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당신] 인류 종말을 앞두고, 빼어나게 어여쁜 너에게

글 입력 2023.01.01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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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영화를 하나 봤어. 내가 태어나기도 전의 영화, 그러니 네가 태어나기도 전의 영화.


영화는 인류 종말을 앞둔 사람들을 담고 있었어. 혜성이 지구로 오고 있고, 그 혜성을 폭파시키지 못할 최악의 상황에는 모든 인류가 종말 될 수 있다는 내용이 발표돼. 영화에서는 이 발표에 연관된 갖가지 사람들이 나와. 좋아하는 여자애를 따라 천체 클럽에 가입했다가 최초로 이 혜성을 발견한 중학생 남자애, 메인 앵커를 꿈꾸며 끈질기게 취재하다가 이 내용의 독점 취재 권한을 얻어 메인 앵커 자리를 꿰찬 기자, 이 혜성을 분해할 의무를 지고 지구를 떠난 우주비행사.


너는 이런 상황이라면 뭘 할 것 같아? 당장 일주일 뒤에 혜성이 충돌해서 인류가 종말이 될 거라면 말이야. 우리가 지금 뭘 하든 사실 아무 의미 없을 수도 있고, 당장 며칠 뒤면 내가 존재했다는 것도 아무도 모를 수도, 나라는 존재뿐만 아니라 내가 아는 세계도 나도 함께 없어진다면 말이야.


나는 뭘 할까, 생각해봤어. 서울에서 혼자 자취하고 있는 지금, 당장 본가로 내려가 부모님과 시간을 보낼까, 아니면 내가 정말 사랑하는 친구들에게 시간을 더 보내달라고 징징댈까, 그것도 아니면 어떻게든 살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며 더 높고 안전한 곳으로 도망을 치든가 아니면 지하 땅굴을 파서 숨어버릴까.

 

사실 마지막 옵션은 내가 생각해낸 건 아니야. 난 평소에도 별로 삶에 미련이 없다고 생각하며 살거든. 오늘 당장 죽어도 여한 없는 삶을 살았다, 라고. 이렇게 말하니까 퍽 낭만적이게 들리네. 그렇지는 않은데.


하여튼. 이 세상은 그대로고 나만 없어진다면 뭐 기록이라도 해서 나를 세상에 새길까 싶은데, 그럴 수도 없잖아. 기록이란 것도 결국 남겨진 사람들의 몫인데, 남길 수 있는 방법도, 남겨진 사람도 없다면. 아, 진짜 뭘 할까? ‘남’을 생각하지 않고 정말 오롯이 나만 생각했을 때, 내가 죽기 전에 하지 못해서 후회할 일이 없을까.


그렇게 생각하니까 네가 생각났어. 내가 죽을 때 오롯이 후회할 일.

너를 보지 못했더라고, 내가.


아직 너를 만나지 못했고, 그래서 너를 보고 싶다고 말하지도 못했고, 내가 널 얼마나 떠올리는지도 말하지 못했고, 내가 널 바라보는 이유는 무엇이고, 내가 너의 어떤 부분을 예쁘다고 생각했는지, 언제 널 기억하며 위로를 받는지, 내가 널 생각하는 마음의 모양은 어떤 모양인지도 말하지 못했더라고.

 

그 마음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 마음은 나의 마음 중에 예쁘고 소중한 부분만 모아 모아 곱게 빚은 것이고, 그 공예품은, 마음 따위 진심만 있으면 되는 거 아니냐고 생각했던 내가 처음으로 모양까지도 어여쁘게 빚어내고 싶다고 생각했던 나의 첫 시도이자 결과물이고, 어쨌든 나의 것인 마음이기에 감히 키워냈지만, 그 안에 네가 담겨 함부로 할 수는 없었다고, 그렇게 내가 소중히 너를 간직했었다고. 그 말을 못했더라고. 꼭 만나서 알려주고 싶었거든. 나는 진심은 눈빛이 직접 가닿고, 목소리가 직접 가닿아야 닿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 이 마음을 주는 것도 최선의 아름다운 방법으로 주고 싶었거든, 너에게는.


그렇게 생각하니 난 그 재난 상황 속에서 얌전히 죽을 수가 없겠더라. 영화 한 장면의 여느 사람들처럼, 벙커 앞에서 제발 들여보내 달라고 빌거나, 아니면 고도가 높은 산꼭대기 너머로 도망치겠더라. 어쩌면 내가 내일 죽어도 여한 없이 살 수 있는 건, 역설적으로 내일을 살 수 있을 거라는 안도감이 기저에 깔렸기 때문일 거라는 생각도 들었어. 막상 당장 너를 못 보고 죽는다고 생각하니, 도저히, 말도 안 되는 거 있지. 어쩌면 그래서 내일도 살 수 있는 것 같아. 그 언젠 가의 내일에 나는 너를 만날 테니까.


참 우습지. 근데 있지, 참 우습게도, 이 영화에서도 모든 사람이 죽기 전에 사랑을 해.


혜성 폭파 작전이 실패하면서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아. 정부에서는 벙커에서 2년 동안 살아서 후세대를 보존할 사람들을 선발해. 혜성을 처음 발견했던 남자아이는 벙커에 들어갈 사람으로 선발돼. 그런데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아이는 선발이 안 되어서, 그녀를 지키기 위해 열네 살의 나이에 혼인해. 법적으로 부부가 되었으니 이제 진짜 지킬 자격이 되는 거지. 앵커는 사회적 지위를 인정받아 선발되지만, 그 자리를 어린 딸을 지켜야 하는 선배와 그 딸에게 양보해. 그리고 유년 시절 이후 처음으로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며 파도를 마주한다? 우주비행사들은, 죽음을 앞두고서도 모두 자신의 가족에게 사랑 인사를 해. 오래전 사별한 아내 사진을 매만지며 곧 가겠다고 인사하는 남편도 있고, 눈을 잃었음에도 화면 너머 자신의 아기에게 좋은 사람이 되라고 말하는 아빠도 있어. 만인이 평등한 인류 종말, 그 죽음 앞에서 사람들은 모두 사랑을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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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도 죽지 않을 거야. 내일 이 세계에 인류 종말이 예고된다고 해도,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그러니 너도 살아남아야 해. 너를 위해 사는 나를 위해서.


너는 너를 제외한 온 세상이 얼어붙어도 혼자 살아남겠다고 얘기해서 염려가 없다가도, 또 좀비 같은 공공의 적이 생겼을 때는 맞서 싸우다 먼저 죽을 것 같다고 얘기해서 걱정이 피어오르기도 해. 그래도, 우리가 괴물이 등장하는 게임 속 세상으로 들어가지 않는 이상 좀비가 나타날 일은 없을 테니까. 적이 아니라 종말의 앞에서 너는 잘살아남을 거라 믿어. 어쩌면 너는 벙커에 들어갈 분야별 권위자에 선발될지도 모르겠다. 너는 대단한 사람이니까. 그럼 나도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되어야지. 절망 속 벙커에서라도, 널 만난다면 난 생애 후회는 없을 사람이 될 테니까. 네가 나의 우주고, 네가 나의 별이니까.


나는 살기로 했어. 원래도 살고 있었지만, 종말의 끝에서도 꺾이지 않을 마음으로. 내 마음속 널 지켜야 하니까.

그러니 너도 살아줘. 나를 지키는 너를 부디 살아내 줘. 너는 오늘도 나를 살게 했으니.


빼어나게 어여쁜 너에게.

지혜가 빛날 내가.


추신. 나는 너로 인해 흔한 이름도 귀하게 느껴질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어.

 

 

* 영화 : 딥 임팩트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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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영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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