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닿지 않는 말에서 건져낸 기억 - 연극 '미세스 엠알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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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을 믿는 곳, 극장
관객은 연극을 보기 위해 극장에 간다. 표를 확인받고, 입장해서 자리에 앉아 있다가 시간이 되면 시작하는 공연을 감상한다. 각자 다른 곳에서 다른 삶을 살던 관객들은 공연을 통해 같은 시간을 공유하는 특별한 우연을 맞이한다.
어느 정도 정형화된 공연 감상의 과정에서 극장의 존재는 공연을 위한 여러 조건 중 하나일 뿐이다. 다시 말해 극장이 관객 각자에게 집에서 가기 편하다/불편하다, 좌석이 편하다/불편하다 정도의 인상은 줄 수 있지만, 극장 그 자체가 공연 내용의 중심이 되는 일은 드물다. 대부분은 가상의 인물들과 그들이 만드는 이야기가 공연에서도, 관객의 감상평에서도 중심이 된다.
극단 코끼리만보의 <미세스 엠알아이>는 정해진 대본 없이 리서치 워크숍과 창작 워크숍을 거쳐 만들어진 공동창작 작품으로, 한 편의 이야기 대신 ‘어떻게 우리 자신 및 타자들과 대면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담은 일종의 퍼포먼스를 선보인다.
그 시작은 지금껏 연극의 주인공이 되어본 적이 많지 않은 극장이라는 공간을 관객 앞에 불쑥 내세우는 것이다. 극이 시작되면 배우들이 한 명씩 돌아가면서 ‘이곳’의 특징을 말한다. “이곳은 시끄럽습니다.” “이곳은 매우 조용합니다.”처럼 그중에서는 서로 모순되는 말들도 있다.
극장에 대해서 배우들이 하는 말들은 거짓말인 동시에 참이다. 거짓말인 까닭은 극장이 기본적으로 허구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곳은 사실 지하에 객석과 조명장치를 갖춘 빈 공간에 불과하다. 하지만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극장은 어디든 될 수 있기에, 배우들의 말은 모두 참이기도 하다. 공연 시간 동안 관객은 이곳이 산이고, 바다고, 우주라고 믿는다. 그 암묵적인 약속 덕에 연극이라는 예술이 가능하다. 그래서 극장은 무엇이든 될 수 있으면서 아무 곳도 아닌 장소다.
그렇다면 이렇게 배우들이 극장을 말하는 동안 극장은 어디가 되는 것일까. 보통은 공연이 시작됨과 동시에 금방 조명과 이야기 아래에 묻혀버리는 게 극장의 존재이지만, 이 연극에서는 극장을 새삼스러운 공간으로 만든다. 관객은 자신이 앉아 있는 자리를 계속 의식할 수밖에 없다.
말의 파편 사이를 헤매다
여섯 개의 챕터로 이루어진 연극은 이렇다 할 줄거리 없이 흘러간다. 각 챕터는 서로 연결되지 않는다. 무대 위에서 배우들은 계속해서 몸을 움직이고 말을 한다. 하지만 그 말은 서로 연결되지 않는다. 말의 기능이 상대방과 소통하기 위한 것이라면 이 무대 위의 말들은 기능을 잃은 셈이다. 상대방에게 닿지 못하는 말은 공중을 떠돈다. 이러한 말의 파편은 시 또는 마음속에서 갑작스럽게 떠오르는 혼잣말에 가깝다.
쏟아지는 말의 파편 사이에서 관객은 당황한다. 원래 극장에서 배우는 누군가를 연기한다. 그 인물은 무대 위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며, 그가 하는 말도 실제로 그 인물이 현실에서 하는 말 같다. 관객은 연기라는 것을, 허구의 이야기라는 것을 알면서도 거기에 감정을 이입한다.
하지만 <미세스 엠알아이>에는 인물도 그 인물이 만들어가는 이야기도 없기에 무대 위의 말을 믿는 것이 어려워진다. 두서없이 흘러나오는 말은 정해진 대사일까 아니면 배우 본인의 이야기일까. 계속 의심하고 말의 의미를 곱씹게 된다.
이 연극에서 배우들은 특정한 인물이 되지 않고 그저 말하는 존재로만 남는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다른 존재와 구분되는 특징을 가진 이가 두 명 있다. 매 순간 모든 것을 잊어버리는 남자와 사람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여자가 그 주인공이다. 두 사람이 가진 특징은 이 연극에서 최소한의 서사가 된다.
물론 여기서 두 사람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다거나, 그들의 특징으로 인한 이야기가 펼쳐지지는 않는다. 각 배우는 짧은 말과 작은 움직임으로 무언가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이 어떤 모습인지 보여줄 뿐이다. 그런 과정에서 우리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일상의 말과 행동은 낯설어진다.
예를 들어, 남자는 현재 속에서 계속 기억을 잃어버리기에 "어디에 있었어, 떠난 줄 알았어"라는 똑같은 질문을 몇 번이고 반복한다. 문장은 같지만 그 문장을 말하는 어조는 매번 다르다. 장난기가 섞인 채 말했다가, 정색을 하고 화내며 말하기도 하고, 그저 안부를 묻듯이 가볍게 말을 던지기도 한다.
연극은 이런 방식으로 하나의 말에 무수한 감정과 상황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이 작품 속 수많은 말의 파편은 수많은 가능성이기도 하다. 어딘가에 닿기 전의 말, 무언가가 되기 전의 말을 관객은 세포분열을 하기 전 세포를 보듯이 관찰하는 입장이 된다.
MRI 속에서 흐르는 시간
왜 이 극의 제목에 ‘MRI’가 들어갈까 생각했는데, 공연을 보다 보면 중간중간 나오는 기계음이 MRI 소리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좁고 어두운 공간에서 움직이지 않고 20~30분을 버텨야 하는 MRI 검사를 떠올리면, 이 연극이 MRI 검사를 받는 누군가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여주는 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꼭 MRI 검사가 아니더라도 비슷한 상황은 많다. 잠들기 직전, 깨어난 직후, 열병에 시달리는 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순간. 그럴 때 떠오르는 것은 이 연극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맥락이 없는 말 한마디, 작은 움직임 따위다. 무의식과 의식의 경계가 흐려질 때, 모든 것이 가능해진다. 거기에는 원인도 결과도 없다. 현실에서와 달리 무슨 일이 일어난다 해도 그 일은 다음 일을 불러오지 않는다.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일상에서 매 순간 경험하는 수많은 자극과 상황 중 극히 일부일 뿐이다. 선별되지 않은 나머지는 모두 무의식의 바다가 집어삼킨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들을 무의식의 영역에 던져 넣으며 살아가고 있을까. 잊힌 것들은 MRI 기계에 들어가 있을 때처럼 경계가 느슨해지는 순간에야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이 극은 자꾸만 관객을 MRI 속으로 밀어 넣고 우리의 무의식에 가라앉아 있던 것들을 바깥으로 소환하려 한다. 그래서 <미세스 엠알아이>는 보는 것보다 체험하는 연극에 더 가깝다는 느낌을 준다. 관객은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간을 공유하지만 각자 다른 공연을 본다. 마치 우리가 똑같이 잠들어도 모두 다른 꿈을 꾸는 것처럼.
[김소원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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