해 주신 책이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받은 책 선물이라 유달리 애착을 느끼는 책이기도 하다.

 

지난 세월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물건이기도 하다. 이 책을 읽었을 때가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이었기 때문에 주인공 재스의 이야기에 더욱 공감할 수 있었다. 재스만큼 할아버지와 유대가 깊은 것은 아니었지만 너무 자상하신 분이셨기 때문에 떠올리면 그립고 슬프다.

 

일곱 살 때 부모님 없이 할머니댁에서 하룻밤을 잤던 적이 있다. 할아버지와 단 둘이 집에 남겨졌던 오후에, 짜장 라면을 끓여 주시던 모습이 떠오른다.

 

유달리 물이 많았던 짜장 라면이다. 면을 전부 나를 주시고는 남은 국물에 밥을 비벼 드시면서, 언제 손녀가 끓여주는 라면을 먹나 웃으시던 할아버지의 얼굴이 떠오른다.

 

조금만 더 살아 계셨다면 내가 끓인 라면을 드실 수도 있으셨을 텐데. 이런 에피소드 때문인지 짜장 라면을 먹을 때마다 할아버지가 떠오른다.

 

이 책을 다시 펼친 건 잠이 오지 않는 밤이었다. 매번 하던 미래에 대한 고민들에 더해 죽음이 떠올라 무척이나 무서웠던 날이었다.

 

처음 읽었던 때보다 한참이나 자랐기에 쉽게 읽혔지만 유치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지만 작은 위로가 되어주었다.

 

가끔은 어린 시절에 읽었던 책을 다시 읽는 것도 꽤 좋다고 생각했다. 그 당시보다 내가 얼마나 자랐는지도 알게 되지만, 그때는 미처 몰랐던 새로운 감동을 느낄 수도 있기 때문이다.



4. 비행운 – 김애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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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는 지속되고 수박은 맛없어진다.

여름이니까 그럴 수 있다.

전에도 이런 날이 있었다.

태양 아래, 잘 익은 단감처럼 단단했던 지구가

당도를 잃고 물러지던 날들이.

아주 먼데서 형성된 기류가 

이곳까지 흘러와 내게 영향을 주던 시간이.

비가 내리고, 계속 내리고, 자꾸 내리던 시절이.

말하자면 세계가 점점 싱거워지던 날들이 말이다.

 

(85p)


 

세상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은 없는데.

다른 친구들은 무언가 됐거나 되고 있는 중인 것 같은데.

저 혼자만 이도 저도 아닌 채,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 불안해져요.

어쩌면 이미 아무것도 아닌 것보다 더 나쁜 것이 되어 있는지도 모르고요.

 

(294p)


 

저도 그랬으면 싶어요.

지금 선 자리가 위태롭고 아찔해도,

징검다리 사이의 간격이 너무 멀어도,

한 발 한 발 제가 발 디딜 자리가 

미사일처럼 커다랗게 보였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언젠가 이 시절을 바르게 건너간 뒤

사람들에게 그리고 제 자신에게 이야기하고 싶어요.

나, 좀 늦었어도 잘했지.

사실 나는 이걸 잘한다니까 하고 말이에요.

 

(316p)

 

 

비행운이 이 비행운일 줄을 몰랐다.


이렇게나 완성도 높은 단편들을 쓸 수 있는 작가의 능력이 매우 부러워지는 책이었다. 무엇 하나 지루하거나 진부한 작품이 없었다.


김애란 작가만의 표현력이 돋보였다. 세상을 묘사하는 작가만의 문학적 표현들은 정말 단어 하나, 문장 하나를 세심하게 읽고 싶게 만들었다. 독특하고 매력 있는 문체이다.

가장 인상적인 건 비행기가 남기는 자국을 의미하는 제목인 줄 알았는데 非(아닐 비)를 써서 행운이 아닌 것들을 가리키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비극적인 단편들로 이루어진 책을 다 읽고 나면 제목이 참 좋다고 느끼게 된다.

작품 해설로 책을 마무리하면 ‘비행운’이라는 제목이 중의적인 의미를 갖는 것을 알 수 있다. 행운이 아닌 것들을 의미하는 ‘비(非) 행운’은 주인공들이 처한 비극적인 현실이며, 흔히 우리가 아는 비행기가 떠난 흔적의 ‘비행운(飛行機)’은 주인공들이 일상에서 탈피하여 도달하고 싶은 이상향을 의미한다.


하지만 작품에 나오는 모든 주인공들은 비행운(飛行機)을 동경할수록 자신들의 비(非) 행운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 비극을 더욱 비극적으로 만드는 요소인 것이다. 특히나 주인공들의 비극이 특별한 것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이 일상에서 겪을 수 있을 법한 비극들이라 마음을 더욱 무겁게 한다.

개인적으로 ‘물속 골리앗’, ‘비행운’, ‘서른’이 가장 인상 깊었다. 물속 골리앗은 읽을 당시에는 판타지에 가까운 내용일 뿐이라 생각했는데, 유독 침수 사고가 많았던 한 해를 되돌아보면서 재난이 파괴하는 누군가의 삶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비가 많이 오면 누군가는 옷만 살짝 젖고 말지만, 누군가는 집을 잃고 생을 잃는다. 재난 사고의 가장 잔혹한 면모는 약자에게 더 치명적이라는 점인지도 모르겠다.

 

‘비행운’은 가장 씁쓸하고 가슴을 아프게 한 작품이었다. 명절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했다. 모두가 가족으로 뭉치는 이날은 외로운 사람을 더욱 고독하게 만드는 날은 아니었을까? 빛의 따스함이 우리 사회의 그늘진 곳곳까지 퍼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가장 공감되었던 작품은 ‘서른’이었다. 처한 상황은 전혀 다르지만, 어쩐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좌절과 무기력함에 빠져 있는 주인공이 용기를 냈으면 좋겠다. 주인공의 이야기를 빌려 전해지는 작가의 잔잔한 위로가 비극적인 상황에서도 감동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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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기억들은 추억이 된다. 굳이 기록하지 않아도 추억으로 남는 기억들도 있지만, 마음은 참 간사해서 소소한 행복들은 금세 잊어버리기도 한다.


기록할 당시에는 조금 귀찮다고도 생각했는데, 다시 꺼내서 보니 역시 확실한 행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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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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