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두 번째 서른 살

이제 겨우 3분의 1을 지났다
글 입력 2023.01.03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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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만 지나면

전 서른 살이 돼요.

스티븐 손드하임이 브로드웨이에 데뷔하고

폴 매카트니가 존 레넌과 마지막 곡을 만든 나이보다 많죠.

우리 부모님은 서른에 이미 자식이 둘이었고

따박따박 돈 나오는 직업과 집도 있었어요.

8일 후면 내 청춘은 영원히 끝나는데

난 해놓은 게 뭐죠?"


- 영화 'tick, tick...BOOM!'

 


새해 첫 영화로 고른 것은 앤드류 가필드 주연의 뮤지컬 영화 '틱틱붐(tick, tick...BOOM!)'이다.


고백건대, 영화에 대한 아무런 정보 없이 시작하였다. 그가 연기하는 '조나단 라슨'은 변변한 직업도 수입도 없는 예술가이며 서른 살 생일을 앞두고 죽은 거나 다름없다며 노래 불렀다. 오직 열정만으로 꿈을 좇아 달려왔는데 숫자 하나 바뀐다고 나의 청춘이 종식된 기분.


나는 그 기분을 알고 있다. 이제 막 삼십대로 접어든 모든 이들이 겪는 성장통이 아닐는지.


단지 숫자 '2'에서 '3'으로 나아가는 것뿐인데 어쩜 이리도 공포스러울 수 있을까. 마치 노스트라다무스가 세계종말을 예언했던 1999년, 죽음의 새천년을 맞이하던 사람들 같다. 이십 대가 끝나면 청춘도 끝나는 거래. 누군가 머릿속에 그리 주입시켰다. 그렇다면 청춘은 29살까지라고 누가 정했지? 궁금해진다.


'오늘부터 당신은 서른 살이 되었으니 청춘이 끝났습니다. 꿈은 이제 접어두고 결혼과 자식계획을 세워 안정적인 경제활동을 시작하세요.' 따위의 매뉴얼은 존재하지 않는데도 말이다.


나의 서른 살 생일은 작년 3월이었다. 정말 별 것 없었다. 영화에서처럼 파티를 즐기지도 않았고 손수 미역국을 끓여 고양이와 오붓하게 보낸 조용한 하루였다. 불과 몇 년 전이었다면 디데이를 세며 설렘에 잠 못 이루고 열두 시 땡 치자마자 밀려드는 축하 메시지에 온 마음을 쏟았을 테다. 현재는 그저 모든 것이 초연할 뿐이다.


그런 와중에 한국식 나이 셈법이 바뀌어 두 번째 서른 살을 앞두고 있다. 정확히는 6월부터 시행되는 나이 셈법이니, 반쪽짜리 서른 살이나 다름없었다.


조나단 라슨은 시간을 뒤로 돌려달라고 말했지만, 근 몇 년 동안 지고 있는 청춘에 고민을 거듭했던 시간들은 대체 어디로 사라져 버린 걸까. 내가 원한 것은 단지 어리고 예쁜 나이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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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이라는 숫자가 참 애매하다. 100세 시대에 이제 겨우 3분의 1일만큼 살아온 것인데,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다고 하기엔 그 간의 시간들이 허무하고 여전히 갈 길이 먼 숫자 같다.


10년 넘게 우정을 이어오고 있는 나의 친구들의 화젯거리는 온통 '주식‘ ’결혼‘ ’진급‘ 이야기로 들끓는다. 로또는 당연지사고, 매달 받는 쥐꼬리만 한 월급만으로는 변변찮은 월세방만 전전하게 될 거란다. 옛날 같으면 자식을 놓고도 상투를 틀었을 나이라며 결혼에 조급해하는 친구 A와 달리 나의 인생가도는 다른 결을 띄고 있다.


주식도, 결혼에도 영 관심이 없었다. 누군가에게는 내 집 마련이 꿈이 될 수도 있겠으나 내게 그런 것들은 '오늘을 살자!'라는 좌우명에 따라오는 부수적인 문제에 불과했다. 그러나 어른들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다. 너도 이제 나이가 서른인데. 그 말을 마치 안부인사인양 귀에 달고 살았다.


