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정체성의 줄다리기 [문화 전반]

글 입력 2022.12.25 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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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겟아웃: 백인 이데올로기의 확장, 관중으로서 흑인


 

무서운 영화를 못보는 탓에 호평을 받았던 영화 '겟아웃' 보기를 미루다가 몇달 전 큰맘을 먹고 보았다. 밤에, 혼자 있는 방에서. 감독 조던 필의 유머감각이 이렇게 고마울수가. 희미하게 깔린 유머코드와 남자주인공의 흥 많은 친구가 아니였다면 정말 무서울 뻔 했다.

 

공포영화로 분류되는만큼 겟아웃의 일차적인 '공포성'을 이야기 하지 않고 넘어갈 수 없다. 그 중에서도 몇몇 장면은 가히 단순하면서도 천재적이다. '왜 이런걸 만들 생각을 못했지?'라는 질문이 들게 하는 것이 바로 훌륭한 발명이라는 말을 되뇌이며. 남자주인공 크리스가 초대받은 여자친구 로즈의 집에서 만나는 도우미 아주머니 조지나는 호시탐탐 크리스를 감시하면서도 한 장면에서는 눈물을 흘리게 되는데 그 뒤틀림의 기괴함이란. 슬픔과 이성의 줄 당기기. 또 로즈의 집에서 일하는 집사 월터가 밤산책을 하고 있는 크리스 쪽으로 힘껏 달리는 장면이나, 갑작스럽게 온 로즈의 백인 친척들 사이에서 어색해진 크리스가 2층으로 올라가자 1층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말을 멈추고 조용히 시선을 들어 2층을 보는 장면.

 

포스터의 흑백 대비만큼 영화에서는 계속해서 대비가 반복된다. 일상적인 것과 비일상적인 것의 극명한 대비, 한 사람 안에서 일어나는 "흑인"과 "백인"의 대비. 언젠가 비가 내린 뒤 고동색의 나무와 하늘의 선명한 대비를 바라보며, '컨트라스트!', 대비라는 것은 아름다움으로의 지름길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겟아웃을 보고난 후 대비가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특히 일상적인 세팅 안에서 일상적인것과 비일상적인것의 줄다리기는 신선하게 공포를 자아내는 방법일수도 있음을 목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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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 로즈의 집안인 아미티지 가문은 흑인의 신체를 원하는 백인에게 흑인의 신체에 접속할 수 있도록 해주는 일을 한다. 말하자면, 흑인의 몸은 그대로 있고 백인의 자아만 그대로 들어가는 셈. 영화의 은유는 신선하다. 백인이 흑인을 통해 존재, 즉 백인(의) 이데올로기를 확장시키고 흑인은 단순한 관중이 된다는 괴담 혹은 보고.

 

해석이야 다양하겠다만은 필자는 집단의 고유한 전체성과 다양성에 대해 집중했다. 생각나는 단어들을 거칠게 나열해 보자면, 미국 문화의 역사를 "흑인의 것"이 백인 문화의 주도 아래 최면 당하고 천천히 씻겨 내려간 역사로 읽을수도 있는지. 또는 흑인이 "흑인스럽지 않은 것"을 욕망하게 된다면 그것은 다양성의 일종인지 뼈저린 지배인지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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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흔히 "Melting Pot"으로 불리지 않는가? 말하자면 문화 내지는 인종의 용광로다. 다양한 백그라운드를 가진 사람들의 고유한 문화가 녹고 그 전과는 다른 제 3의 문화가 창조되는 것을 말한다. 미국을 중심으로 세계 경제와 정치가 돌아가니 국내에서는 이 멜팅팟이란것도 긍정적인 뉘앙스를 띄기 마련이지만, 개개인의 고유한 문화가 녹기까지는 죽게 하는 불이 필요하다. 용광로는 본질적으로 몸이 타들어가는 곳이 아니던가.

 

그런데 문제는 더 복잡하다. 현재는 흑백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대단히 뒤쳐진 것처럼 보일 뿐더러 정확히 무엇이 "백인적인 것"이고 무엇이 "흑인적인 것"인지 분리할 수 없다. 정말 미국이 Not Black America Nor White America, but "One America"가 된 것일까? One America는 화학작용이였나 임시적인 봉합술이였나.

