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쾌한 골짜기

<MMCA 현대차 시리즈 2022: 최우람 - 작은 방주>를 음미하며
글 입력 2023.02.15 23:39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작은 방주 포스터.jpg

 

 

사람은 자신과 닮은 것이 있다면 닮은 점이 많을수록 그 대상에게 호감을 느낀다.

그러나 ‘불쾌한 골짜기’가 보는 관점은 다르다.

 

불쾌한 골짜기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인간이 아닌 생물체 혹은 무생물이 인간과 일정 수준 이상으로 유사할 경우 

인간은 그 물체에 대하여 불쾌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해당 이론은 '불쾌한 골짜기' 이론으로 1906년 독일의 정신과 의사 에른스트 옌치가 먼저 사용한 이론이다. 살면서 불쾌한 골짜기 이론을 몸소 느낀 적이 딱 두 번 있는데, 첫 번째는 애니메이션 <토마스와 친구들>을 보면서 그리고 두 번째는 바로 이 전시회를 보면서이다.

 

마치 전시를 보는 순간이 아닌 한 인간의 몸속을 탐험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실제 인간과 거리가 있는 소재와 재료들이 인간을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어 마치 살아있는 사람의 내부를 관람하는 듯한 느낌이 들어 전시를 더 분석적으로 살펴볼 수 있게 했다. 그리고 작품들은 나를 구성하는 요소 하나하나를 꿰뚫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불주사를 맞는 것 같은 작품들 덕분에 아직도 내 몸은 이곳저곳이 아리다. 인간의 어두움과 현실적인 면모를 꼬집는 듯한 이 전시의 작품을 하나씩 살펴보면서 내가 느꼈던 불쾌한 골짜기들에 대해 자세하게 감상을 남겨보고자 한다.

 

 

원탁.png
<원탁>

 

 

우선 전시의 첫인상을 결정지어준 <원탁><검은 새>. 이 두 작품은 전시를 방문하기 전부터 알고 있었던 매우 유명한 작품이다. 지푸라기로 만든 인간의 형상 그리고 그 위에 올려져 있는 원판, 원판 위에 올라와 있는 동그란 공 마지막으로 그 위를 섬뜩하게 날아다니는 까마귀의 모습은 인간성의 바닥 그 자체를 표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의 공 즉 머리를 차지하기 위해 무릎을 수도 없이 굽혔다가 피는 인간들의 모습은 아무도 그 공을 온전히 소유할 수 없음을 전혀 깨닫고 있지 못했다. 그저 뒤돌아서 공을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인간들의 형상은 무의미한 목표를 위해 서로 부딪히고 경쟁하고 오히려 서로에게 짐을 짊어지우는 경쟁과열의 현실을 나타내는 듯했다.

 

사실 지푸라기는 약하다. 물과 불에 약한 지푸라기는 자신보다 강하거나 무서운 존재를 만나면 꺾이기 마련이다. 그런 지푸라기로 되어있는 인간들의 모습이 같은 인간으로서 매우 섬뜩했다. 인간이 얼마나 약한지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치부를 들킨 느낌이랄까? 이를 둘러싸고 있는 나를 포함한 관객들의 표정을 관람하면서 한 번 더 소름이 돋았다. 인간의 무지함을 표현한 작품을 보고도 사진을 찍고 웃고 감탄하고 있는 인간들의 모습은 그저“우리는 이들과 다르겠지” 라고 여기는 것 같았다. 혹 그 이유가 아니라면 다들 나처럼 씁쓸함을 감추기 위해 대신 핸드폰을 꺼내든 것일까?

