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심연의 감정을 다룬 단편 소설집, 레이디스 [도서]

평온한 밤의 공기를 찢어내는 어두운 상상력
글 입력 2022.12.18 04:07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 REVIEW ***

레이디스 Ladies

 

 

레이디스 표지-최종-띠4.jpg

 

 

장편 소설과 단편 소설은 같은 소설 장르이지만 텍스트의 매력은 전혀 다르다고 생각한다. 장편 소설이 긴 호흡으로 서사를 전개해나간다면 단편 소설은 짧은 분량 속에 인물의 감정이나 분위기를 강하게 전달하기 때문이다.

 

도서 <레이디스>는 이런 특징이 살아있는 단편 소설 16편을 담아낸 소설집이다. '20세기의 에드거 앨런 포', '서스펜스의 대가', '불안의 시인'과 같은 화려한 수식어로 불려온 작가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초기 심리 소설들을 엮었다. 하이스미스가 쓴 수많은 단편 소설 중 청년 시절에 쓴 심리 소설만을 모아 선보이는 첫 도서이기도 하다.

 

 

"하이스미스는 최면을 거는 문장으로 서스펜스를 한껏 끌어올리는 최고의 작가다."


- 더 타임스

 

 

작가를 수식하는 단어에서도 알 수 있듯이 <레이디스>의 소설들은 불안한 감정, 강박, 어딘가 모르게 불편한 일상들을 다룬다.

 

어두운 밤거리에서 내 뒤를 쫓아오는 낯선 이에 대한 공포(미지의 보물), 첫인상이 좋았던 도시에서의 설렘이 실망과 적대감으로 변하는 순간(최고로 멋진 아침), 대도시로 이주해 온 가족이 느끼는 두려움과 불안감(공 튕기기 세계 챔피언), 친절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불편한 낯선 이방인(엄청나게 친절한 남자)과 같은 상황은 현대 사회에서 누군가 한번쯤은 경험해봤을 것이다.

 

불안한 감정이 심화되어 강박적인 모습을 보이는 인물들도 있다. '영웅'의 루실 스미스는 정신 질환자인 어머니의 죽음을 겪고 자신도 그 병을 앓고 있지 않나 하는 불안에 시달린다. 정상적인 모습으로 보이고 싶다는 강박, 가정교사로 근무하는 가정에서 무한한 인정을 받고 싶다는 뒤틀린 욕구가 결합되어 그녀는 결국 집에 불을 지른다. 

 

'애프턴 부인, 그대의 푸르른 산비탈에 둘러싸여'의 애프터 부인은 남편에 대한 고민으로 조금은 집착적인 정신과 상담을 받는 인물이다. 하지만 정신과 의사가 그 실체를 확인했을 때, 남편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고, 애프터 부인 역시 그녀의 본명이 아니었다.

 

'미스 저스트와 초록색 체육복'의 미스 저스트는 완벽한 대열을 맞추기 위해 학생들을 마치 군인처럼 통제한다. 방문객이 참관하기 하루 전 날, 미스 저스트의 예민함은 정점을 찍는데 정작 공연 당일, 참관인들은 공연을 다 보지 않고 허무하게 돌아가버린다.

 

 

"악, 탐욕, 시기, 사랑, 증오, 이상한 욕망,

정신과 현실의 적들, 기억의 무리-

이 모두가 부디 나의 평화를 망치기를"

 

-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하이스미스의 소설은 인물의 상황에 독자가 제대로 몰입하게 만든다. 분량은 짧지만 소설을 읽어내려가는 동안 가슴이 쿵쾅거리고 입술이 바짝 마른다. 불안한 상황, 강박적인 모습, 어딘가 알 수 없는 불편함 때문에 괜시리 초조해진다. 객관적인 문체로 인물들과 철저하게 거리를 둬 쉽게 읽을 수 있지만 소설을 다 읽은 후의 감정은 뭔가 찝찝하고 개운하지 않다.

 

그 이유는 아마 섬세한 묘사 덕분이 아닐까. 하이스미스의 문체는 건조하며 그 어느 인물에게도 감정을 섞지 않는다. 하지만 소설 속 상황은 아주 자세하게 설명된다. 

 

"나중에야 내가 일반 우유를 찾는다는 걸 그 친구가 알아차렸는데, 그러고도 또 묻더라고. 단맛 나는 건 없다는 거야. '그럼 버터밀크를 좀 줘요.' 내가 말했지. '우리 가게에는 버터밀크도 없어요.' 그러더라니까." 에이제이는 손을 뻗어 토스트 한 조각을 집어들었다. 소리내어 웃고 있었지만, 그의 푸른 눈동자에는 그늘이 져 있었다. 그 뒤에 따라 들어온 세 명의 손님, 카운터 점원과 그가 버벅거리며 나누는 대화를 보던 그들의 조바심 가득한 미소, 자기가 그들과는 딴판으로 언어를 쓴다는 자각. (공 튕기기 세계 챔피언, p.132)

 

뉴욕이라는 대도시로 이주해 온 첫날은 가족에게 모두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일자리를 구하다가 귀가한 집안의 가장은 자신이 오늘 카페에서 경험한 이야기를 가족에게 들려준다. 일상 속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유쾌하게 풀어내는 듯 하지만 하이스미스의 묘사 속에서 독자는 그가 그 순간 경험했을 당혹스러움과 새로운 환경에 갖는 불안감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16편의 이야기들은 모두 흡입력이 강하다. 어떤 이야기는 허무할 수도, 어떤 이야기는 의문으로 끝날 수도 있지만 모든 소설들을 읽으며 경험하는 감정만큼은 강렬하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지니고 있을 불안이나 공포를 서스펜스가 가득한 소설로 느껴보고 싶다면 소설 <레이디스>를 적극 추천하고 싶다.

 

 

[정선민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3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