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서 해방을 그리는 상상의 양면 – 연극 '서울빠뺑자매'

연극만의 매력으로 그려낸 억눌린 욕망과 상상이 향하는 곳
글 입력 2022.12.05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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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미 너무 잘 알고 있는 ‘상상’이라는 단어는, ‘실제로 경험하지 않은 현상이나 사물에 대하여 마음속으로 그려 봄’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상상을 통해 현실을 외면하고 도망가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를 바탕으로 다른 현실을 꿈꾸며 현실을 바꿔 가기도 한다. 그렇기에 ‘상상’은 우리 개인의 삶은 물론 우리 사회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상상의 가장 중요한 전제는 ‘실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는 상상이 가진 한계이자 가능성이며, 함정이기도 하다. 상상은 비현실을 현실로 바꾸기 위한 중요한 기반이 되지만, 상상은 ‘현실’이 아니며 상상만으로는 현실을 바꿀 수 없다. 앞서 이야기했듯 상상이 그저 현실을 외면하기 위한 잠깐의 일탈에 그친다면 오히려 현실을 더욱 공고히 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 그렇기에는 우리는 상상이 가진 전제를 제대로 인지하고 마주보는 것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상상은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넘나들며 ‘상상’이란 것이 전혀 불가능할 것 같은 곳에까지 그 힘을 발휘한다. 예컨대 일상적인 감시가 벌어지는 감옥 안에서 ‘장 주네’가 하녀들의 이야기를 써내려 간 것처럼 말이다. 당시 프랑스의 많은 철학자와 예술가들이 주목했던 ‘하녀 파팽 자매 사건’을 모티브로 한 장 주네의 상상은, 1940년대 프랑스를 넘어 다양한 시공간에 영향을 미쳤고 이는 2022년 서울로도 이어졌다.

 

창작집단 상상두목의 연극 <서울빠뺑자매>는 ‘장 주네는 어떻게 『하녀들』을 집필하게 되었을까?’라는 상상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극 안에서 죄수 ‘435’는 장 주네의 인형을 만들어 새로운 빠뺑자매 이야기를 상상하며 인형극을 펼치고, 그 인형극 안에서 ‘크리스틴과 레아 빠뺑 자매’는 서로가 마담과 하녀가 되어 또 다른 역할극 놀이를 펼친다.

 

이렇게 극중극 형식으로 전개되는 연극 <서울빠뺑자매>는 ‘상상’의 다른 이름으로 ‘욕망’과 ‘해방’을 호명한다. 그리고 감시와 억압으로 억눌린 욕망이 가득 찬 현실과 자유와 해방을 꿈꾸는 비현실의 경계에 있는 우리에게, 현실과 상상을 마주하고 욕망을 이루는 방식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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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을 그리는 상상의 양면



연극 <서울빠뺑자매>의 주제는 크게 자유와 소유, 이 두 가지 욕망과 이에 대한 억압을 축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죄수 435와 빠뺑자매는 각각 감옥 안에, 또 사실 상 마담의 집 안에 갇혀 있으며 일거수일투족을 간수와 마담에게 감시 당하고 있다. 그렇기에 그들은 어떤 행동도 자유롭게 할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435는 ‘장 주네’라 명명한 자신의 분신을 통해서야 자유롭게 상상하며 인형극을 주도할 수 있었고, 이 역할극에서만은 ‘감시 당하는 자’가 아닌 빠뺑자매의 이야기를 ‘들여다 보는 자’가 될 수 있었다.

 

한편 ‘마담의 것은 결국 어느 것도 소유할 수 없었던’ 빠뺑자매는 계급 차이로 인한 억압 아래 놓여 있기도 하다. ‘마담과 하녀’라는 관계에서 극적으로 드러나는 공고한 계급 차이는 계속해서 마담과 하녀를 구분하고, 자매들이 어떤 것도 온전히 소유할 수 없도록 한다.

 

 

“너희들은 모든 것을 가져도 좋아.

단, 내가 버린 것이어야 한다.”