 

 

 

Kendric Lamar and Kanye West: 떼어낼 수 없는 '우리'


 

한 집단의 개인이 그 집단에 대해서 느끼는 바를, 그 집단에 속하지 않고서는 완벽히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물론 한 집단 안에서도 개개인은 너무나 다양하기 마련인 것이고. 그래서 흑인이 자신의 정체성으로서 흑인을 얼마나 중요시 생각하는지, 중요시 생각한다면 자신이 상정하는 '흑인 정체성'은 무엇인지 하는 것에 나는 절대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 백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래도 뭐랄까, 흑인 문화의 고유한 것이 명맥을 유지하는 곳이 있다면 바로 힙합 전선이라고 생각된다. 힙합에서 흑인 래퍼들의 존재감은 절대적인데 그 중에서도 켄드릭 라마와 칸예 웨스트의 랩과 행로를 보자면 그 집단정체성이라는게 무시할 수 없는 것, 아직까지도 팔딱팔딱 뛰는 것이라는 인상을 받게 된다. 

 

칸예 웨스트는 미국에서 흑인들이 스스로가 피해자라고 생각하게 되는 굴레가 계속해서 재생산되고 있으며 사실이든 아니든 바로 이 굴레가 진정으로 흑인이 발전하는 것을 막는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과거 공화당-정확하게는 트럼프-을 지지하는등 많은 흑인 유권자들과 다른 모습을 보이는 칸예를 보고 있자면, 흑인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강렬히 끌어 안으면서도 그 정체성을 새롭게 꾸려나가보려는 시도가 엿보인다. 

 

켄드릭 라마는 "Ignorance is Bliss", "The blacker the berry", "n95"등에서 흑인 집단 내에 있는 문화를 해부해 내보이며 솔직한 심정을 드러낸다. 스스로가 속한 집단의 문제를 관찰하고 가사로 써내려가는 것은 스스로를 완벽히 분리할 수 없는 '자신의' 일인 만큼 고통스럽겠지만 수술을 하기 위해서는 상처에 접근해야 하는 단순한 진리에 따라 켄드릭은 계속 랩을 한다.  


개인적으로 평가하자면 포스트 모더니즘과 개인주의의 부상으로 집단 정체성이라는 것은 몇년전까지 정치적으로 계속해서 하락해왔다. 오바마는 미국이라는 하나의 나라에서 차별과 분열에 대항하는 의미로 One America를 외쳤다. 그러나 이후 좁은 의미에서의 미국인-미국 국적권자들-을 위한 정치를 펼친 트럼프가 등장했고 멕시코 국경에 벽을 세우기에 이르렀다. 이야기는 계속된다. 유럽 많은 나라에서는 극우 정당들이 힘을 얻고...선을 어떻게 그리는지, 그 선의 각도를 어떻게 하는지, 동그라미는 얼마나 크게 그릴지, 그 동그라미 안에 누구만을 들어오게 할지는 조금씩 각각 다르나 이 정체성 정치는 계속해서 명맥을 유지한다. 마치 유지될 수 밖에 없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필자는 아직 20대를 살고 있는데 아직까지는 집단이라는 뿌리이자 틀 같은 것이 지워진 개인의 모습을 쉽게 상상할수는 없다. 집단 정체성은 개인에게 그 나름의 색과 향을 입힌다. 집단의 옷을 입은 개인은 매력적이고 단단하다. 집단 정체성을 떼내려는 노력은 무익할 뿐만 아니라 개인의 중요한 부분을 거세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거시적인 측면에서 집단 정체성을 다루는 문제는 조금 더 신중할 필요가 있다. '우리'를 말하면서도 우리와 다른 '그들'을 배척하지 않고 함께 살아가는 새로운 정체성 정치도 존재할 수 있을까?

 

 

 

 

켄드릭 라마는 좋은 시작이다. 그는 쉽게 말해지는 '우리'와 그 '우리'의 정체성에 대해 먼저 묻게 한다. 거창한 질문일수록 현실에 대한 유리조각 같은 진실들이 필요한 법이니까. 그 여정에서 '그들'과 평안히 만날 수 있는 힌트를 찾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남영신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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