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엄숙한 한국 관객 앞에서 부활한 몰리에르의 코메디아 델라르테 - 연극 '스카팽'

글 입력 2022.12.27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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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극단] 스카팽(2022) 공연사진16.jpg

공연 사진: 국립극단 제공

 

 

 

1. 처음 만나는 몰리에르 희극


 

2022년은 프랑스 최고 극작가 몰리에르가 탄생한 지 400년이 되는 해다. 몰리에르는 당대 최고의 극작가이자 희극 배우였으며, 그가 남긴 작품들은 오늘날까지 살아남아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도 그 위세를 뽐내고 있다. 뜻깊은 시기에 몰리에르의 작품을 만난 상황이 참 감격스럽다. 하지만 이런 뜻깊은 상황에서 고백하자면,'스카팽'은 내가 처음으로 감상한 고전 희극이다.

 

여기서 고전이라고 표현하긴 했지만, '스카팽'은 단순히 몰리에르의 작품을 그대로 옮겨온 것은 아니다. 하지만 몰리에르의 작품성과 원작 '스카펭의 간계'의 내용을 완전히 바꾸어 현대적으로 바꾸어 놓은 것도 아니다. 400년의 세월을 뚫고 현대 무대에 오른 스카팽은 고전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세련되며, 섬세하고 치밀한 연출적 장치를 활용해 몰리에르의 작품성을 충실하게 담아낸다. 이런 새로운 연출에 대해서는 쓸 말이 많은데 이 부분은 현대적으로 표현한 연출적 장치에 관해 쓸 때 자세히 쓰겠다.

 

처음 감상한 희극은 몇 가지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우선 '스카펭의 간계'의 내용을 간단히 설명하자면 아래와 같다. 재벌의 아들, 옥따브와 레앙드르는 두 명이 신분이 낮은 여자인 제르비네뜨와 이아상뜨(집시와 가난한 여인)와 사랑에 빠져 결혼하길 원한다. 하지만 그들의 아버지인 아르강뜨와 제롱뜨는 서로의 아들딸을 결혼시켜 사업적 동맹관계를 맺길 바라기 때문에 이들의 사랑을 허락하지 않는다.

 

아르강뜨는 옥따브에게 제롱뜨의 딸과 결혼할 것을 강요한다. 제롱뜨의 딸이 배를 타고 돌아오는 상황, 젊은 연인들의 사랑은 위기에 처한다. 제르비네뜨는 자유를 찾기 위해 돈이 필요하고, 가난한 여인인 이아상뜨는 3일 전 옥따브와 결혼했음에도 사업적 동맹관계로 인한 결혼으로 자신의 애인을 뺏길 위기에 처한다.

 

아들들은 영리한 하인 스카펭에게 자신의 사랑을 지켜줄 것을, 아버지들은 그들의 사랑을 중단시키라고 요청한다. 스카펭은 처음에는 한사코 거절하지만, 이들의 순수한 사랑을 위해 간계를 꾸미기로 한다. 가짜로 음모를 꾸며 수전노인 재벌에게서 돈을 뜯어내고, 보따리에 넣어 몽둥이로 찜질하면서 개인적인 원한을 푼다. 하지만 스카펭이 꾸며낸 음모는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들통 나고, 아버지들은 복수를 위해 그를 찾는다. 하지만 두 여인이 각 가문의 잃어버린 딸이었음이 밝혀지면서 분위기는 반전된다. 스카펭은 다친 척하면서 용서를 구하고, 끝내 모두가 용서하고 다 같이 축배를 들러간다.

 

 

[국립극단] 스카팽(2022) 공연사진02.jpg

 

 

희극 '스카펭의 간계'에는 결함이 있는 인물이 등장한다. 여러 인물이 등장하지만 대체로 강자와 약자로 구분할 수 있다. 강자에 해당하는 것은 두 아들의 아버지, 재벌집의 아들들이다. 하지만 이들 도련님들은 아버지와 갈등상황에서 약자의 역할에 선다. 약자에 해당하는 것은 사랑에 빠진 두 여인과 두 하인이다.

