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녹스와 큐리오 : 꿈과 골동품 - 연극 '태양'

인간은 해를 등지고 살 수 있을까?
글 입력 2023.02.16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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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정동극장] 연극 태양_포스터(2.3-26).jpg

 

연극 <태양>은 2021년 두산아트센터와 경기아트센터, 경기도 극단이 공동 기획 및 제작한 작품으로 마에카와 토모히로 작가의 동명 희곡을 원작으로 한다. 이번 공연은 국립정동극장이 2023년 공동기획 첫 작품으로 김정 연출의 연극을 무대에 올렸다.

 

<태양>은 21세기 초 바이러스로 인해 전 세계 인구가 급감하고, 감염자 중 바이러스 항체가 생긴 사람들이 우월한 신체를 가진 신인류로 부상하면서 일어나는 이야기가 중심이 된다. 태양이 공평히 떠 있는 하늘 아래, 신인류 ‘녹스’와 구인류 ‘큐리오’의 정신과 육체를 이분법적으로 나눈 세계를 그린다. 큐리오는 ‘골동품’이라는 뜻으로 신인류인 녹스가 구인류에게 붙인 명칭이며, 녹스는 라틴어로 ‘밤’을 뜻하는 만큼 태양이 없는 밤하늘 아래에서만 살아갈 수 있음을 의미하는 동시에 ‘꿈’을 의미하기도 하는 만큼 현재 인류가 꿈꾸는 질병과 노화가 없는 상태의 이상향의 인간임을 보여준다. 이때 녹스는 뱀파이어를 모티프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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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는 전반적으로 굉장히 어두우며, 쓰레기가 곳곳에 비치되어 있다. 쓰레기는 큐리오를 비유적으로 나타내는 상징체이다. 점점 극이 진행되면서 잡동사니가 붙은 벽이 점차 내려오는데 이는 녹스와 큐리오의 관계에서 열등하고 버려진 존재였다고 생각되었던 큐리오의 존재 의의 및 중요성이 중요해지며 그것이 차지하는 범위가 넓어진다. 스토리는 일본 작품을 각색한 만큼 의식하지 않아도 일본적인 느낌이 곳곳에 묻어난다. 간단한 일본어를 사용한 언어유희뿐만 아니라 일본 문화, 일본 문화예술 특유의 분위기가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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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스의 모습 ©국립정동극장

 

 

극은 구인류가 모여 사는 작은 마을에서 신인류 녹스가 살해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 사건으로 인해 마을은 고립되고, 사람들은 떠나 남은 주민은 스무 명 남짓밖에 되지 않는다. 이후 10년이 지나고 봉쇄가 풀리게 되자 다시 녹스와의 왕래가 시작되며 녹스들이 머무는 도시와 구인류가 보여 사는 도시 사이의 경계선을 지키는 안내원으로 녹스가 배치된다. 녹스는 큐리오를 열등한 존재로 여기고 그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한때 그들도 큐리오였음에도 말이다. 녹스는 감정을 느끼지 못하고 혈연에 집착하지 않으며, 이성적인 사고만 하며 삶을 살아간다. 이런 그들의 모습은 마치 인간이 아닌, 즉 로봇과 같은 부자연스러운 움직임과 말투 등으로 함께 나타나면서 보는 이로 하여금 불쾌한 감정을 느끼게 한다. 마치, 불쾌한 골짜기처럼 말이다. 차이가 있다면 이들은 기계가 아닌 인간이라는 점이다. 로봇 같은 신인류의 움직임은 마치 녹스는 마치 AI가 지금의 인간을 지배하게 될지도 모르는 미래 세상의 모습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녹스가 되기를 갈망하는 소년, 오쿠데라 데츠히코는  두 마을의 경계선에서 안내원 역할을 하는 모리시게 후지타와 친구가 된다. 그는 찻잎 농사를 짓고 있었지만 학교에 가고 싶어 하며, 이에 후지타가 가지고 온 잡지에 눈이 휘둥그레진다. 데츠히코가 녹스가 되어 학교에 가고 싶어 하는 것은 곧 비문명에서 문명으로, 현재에서 미래로 이행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을 보여준다. 반면 비슷한 나이대인 소녀 이쿠타 유는 녹스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큐리오 중에서도 녹스가 되길 원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대비, 녹스 중에서도 큐리오를 이해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간의 대립을 바탕으로 이분화되어 있는 두 항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이것이 어떻게 아슬아슬하게 공존하고 있는지 드러낸다.