 

전시 공연이 끝난 후 하늘에 매달려 있는 까마귀들을 바라보았다. 소리를 내지 않아도 울려퍼지는 까마귀 소리는 내 귓 속에 파고들어 죽음의 이미지를 형상화 시키는 데 충분했다. 이 작품을 보면서 든 총체적인 생각은 이러하다. 사실 이 지푸라기들은 이미 죽어 있는 인간성을 상징하는 것은 아닐까? 가끔 사극에서 누군가에 대한 원망을 가진 주인공이 상대를 지푸라기 인형으로 형상화해 굿을 하는 것처럼 이들은 이미 어떤 것에 의해 죽음을 당한 존재이고 그렇기에 까마귀들이 그들 위에 군림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죽어서도 서로 경쟁하려 하고 본인들이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정확히 인식하지 못한 채 아등바등하면서 살아가는 삶 그것이 바로 ‘우리가 스스로 살인하지 말아야할 우리의 인간다움인 것‘이다. 같은 인간으로서 지푸라기로 살기보다는 차라리 저 공이 되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오히려 공이 된다면 누군가가 원하는 대상이 되어 그들을 바라보면서 상황 전체를 파악하는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작은.jpg
<작은 방주>

 

 

두 번째, <작은 방주>. 이 전시회에서 가장 집중을 받고 있는 작품이다. 전시장을 들어서자마자 그 크기에 압도되었고, 조형물이 이루어내고 있는 분위기에 두 번 압도 당했다. 길게 연이어서 이어지는 나무 판자들 사이로 파도가 일렁거리는 듯한 공연은 저런 기술을 보유하기 위해 인간이 얼마나 고생했는지가 떠오를 정도로 정교하고 세심했다. 공연 전 움직임이 없는 작은 방주에서는 방주 안에 있는 두 선장과 등대를 주목해서 볼 수 있었다. 등대는 길을 알려주기 위해 배와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하는 데, 작은 방주에서는 바로 배 안, 심지어 선장들 등 뒤에 위치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두 선장은 대체 길을 어떻게 찾을 것인가? 더불어 두 선장은 각기 다른 방향을 손가락으로 가르키고 있었다.

 

’사회‘ 라는 커다란 방주에는 작은 방주보다 훨씬 더 많은 선장들이 존재하고 그렇다면 실제 사회에서는 인간들이 향하고자 하는 목적지를 찾기가 얼마나 더 힘들지 예상이 되었다.

 

하지만 인간들은 자신의 목표가 흐릿하고 보이지 않아도 멈춰서 아무것도 하지 않을까?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가고자 하는 삶의 방향이 흐릿해도 멈추지 않는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멈추는 방법을 잘 모르는 것 같다. 내가 지금 가는 방향이 알맞은 방향인지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있지 않으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달려가는 모습을 보고 불안함을 느껴 몸을 이끌고 항해하고 있다.

 

그러나 내 목표가 흐릿하고 무기력할 때 우리는 '닻'을 내리고 잠시 정착할 줄 알아야 한다. 꼭 섬이나 육지에 정착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 곳이 파도처럼 일렁이는 수면 위여도 충분히 생각할 시간만 주어진다면 상관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멈춰서 내 등대가 지금 어디를 가르키고 있는지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혹 <작은 방주> 공연처럼 파도가 더 거세지고 나를 집어삼킬 만큼 위협적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 우리는 배를 두 손으로 꼭 붙잡아야 한다. 즉 우리가 몸을 담고 있는 이 사회, 그리고 같이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붙잡고 버텨야 한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사람은 누군가를 붙잡고 살아가야 하기에 작은 방주에서도 선장이 두 명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서로 도움을 주면서 파도를 이겨내야 다시 올바른 길로 항해를 재개할 수 있다.

 

파도가 일렁임에도 두 선장은 끝까지 요동이 없다. 기술의 한계인지 작가의 의도인지는 모르겠으나 두 선장의 움직임이 없었다는 건 현대사회의 인간들이 얼마나 수동적인지를 비판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불쾌한 골짜기를 마주한 것이다. 인간들이 파도를 이겨내기에는 주변을 돌아볼 힘이 없는 것일까 아님 알고 있으면서도 그저 나아가기에 급급한 것일까 우리는 계속해서 고민을 해 볼 필요가 있다.