 

 

그들에게 ‘아름다움’이라는 가치는 철저히 마담을 기준으로 존재했으며, 소유에 대한 욕망 역시 마담으로부터 생겨나 마담으로부터 저지(沮止)당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빠뺑자매는 그들만의 역할극을 통해 ‘마담’이 되고 나서야 ‘아름다운 것들’을 온전히 소유하고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었다.

 

 

컨셉사진_서울빠뺑자매(9).jpg

 

 

극 중에서 435와 빠뺑자매가 보여주는 소유와 자유에 대한 욕망과 이에 대한 억압은 완전히 분리하여 생각할 수는 없고, 서로 관계하며 심화된다. 가령 빠뺑자매의 경우 그들이 자유롭게 행동하지 못하고 아름다운 것을 온전히 소유하지 못하는 것은 계급의 차이에서 비롯되며, 감시를 통해 소유에 대한 억압이 더욱 심화된다. 435의 경우에도 일상적인 감시 아래에 있기 때문에 스스로의 이름조차 가질 수 없고, ‘장 주네’의 인형을 통해서만 자신이 만든 이야기를 온전히 펼칠 수 있다.

 

435와 빠뺑자매는 이렇게 소유와 자유에 대한 억눌린 욕망을 각각 역할극 ‘놀이’를 통해 풀어가지만, 이는 상상의 소산일 뿐 실제로 그들이 처한 현실을 바꾸지는 못한다. 이 ‘놀이’가 끝나면 435는 간수의 감시를 받는 죄수로 돌아가고, 빠뺑자매는 마담에게 모욕을 당하면서도 하녀의 위치에서 벗어날 수 없는 현실 속 레아 빠뺑과 크리스틴 빠뺑으로 돌아갈 뿐이다. 

 

하지만 ‘놀이’가 반복되고 극의 후반부가 될수록 435와 빠뺑자매가 마주한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는 점점 뒤틀리고 모호해지기 시작한다. 435를 감시하던 간수는 435가 주도하는 역할극에 참여하여 이번에는 빠뺑자매를 감시하는 마담이 된다. 또한 빠뺑자매는 그들만의 역할극 놀이 안에서 마담을 향했던 계획과 행동을 실천에 옮긴다. 이를 통해 감시의 주체와 대상을 구분하는 경계는 모호해지고, 그저 상상 속에서 해방을 흉내낼 뿐이었던 그들의 놀이는 점점 현실이 된다.

 

해방을 그리던 그들의 놀이가 현실에서 결국 파국으로 재현되는 것은 오히려, 435와 빠뺑자매가 마주했던 일상적인 감시와 억압에서 벗어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그리고 이러한 감시와 억압 뒤에 있는 구조가 얼마나 공고한지를 보여준다. 빠뺑자매는 놀이를 통해 해방을 꿈꾸면서도 오직 마담을 기준으로만 욕망하고 상상할 수 있었기 때문에, 억압에서 벗어나기 위한 그들의 시도는 마담이 되거나 마담을 없애는 것 이 두 가지만을 향했다. 그리고 그들은 결국 살인과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쓰는 데 이르렀다.

 

이렇게 이들의 이야기가 현실과 비현실, 극과 극 사이의 경계를 뛰어넘을 때, 무대와 현실의 경계도 함께 희미해진다. 극의 마지막 빠뺑자매는 <서울빠뺑자매>라는 제목에 걸맞게 인천국제공항으로 입국하지만, 사실 전체적인 극을 봤을 때는 ‘서울’이라는 지역명과 연극을 잇는 연결고리는 약하게 느껴졌다. 따라서 꼭 ‘서울’이었어야 하거나 이 이름이 중요하다기 보다는, 감시와 억압 그리고 억눌린 욕망에 대한 연극의 이야기가 ‘서울’이라는 이름을 통해 연극을 보고 있는 지금의 우리의 삶으로 연결되고 확장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시간 그 장소에 연극을 보는 우리는 감옥 안에 있지는 않지만 다양한 이유와 방식으로 행해지는 감시와 제약 아래에 자유롭게 행동하지 못한다. 그리고 우리 사회 속 마담과 하녀라는 관계의 이름은 사라졌지만, 더 정교해진 계급의 벽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욕망을 통제하고 억누른다. 그렇기에 우리는 435와 빠뺑자매 이야기를 통해 다시 한번 지금 우리의 상상과 억눌린 욕망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욕망하고 상상하고 있는지 다시 한번 살펴봐야 할 것이다. 