 

극은 지속적으로 녹스와 큐리오 간의 대비를 통해 밤에만 살 수 있지만 질병과 노화에서 해방된 신인류, 태양과 달 아래에서 모두 살 수 있지만 도태되었다고 평가되는 구인류를 다각도로 조명한다. 이때 녹스는 보라색, 큐리오는 녹색 조명을 메인 조명으로 사용하며, 그들의 경계선은 파란색과 보라색이 섞인 파란색으로 표현한다. 서로의 장단점을 보여주며 과연 어느 쪽이 우월하고 열등한 것인지, 아니면 판단할 수 없는 것인지 등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사소한 다툼은 있지만 별다른 충돌과 대립 없이 평화롭게 시간이 지나가던 때, 10여 년 전에 녹스를 살해하고 마을을 떠난 오쿠데라 카츠야가 돌아온다. 그는 돌아오자마자 모리시게에게 쇠사슬을 채워 태양 아래서 죽어가게 한다. 이에 오쿠데라 준코와 오쿠데라 데츠히코는 그를 구하고자 안간힘을 쓰지만 태양이 뜨게 되고, 그를 살리기 위해 그들은 결국 쇠사슬이 채워진 그의 손목을 자르게 된다. 데츠히코는 분노하여 카츠야에게 덤벼들고 이를 본 사람들은 누구도 그들을 저지하지 않는다. 오직 이쿠타 유만이 사람들에게 호소하며 그들을 멈춰달라고 한다. 결국 이들의 싸움 끝에 카츠야는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이 모습을 본 유는 녹스가 되기로 결심한다. 반면에 데츠히코는 녹스가 되고 싶어 하는 마음을 접을 것으로 암시된다. 싸움이 싫었던 유는 싸움이 없는 녹스의 세계로 가고, 싸워서 자신에게 소중한 것을 지키고자 했던 데츠히코는 큐리오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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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리오의 모습 ©국립정동극장

 

 

그 후 이쿠타 소이치의 오래된 친구였던 카네다 요지가 큐리오의 마을을 찾아온다. 그는 원래 큐리오였지만 녹스가 된 인간이다. 하지만 그는 녹스가 되길 원하지 않던 유가 녹스가 되기 위해 자신의 친엄마를 찾아온 것, 소이치와 나눈 대화 등 복합적인 상황을 겪으며 그는 말한다. “달이 빛나는 건 태양의 빛에 반사돼서야. 인간은 태양을 등지고 살면 안 돼”. 세상은 녹스를 큐리오보다 우월한 존재라고 규정하지만, 녹스가 빛날 수 있는 것은 큐리오가 있기 때문이다. 녹스는 혈연에 집착하지 않고 평안한 상태를 추구하기 때문에 그들은 아이를 낳지 않는다. 이에 큐리오 아이들을 납치해 와서 녹스로 만든다. 즉, 녹스는 뛰어난 듯 보이나 그 사회를 지속적으로 유지해나가기 위해서는 큐리오가 꼭 필요한 존재이다. 또한 그들 또한 대부분 큐리오였다는 점에서 녹스는 큐리오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태양이 있어 달이 빛날 수 있듯이 녹스 또한 큐리오가 있기 때문에 빛날 수 있는 것이다. 녹스의 삶에 회의를 느낀 요지는 ‘태양을 보고 싶다’는 염원을 실현하기 위해 소이치와 함께 태양 빛을 마주하며 죽어간다.

 

극은 죽음으로 시작해 죽음으로 끝난다. 그리고 그 죽음의 과정은 단숨에, 짧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무용을 가미하여 긴 시간 동안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를 지켜보는 관객은 불쾌함 또는 끔찍함과 같은 감정을 느낀다. 죽음은 큐리오들이 살아가던 도시가 봉쇄된 이유였으며, 카츠야의 죽음은 녹스와 큐리오 간의 치솟은 갈등, 큐리오와 녹스의 관계를 보여주었으며, 요지의 죽음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 선택한 결과였다. 즉, 사회에서 도태된 큐리오라 해도 모든 인간의 죽음은 의미가 있다. 또한 아무리 노화와 질병에서 자유로워졌다고 해도 녹스 또한 영원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니다. 즉, 구인류와 신인류 모두에게 죽음은 평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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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동품을 뜻하는 큐리오는 절대 사회에서 필요 없는 존재가 아니다. 골동품은 고물과 다르다. 골동품은 ‘미술적 및 역사적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는 오래되거나 희귀한 옛날 물건’을 의미하는 만큼 큐리오 또한 단순히 사회에서 도태된 구인류가 아니라 그들만의 가치가 있는 사람들이다. 극은 바이러스로 나누어진 두 갈래 인류를 통해 위계와 차별과 이상과 현실 등을 그리며 공존의 시대, 갈등이 드리운 현대 사회의 모습을 비춘다. 하지만 동시에 이 극은 AI와 인간의 관계 또한 보여준다. 우리는 언젠가 AI가 인간을 뛰어넘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을 가지고 있으며, 인간은 영생을 원하며 노화와 질병을 거부한다. 인간은 계속해서 진화하고자 하며 지금보다 더 우월한 존재가 되기를 원한다. 이런 면에서 극은 관객에게 녹스와 큐리오 중 선택할 수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지 끊임없이 묻는다.

 

 

[김소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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