서른 살을 앞둔 딱 일 년 전에는 청첩장이 우후죽순처럼 쏟아졌다. SNS에는 저마다의 행복을 뽐내기 위한 웨딩사진들이 줄줄이 나를 반겼다. 벌써 2년 전 일이지만, 중학교 동창이었던 친구 J의 결혼은 내게 크나큰 충격으로 다가왔었다. 그동안 결혼에 대한 한 마디 언질도 없었는데 어느새 저만치 멀어진 것일까. 출근하자마자 들려온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나는 축하보다 서운함을 내보였다.


서른 살은 그런 나이였다. 이룬 것보다 이뤄가야 할 날들이 많은 내게 원동력이나 마찬가지인 친구들마저 앗아가는 나이. J뿐만 아니라 하나둘 들려오는 결혼 소식이 어찌나 원망스러웠는지. 언젠가 3차까지 이어지던 늦은 술자리에서 ‘다들 나를 두고 가지 말라’며 눈물을 쏟았던 날은 평생의 흑역사가 되었다.


다시 영화 '틱틱붐'으로 돌아가보자. 조나단 라슨의 절친한 친구 마이클은 한 때 연극배우였으나 현실과 타협하는 인물이다. 조나단은 그가 얻은 값비싼 차와 주차요원이 딸린 멋진 아파트를 보며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자신의 상황에 좌절한다.


돈도 없으면서 파티를 열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다는 핑계로 현실을 부정해온 결과였다. 나의 현실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오늘을 살고 싶다고 말해왔지만 자칫하면 오늘‘만’ 사는 철부지 서른 살로 남을 수도 있었다.


두 번째 서른 살은 달라야 하지 않을까. 아니, 달라져야만 했다. 나는 필히 원망 대신 진심 어린 축하와 격려를 건넬 줄 아는 다정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곁에 남아있는 소중한 사람들이 쌓아온 결실 앞에 서운함의 눈물은 가당치도 않다. 특히 영화에서 자신의 커리어와 노력을 헛되게 만드는 조나단을 꾸짖는 마이클을 보며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처럼 얼얼했다.


우리는 유독 학창 시절 사귄 친구들과 자신을 끊임없이 비교해 오지 않았는가. 당연하게도 같은 출발선에서 시작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나 역시 또래보다 일찍이 취업하여 어느 정도 수입이 있었고 대학원까지 진학하여 공부에 정진하는 몇몇 친구들과 트러블이 있어 왔다.


그때의 나는 마이클인 줄 알았는데, 눈 떠보니 서른을 노래하는 조나단 라슨이 되어 있다. MZ세대로 불리며 높은 조기퇴사율에 기여하고 있는 셈이었다. 어쭙잖은 꿈을 좇는다는 핑계로 친구들이 이뤄낸 노력들까지 발아래 두고 있던 것은 아닐까.


물론 조나단과 같은 예술을 한답시고 현실을 잊은 것은 아니다. 매달 빠져나가는 고정지출을 위해 매일 서점으로 출근하여 바쁘게 일을 했다. 생계를 유지하며 하고 싶은 일에 몰두하는 것은 굉장한 체력소모전이었다. 딱히 눈에 보이는 성과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말할 수 있는 것은 삶의 만족도가 달라졌다는 것이다.


그렇게도 되기 싫었던 나이 서른 살을 맞이하자, 조급함 대신 여유로움이 들어섰다. 앞서 초연해졌다는 표현을 했으나 좀 더 너그러워진 느낌에 가까웠다. 그 비결은 스스로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용기에서 시작되었다. 소위 청춘이라고 부르는 젊고 아름다운 이십 대가 끝이 났지만 새롭게 시작되는 나를 응원하는 것. 서비스업이라는 새로운 활동은 식견을 넓혀주는 좋은 경험이 되었고 나는 여전히 좋아하는 글을 쓰며 시간을 보낸다. 그 시간들을 사랑하게 되었다.


일찍이 좌절하기엔 사실 서른 살은 너무 어린 나이다. 벌써 인생의 3분의 1일을 지나왔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이제 겨우 3분의 1을 지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은 같을 수 없으니, 후자의 편에 서기로 한다. 서른 살 앞에 무너지기 전에 반드시 깨달았으면 바라는 것은 개개인의 인생 지표는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조나단은 36세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서른이라는 숫자 앞에 현실과 타협하려고도 해 봤다. 그에게 주어진 시간이 단 몇 년뿐이라는 걸 알았다면 현실은 개나 줘버리라며 펄쩍 뛰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한 치 앞도 모르는 인생이 아니던가. 이 세상 모든 조나단 라슨에게도, 마이클에게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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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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