 

연극은 힘을 가진 자들을 우습게 묘사한다. 재벌 아버지들은 강하고 영리해 보이지만 스카펭의 간계에 쉽게 넘어갈 정도로 순진할 뿐만 아니라, 위기 상황에서 벌벌 떨고 희생을 강요하는 등 비열하고 우스운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들은 매우 탐욕스러운 인물이기도 한데, 아들이 군함에 납치되었다는 말에 아들을 걱정하기보다 너무 많은 돈을 요구한다고 불만을 토해낸다. 도련님들도 하인들과 비교해 상대적인 강자의 역할에 서지만, 그들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하인의 말에 쉽게 납득하고 유약한 모습을 보여준다. 겁쟁이에 깍쟁이 같은 모습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약자들은 상대적으로 강자를 비웃고 약 올리는 역할로 등장한다. 영리한 스카펭과 온순한 실베스트는 두 커플의 사랑을 이루어지기 위해, 그리고 개인적인 원한을 풀기 위해 강자를 놀리고 흠씬 두들겨 팬다. 스카펭의 근시안적인 해결책은 금방 들통 나지만, '막장 드라마'같은 방식으로 문제가 해결된다.

 

작품에서는 다양한 갈등상황이 연출되지만,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비극과 고통에 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사랑의 위기, 고통, 인간의 결함은 반복적인 단어사용과 유쾌한 음악적 효과로 깊이 묘사되지 않는다. 갈등상황에서 필연적으로 고통이 묘사되어야 하지만, 슬랩스틱과 장난스러운 대사로 관객과의 거리를 유지한다.

 

전반적으로 희극은 강자의 위엄을 해체하고 약자들이 승리하는 서사적 구조를 지니고 있지만, 윤리적이거나 지적인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 대신 인간 생활에서 느끼는 감정과 아이러니를 포착하여 이를 유쾌한 방식으로 다룬다. 작품과 앞과 뒤에는 소박한 음악과 대사로 사랑과 우정에 관한 노래가 삽입되는데, 이러한 노래가 작품적 경향을 잘 보여준다.

 

 

[국립극단] 스카팽(2022) 공연사진08.jpg

 

 

 

2. 세련된 재매개


 

일반적으로 희극은 슬랩스틱과 음악적 요소를 엮어내 관객들의 웃음을 유발하는 오락적인 목적의 작품이다. 몰리에르는 '스카펭의 간계'에서 이런 오락적 요소를 충실히 담아낼 뿐만 아니라, 당대 생활사에서 등장하는 인간 군상에 집중하여 그들의 약점을 폭로한다. 약자가 강자를 놀리면서 발생하는 웃음과 순진하게 느껴지는 낙관적 전개는 인간이 가진 소박한 희망과 열정을 들여다보게 한다.

 

명동예술극장의 '스카팽'은 이러한 희극적 장치를 극대화하기 위해 독특한 재구성을 시도했다. 개인적으로 이번 작품의 연출적 시도를 투박하게 구분 짓는다면, 현대에 맞는 개작, 무대 안의 무대, 몰리에르의 등장이라고 할 수 있다.

 

400년이라는 시간을 거쳐 올라온 무대답게, '스카팽'도 현대사회에 맞게 개작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아르강뜨의 여성화다. 연극은 가부장적이고 잘 속는 아버지를 날카롭고 잘 속는 어머니로 바꾸었다. 코메디아 델라르테가 당대 보이는 인물들을 유형화하여 풍자했던 것처럼, 새로 만들어진 아르강뜨도 부유하고 이기적인 재벌집 어머니로 묘사하고 있다. 단순히 여성화시킨 아르강뜨가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상상할 수 있는 강자의 스테레오 타입을 아르강뜨로 다시 표현하였기 때문에 아주 세련된 표현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르강뜨가 자연스럽게 녹아들었기 때문에 스카팽도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이런 부분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대사에서도 적절한 개작이 이루어졌다. 땅콩 회항과 같은 현대사회의 이슈, 연말이라는 연극의 상황 등 현대 대한민국 관객에게 맞는 형태로 변경하였다. 이러한 연극의 적절한 개작으로 몰리에르의 작품의 매력이 쇠하지 않고 시간을 초월할 수 있었다.

 

스카팽은 또한 캐릭터의 변경 등을 숨기지 않고 그대로 드러내는 방식을 취한다. 스카팽에서는 무대를 실시간,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공간으로 묘사한다. 배우와 연출가는 물론이고, 곡을 연주하는 사람과 관객들의 의견에 따라 작품은 반응하듯 움직인다. 이러한 연출을 잘 보여주는 것이 무대의 공간 배치다.

