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아이와 나의 사회 [사람]

글 입력 2022.11.25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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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원에서 일하고 있다. 벌써 그렇게 된 지 몇 달이 지났다. 돈을 벌기 위해 시작했다. 하지만 모처럼 시간을 들여 하는 일인데 돈 이외의 의미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한 가지 규칙을 세웠다. ‘아이들이 자라는 과정에 어른으로서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행동하기’.

 

이 규칙을 세우게 된 배경을 설명하려면 내가 중학생 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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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다니던 곳은 국어, 수학, 영어, 사회, 과학을 모두 다 가르치던 종합 학원이었다. 과목별 선생님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과학 선생님이다. 안경을 꼈고, 브이넥을 입으면 가슴 털이 보이던, 그 사실을 알지만 별로 신경은 쓰지 않던 선생님.

 

당시 선생님은 수업을 위해 온갖 차별적인 말을 했었다. 대표적인 내용으로는 염색체를 배울 때 성염색체를 설명하며 “여자는 XX 년이기 때문에 XX 염색체”라고 한 것. 당시 나를 비롯하여 수업을 듣던 여학생들이 불만을 제기하자 선생님은 말했다. “진짜 그렇다는 게 아니라, 쉽게 외우라고 그러는 거야. 절대 안 까먹을걸.”

 

나는 정말 그 말을 잊지 않게 되었다. 아직까지도 XX 염색체와 XY 염색체를 헷갈리지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그때로 돌아가서 “저도 선생님이 정말 그렇게 생각하신다고 보지는 않지만, 학생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줄 수 있는 어른으로서 발언에 책임감을 가져주셨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하고 싶다는 생각을 아직도 한다.

 

가끔은 궁금하다. 그때 같은 수업을 들었던 아이들이 지금 어떤 어른이 되어 있을지. 그 시절 그 아이들이 정말 그런 말에서 능숙하게 진실과 거짓을 간파하고, 농담으로라도 낄낄거리지 않을 수 있었는지.

 

물론 학원은 학교가 아니고 아이들의 성적을 올리기 위해 탄생한 ‘영업장’이지만, 나와 학생들이 앉아 있는 교실을 정말 그렇게만 부를 수 있을까. 사람이 셋 이상 모이면 사회라고 했다. 나에게 학생들은 일종의 고객이지만, 동시에 사회에서 만난 아이들이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학생들에게 나는 일종의 서비스직이지만, 동시에 사회에서 만난 어른이기도 하다.

 

게다가 선생님이라는 직책은 보통의 어른과는 조금 다르다. 학생들은 생각보다 선생님을 좋아하고, 선생님에게 지대하게 영향받는다. 선생님의 관심을 끌고 싶어 하고, 같이 수다를 떨고 싶어 하고, 칭찬받고 싶어 한다. 절대 말을 듣지 않을 것처럼 굴다가도, “선생님은 너를 좋아해서 너랑 재미있게 이야기하고 싶지, 너를 혼내기는 싫다”고 설명하면 금세 조용히 따라준다.


그 사실을 의식하면 아이들을 대하는 것이 쉽지 않다. (사실 의식하지 않아도 아이들을 대하는 건 너무 어렵지만) ‘개소리’ 같은 말을 써도 괜찮은지, 똥이나 방귀 이야기로 아이들을 웃기는 건 괜찮은지, 아이들의 폭력적인 말에는 어떻게 접근해야 좋은지, 아이들과의 심리적 거리는 얼마만큼이 적당한지.

 

그런 것들을 시시때때로 고민하면서 옛날에 즐겨보던 <금쪽같은 내 새끼>의 오은영 선생님이 아이들을 어떻게 대하라고 했는지를 끊임없이 떠올리지만, 대체로 적당한 답을 찾지는 못한다. 역시 실전이 가장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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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아이들을 잘 키울 의무가 없다. 나는 일개 보조 선생님이고, 그냥 할 일을 다 하고 돈만 받아 가면 그만이다. 하지만 나나 아이들이나 영원히 학원 건물 안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언젠가 아이들이 학원으로 영원히 돌아오지 않게 되었을 때 그들이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막연한 즐거움을 느끼기를 바란다. 그 선생님에게 왜 그랬냐고 물어볼걸, 그러지 말아 달라고 할 걸 하는 오래된 후회나 실망 대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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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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