 

연극이 은유하는 우리의 현실을 제대로 마주하고 진정한 해방을 향하기 위해서는, 더 나은 현실을 꿈꾸는 우리의 상상이 우리를 억압하고 감시하는 ‘새장’ 너머까지 미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를 가두는 ‘새장’에서 벗어나 온전한 우리 자신으로서 자유롭게 행동하고 욕망할 수 있기를 바라보며, 연극 마지막 빠뺑자매의 절실한 외침을 주문처럼 놓아둔다.

 

 

“그대들 안의 새장 문을 열어라”

 

 

 

정교한 연출로 몰입을 높이는 연극만의 매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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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각도로 중앙의 무대를 비추는 CCTV와 철창, 그리고 천으로 둘러진 원형의 무대 주변을 순찰하는 간수. 연극 <서울빠뺑자매>를 보기 위해 극장 안으로 들어섰을 때 마주했던 모습이었다. 이렇게 시작되기 전부터 높은 몰입을 이끌어낸 극은 퍼포먼스와 다양한 소품, 회전무대를 사용한 연출 등을 통해 주제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연극만의 매력을 보여주었다.

 

특히 회전이 가능한 원형 무대 위에서는 빠뺑자매의 이야기를, 원형 무대 밖에서는 435의 이야기를 보여줌으로써 극중극 형식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표현한 점이 인상적이었다. 이를 통해 자칫 따라가기 어려울 수 있는 극중극의 전개와, 각각의 역할극 놀이가 서로의 경계를 넘나들며 관계하는 부분을 더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다.

 

또한 원형 무대를 둘러싼 천에 엿보기 구멍을 만들고, 무대 주변에 CCTV와 철창을 두어서 이야기의 전개와 별개로도 감시와 해방이라는 키워드를 전달하는 등 다양한 무대 장치와 제재를 활용하는 방식이 돋보였다. 이를 보며 무대를 구성하는 이러한 제재들은 비록 서사의 전개 과정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더라도, 관객들이 극을 더 다양하게 해석하고 풍부하게 감상할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에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극은 대사와 연기뿐만 아니라 435와 다른 죄수들이 펼치는 퍼포먼스를 통해서도 전개되는데, 이때 435는 빗자루와 종이봉투로 만든 장 주네의 분신(分身)을 사용하고, 다른 죄수들도 각자 빗자루를 들고 퍼포먼스를 펼친다. 이러한 퍼포먼스 속 우스꽝스럽고 허술한 분신을 통해 ‘장 주네’인 동시에 ‘장 주네’가 아니고, 들여다 보는 존재인 동시에 감시 당하는 존재인 435라는 캐릭터에 대해 더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연습사진_서울빠뺑자매_1109(1).jpg

 

 

이와 함께 극의 분위기를 형성하는 데 있어 435와 퍼포먼스를 함께하는 죄수들이 이야기하는 시나 노랫말 같은 대사들과, 빗자루를 터는 소리 하나 하나도 모두 연극의 중요한 일부로 느껴졌다. 따라서 연극을 보면서 이렇게 섬세하게 준비된 소품과 무대장치를 하나하나에, 다양한 캐릭터들의 몸짓과 대사 하나하나에 모두 눈길이 갔고, 이러한 연출적인 부분이 극을 여러 측면에서 해석할 수 있는 재미를 더한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연극 <서울빠뺑자매>는 정교한 연출이 어떻게 극의 몰입을 더하고 주제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도록 하는지, 연극이라는 장르만의 매력을 충분히 보여준 극이었다. 이처럼 이야기가 가진 힘을 더하는 다양한 측면들, 특히 연출이 채울 수 있는 완성도와 만족도의 영역을 더 발견할 수 있는 연극 작품들을 더 많이 만날 수 있기를 바라보며, 창작집단 ‘상상두목’의 행보도 함께 주목해 보려 한다.

 

 

 

김효중 PRESS 태그.jpg

 

 

[김효중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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