 

스카팽의 무대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무대는 앞서 말했듯 역동적으로 반응하는 공간으로, 가장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그 무대 양쪽에는 배우들이 대기하는 의자들이 줄지어 놓여있다. 배우들은 이곳에서 음악이나 연출을 보조한다. 무대의 오른쪽 앞에는 몰리에르의 책상이 있다. 이러한 공간배치로 인해 작품 내내 관객들은 작품과 적절한 심리적 거리를 유지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은 작품의 외부자로서 존재해야 하는 몰리에르의 적극적인 참여다. 본디 극작가는 작품 뒤에 숨어있게 되지만, 스카팽에서는 -그가 대사에서 외친 대로- 배우이자 극작가, 극단 주인으로서 작품 전체에 관여한다. 희극에 열중한 몰리에르의 삶을 그대로 드러낸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사실 '스카팽'이라기보다 몰리에르의 예술적 작품들을 기리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연극의 시작과 끝에서 몰리에르는 희극을 올리게 된 삶과 이러한 작품들을 현대 관객들에게 보여줌에 대해서 직접 설명한다. 작품 내내 몰리에르는 '연결해'라는 발언을 통해 작품을 이어나간다. 연극 내에서 표현된 연출에서 서사는 때로 구멍이 있는 것처럼 보이고, 갑작스러운 해피 엔딩에서는 배우들의 악평을 받기도 하지만 몰리에르는 뻔뻔하게 작품을 연결해나간다. 내게는 서사적 섬세함보다는 인간의 희노애락에 초점을 맞춘 희극과 몰리에르의 작품관을 보여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국립극단] 스카팽(2022) 공연사진17.jpg

  
 
 

3. 나가며


 

의견이 분분하겠지만, 개인적으로 한국에서 창작되는 많은 작품이 '엄숙한 분위기'에서 창작된다고 생각한다. 크고 작은 역사적 굴곡에서 한국의 예술가들은 무거운 짐과 사명의식을 통해 작품을 만들어왔다. 이에 따라 작품에 대한 평가도 작품이나 작가의 메시지보다는 사회 속에서의 의미에 따라 정해지는 경향이 있었다.

 

국내에서 몰리에르의 작품이 셰익스피어보다 알려지지 않은 것도 이러한 경향이 한몫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슬픔만큼이나 웃음도 인간이 타고나고 할 수 있는 가장 본능적인 행동표현이다. 분명 '스카팽'에는 머리를 싸맬만한 메시지는 없고 그에 대한 교훈도 남기지 않는다. 하지만 '스카팽'은 비극과 다른 방식으로 인간사회의 진실을 담고 있다.

 

희극 '스카팽'은 당대 사회의 시스템적 모순을 지적하는 대신, 사회적 역할 속에 숨겨져 있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약점을 적극적으로 드러낸다. 가진 것에 대한 욕심, 순진함, 두려움, 사랑과 우정이라는 미덕은 스카팽을 이끄는 주요 주제다. '스카팽'에서 나온 음악의 가사대로, 사랑과 우정은 개인이나 인간사회에서 불변하는 것이며, 꿈이나 예술 같은 가상 공간에서도, 몰리에르와 현대인이 살아가는 현대공간에서도 유지되는 것이다. 몰리에르의 희극이 시간을 지나도 살아있는 것은 그가 그 시대에 포착한 인간성은 불변하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스카팽'은 좋은 작품이다. 하지만 배우의 연기가 빛을 발하는 작품이어서, 센스있는 재미로 가득 찬 이야기여서 좋은 작품인 것만은 아니다. '스카팽'은 대사와 캐릭터, 연출은 시대 상황에 따라 역동적으로 변화시켰다. 하지만 몰리에르가 정말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만은 왜곡 없이 그대로 전하고 있다. 그래서 '스카팽'은 몰리에르에 대한 이해와 그의 작품관에 바치는 특별한 애정이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몰리에르가 몇백 년을 타고 이 작품을 감상했다면, 정말 기뻐했으리라.

 

 

[국립극단] 스카팽(2022) 포스터.jpg

 

 

[이승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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