 

 

KakaoTalk_20230215_234351406.jpg
<샤크라 램프>와 <알라 아우레우스 나티비타스>

 

 

인간은 희망이라는 파편도 가지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야기해볼 작품은 바로 <샤크라 램프><알라 아우레우스 나티비타스>이다. 이 작품은 수레바퀴 모양을 하고 꽃이 피었다 지는 모습을 반복하는 조형물이다. 처음 보자마자 든 생각은 꽃을 이루고 있는 꽃잎들의 모습이었다. 꽃잎들을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꽃잎들을 날개로 표현한 것을 볼 수 있다. 최우람의 <천사>라는 작품에서도 날개를 사용하였는데, 반복해서 같은 소재를 사용한 이유에 대해서도 궁금해졌다. 사실 날개는 인간과 밀접한 소재는 아니다. 천사 혹은 악마와 같이 신적인 존재를 나타날 때 자주 등장하는 소재이기 때문이다. 대체 날개가 왜 인간을 나타내는 작품에 등장한 것일까?

 

날개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았다. 과연 날개가 신적인 존재만을 표현하기 위한 도구일까? 날개는 그렇지 않다. 생각보다 이 세상에는 날개를 가진 것들이 많다. 조류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식물에게도 잎사귀라는 날개가 존재한다. 여기서 가장 집중한 점은 식물의 잎사귀가 바로 ‘날개’일 수 있다는 점이다. 날개는 ‘생명을 의미하는 존재’를 비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앞서서 언급하지 않았던 <하나>라는 작품도 동일하게 꽃 봉우리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오므렸다가 펴지는 모습은 마치 얼마 남지 않은 생명을 겨우 연명하고 있는 꽃의 모습 같았다.

 

결론적으로 꽃잎의 잎사귀를 ‘날개’로 표현한 것은 여전히 인간에게는 생명력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그 생명력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을 아닐까? 이 전시회에서 가장 작게 표현된 작품이라는 것도 주목해볼 만하다. 사실 희망과 생명력이라는 긍정적인 힘은 영향력을 따져보았을 때 욕망과 우울감에 비해 현저히 작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나에게 긍정적이고 힘이 나는 이야기를 할 때보다 우울하고 화나는 감정을 털어놓을 때 인간의 마음이 더 크게 동요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기에 인간의 부정적인 감정과 요소를 크게,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부분을 작게 표현한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한다. 자세히 보면 그 꽃들 안에는 희미한 불빛들이 빛을 내고 있다. 빛이 번쩍일 때마다 마치 두 개의 꽃이 인간의 눈처럼 번쩍이는 듯한 느낌을 받았는데, 이럴 때마다 내가 ‘살아있음’을 느꼈고, 인간의 심리뿐만 아니라 신체를 표현했다는 느낌 또한 들었다.

 

 

시작.jpg
<하나>

 

 

앞서 나는 이 전시회에서 경험한 불쾌한 골짜기에 대해서 계속 이야기했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전시를 감상하면서 이제는 ‘불쾌한 골짜기’보다 ‘유쾌한 골짜기’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싶다. 인간이 아닌 사물로써 인간을 표현했지만 오히려 작은 희망 또한 얻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신과 닮은 것이 있다면 닮은 점이 많을수록 그 대상에게 호감을 느낀다.

 

이 전시를 통해 인간의 적나라한 현실을 되돌아보고 개선해야 할 부분을 솔직하게 직면하는 것이 불쾌한 골짜기를 메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불쾌한 골짜기에서 벗어나 인간을 유쾌한 골짜기에서 마주 볼 기회가 더 많아지길 바라본다. 앞으로 만날 또 다른 현대 미술 전시에서는 유쾌한 골짜기를 다뤄줄 작가가 나타나면 좋을 것 같다. 혹여나 그러한 전시를 내가 기획할 날이 오게 된다면 나의 고민을 응축시켜서 반영해보고 싶다.

 

 

[임주은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7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